우리가 잃어버린 온도
요즘 세상을 보면, 놀라울 만큼 자극적이다.
뉴스 속 제목은 점점 더 세지고,
유튜브와 예능은 자극의 강도를 높인다.
심지어 일상의 대화마저도 ‘누가 뭐래더라’로 시작해
‘그게 진짜야?’로 끝난다.
누가 이혼을 했다는 소식,
누가 누구를 폭로했다는 기사까지.
사람들은 클릭하고,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순식간에 판단을 내린다.
물론 세상은 정보의 시대다.
모든 걸 알 수 있고,
누구나 의견을 낼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속도의 무게다.
너무 빠른 속도로 소비되는 이야기엔
생각할 틈이 없다.
자극은 빠르게 번지고,
그 열기는 오래가지 않는다.
잠시 분노하고, 잠시 울고,
그리고 곧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사건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다음 자극을 기다린다.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다.
요즘 방송을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이건 정말 위로를 위한 걸까, 아니면 흥미를 위한 걸까?’
누군가의 가정사가 예능의 소재가 되고,
아이의 눈물이 시청률이 된다.
‘공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그 장면들 속엔
사실상 철저한 ‘기획’이 숨어 있다.
물론 공감이 나쁜 건 아니다.
누군가의 상처를 함께 느끼고,
그 과정을 통해 위로를 나누는 건 소중한 일이다.
하지만 요즘의 공감은 진심이 아니라
편집된 감정의 소비로 변해버렸다.
한때는 조용히 아픔을 감췄던 이혼이
이제는 하나의 ‘콘텐츠’가 되고,
가정의 문제는 대중이 토론하는 ‘이슈’가 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냉소적이 된다.
남의 이야기 앞에서 쉽게 울고 웃지만,
정작 내 옆의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온기를 주지 않는다.
공감은 많아졌지만,
진심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요즘 세상은 말이 너무 많다.
모두가 말하고, 모두가 주장한다.
SNS에는 하루에도 수천만 개의 의견이 쏟아진다.
하지만 그 안엔 듣는 사람이 없다.
누군가의 경험은 곧 판단의 대상이 되고,
누군가의 감정은 누군가의 논쟁거리가 된다.
세상은 점점 시끄러워지고,
그 시끄러움 속에서
진짜 이야기는 묻혀간다.
사람들은 ‘공감’을 외치지만,
사실은 ‘반응’을 원한다.
좋아요, 댓글, 조회수...
그 숫자들은 더 이상 감정의 척도가 아니라
존재의 증거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요즘은 묻고 싶다.
정말 우리가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각자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더 큰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우린 너무 많이 보여주고,
너무 쉽게 판단하고,
너무 빨리 잊는다.
모든 걸 공개하고,
모든 걸 말해야 한다는 세상 속에서
가장 소중한 건
오히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온도 아닐까.
모든 걸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모든 걸 말하지 않아도 된다.
조금 덜 자극적이어도,
세상은 충분히 흥미롭다.
진짜 공감은
누군가의 눈물을 클로즈업할 때가 아니라,
그 눈물의 이유를
조용히 짐작할 때 생긴다.
절제는 감정을 누르는 게 아니라,
감정을 더 깊이 있게 만드는 힘이다.
자극은 순간의 불꽃이지만,
절제는 오래 남는 온기다.
이제는 세상이 조금 덜 시끄러워졌으면 좋겠다.
조금 덜 뜨겁고, 조금 더 따뜻한 세상.
우리가 잃어버린 건 정보가 아니라,
사람의 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