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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Oct 20. 2023

'우리'라는 관계주의와 '눈치 문화'

'우리'라는 관계주의

'눈치' - ‘우리’ 공동체가 요구하는 삶의 지혜

'노크'와 '찌개'


'우리'라는 관계주의     

농경사회였던 중국은 개개인의 심성이나 행동에 관심을 두기보다, '충효'에 기반한 사회정의에 더 치중하였다. 특히, 삼강오륜적 가치관을 내우는 공맹 사상은, '공동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으로서, 이런 '관계'를 숭상하는 동안, 유교에 바탕을 둔 ‘유교적 공동체’는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간주하였고, 개인의 권리보다 사회적 권리를 우선시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개인의 존재감은 ‘우리’라는 사회의 한 부분으로 재구성되어, 개인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억압되었으며, 상호 의존적으로, 다른 구성원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살 수 있었다.


조선은 한 때, 동방예의지국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우리 조상들은 다른 구성원과의 조화를 위해 ‘3강 5륜 (三綱五倫)’과 함께, 사람이 항상 지켜야 할 5가지 도리인 오상 (五常) -‘인의예지신 (仁義禮智信)’을 윤리의 근본으로 보았으며, 이중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로 -특히, '우리'라는 관계에서 ‘예 (禮)’를 강조하였다. 

 

사실, 예를 지키면 서로에게 편하고, 예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상종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때문에, ‘예’에 관한 한 조선인은 늘 재빠르게 주변 상황과 관계를 확인하고 민첩하게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여 ‘눈치’ 있게 대처해야 했다. 대충 뭐라 해도 ‘척'하면 '척’이었다. 내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입 맛’에 맞추는데 익숙하였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던가? 때때로 자신의 '체면이나 위상'에 맞추는 형식적인 예의에 매우 민감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열녀’나 ‘효자, 효녀’가 많았다. ‘열녀문’이나 ‘효자문’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을의 자랑이었고 가문의 자부심을 나타내었다. 이처럼, 유교정신은 남편이나 부모에 대한 희생과 헌신의 정신을 높이 샀다. 하지만, 정작 개개인이 처한 내면의 세계에는 무심하였다. 예컨대, 남편과 일찍 사별하여 과부가 된 여인에게 수절은 ‘법도’의 이름으로 강요되었다. 게다가, 재가 (再嫁)라도 하면 ‘그 자식은 벼슬 길에 나갈 수 없는’ 법이 있었으니, “누가 자식의 앞길을 막으려 하겠는가?” 열녀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옥죄었던 것은 아닐까..


사료를 보면, 조선 사회에서는 ‘내가 뭘 어떻게 하고 싶다’ 라거나 ‘내가 남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 등은 전혀 사회의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그 보다는,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느냐?’나,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만큼, ‘우리’ 속의 남의 이목이나 눈초리가 무서워 나의 행위가 개인으로서의 가치보다, '우리의 집단'이나 '가문의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이 아닐까?


이 때문에, ‘우리’라는 공동체는 자기 자신보다 상하 좌우의 '관계주의'에 따랐고, 동시에 나도 남만큼 '우리 속의 이웃'에 대해 왈가왈부하거나, 심지어, ‘남의 집 젓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기 원했다. 그 남들이 ‘우리' 속의 구성원들이었으니까, 내가 관심을 표명하고 간섭하는 것 역시, '우리'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이쯤 되면, ‘나’로서의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관계의 틀’ 속에 ‘나’를 속박하고 갇히게 만들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는 '주변을 의식하여 행동하는 것'을 '겸손'으로, 그리고 '예의'로 생각했다. 이를 보면, ‘눈치’는 권위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의 산물이었다. 왕조시대에는 각종 '사화'를 겪었고, 일본 식민지배, 군부독재까지 겪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없을 수 없었다. 자연스레, 우리 모두가 ‘우리’의 일원이 되고자 하였다.


'눈치' - ‘우리’ 공동체가 요구하는 삶의 지혜

‘우리’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의 일원이었다. 때문에, '감정의 은폐나 억제'로 '남에게 아예 폐를 끼치지 않겠다 (메이와쿠)'라는 일본인과 달리, ‘우리’의 한 부분인 '나'로 인해 '우리' 모두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일단 ‘간’을 본 다음 주변여건에 따라 적당히 대처하려는 마음가짐이 강하였다. 이같이 주변을 의식하는 독특한 문화가 ‘눈치문화’이다. ‘눈치를 보다’는 말은 우리만의 고유한 말이다. 영어사전에서도 굳이, ’Read one’s countenance’라고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그런 개념조차 없으니 거기에 맞는 표현은 사실 없는 듯하다. 눈치에 대해 이어녕 교수는 저서 ‘이것이 한국이다’ (pp42, 문학사상사)에서 아래처럼 정의한다.


이어녕의 '이것이 한국이다'

「프랑스의 일상을 지배하는 정신은 ‘봉 상스 (bon sens양식, 良識)’이고, 영국인은 ‘컴몬 센스 (Common Sense, 상식, 常識)’로 세상을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의 ‘눈치’는 프랑스의 ‘양식 (봉 상스)’이나 영국의 ‘상식’ 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이들 국가에서는 나의 행동이나 태도가 ‘양식이나 상식에 맞느냐? 어긋나느냐?’에 따라 판단되는 것과 달리, ‘눈치’는 상대방의 기분에 내 행동과 태도가 ‘맞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지극히 수동적이다. 그러니 ‘눈치’란 오히려 불합리할 때 그 빛을 발한다.   


많은 서구인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양식이나 상식에 어긋나면 양보와 타협을 하지 않는다. 회사에서는 사장도 일단 부하 직원의 말에 타당성이 있다고 믿으면 솔직히 그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누군가가 사장에게 '양식 (봉 상스)'나 '상식 (컴몬 센스)'을 가지고 따지려 들면, ‘말대꾸’를 한다거나 ‘버릇없이 덤벼든다’고 생각하고 혼쭐이 난다. 그러니 ‘이치’를 따지기 보다 ‘눈치’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개인의 인성과 의식 수준은 ‘얼마나 주변의 '눈치'를 잘 보느냐? 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끼리' 속의 '우리'는 남들이 알아주고, 우러러보는 일을 하길 원했다. 우리 모두가 출세하려 했고, 우리 부모도 ‘내 노라’하는 자식 자랑에 급급하였고, 자식은 “내 부친이 누구~”라며 부모를 파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설령, 내가 부족하더라도 우리 모두가 가족이니까... 


하지만, ‘중용지도 (中庸之道)’랄까? 원만하고 적당한 수준이 요구되어,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도 있고,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게 우리의 보신주의 사고방식이 되었다. 그러니, 너무 줏대 없이 남의 비위나 맞추는 ‘아첨꾼’은 애써 외면당하였고, 반대로 ‘미련한 곰탱이’나 남의 입장 따윈 모르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독불장군’ 같은 ‘눈치가 없는 인간’도 ‘우리’의 일원이 되지 못하고, 출세하기 힘들었다. 또, 누군가가 출세 지향적으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노력하여 높은 지위를 갖거나, 의지나 주관 없이 주변의 시류에 휩쓸려 ‘눈치껏’ 일희일비하는 인격도, ‘우리' 속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또한, 주변의 시선 때문에, 가족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자신의 취향이나 적성을 고려하여 인기 없는 학문이나 영역에서 평생을 바치려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혹시라도, 꿋꿋한 소신으로 살아가려면 집 안팎으로부터 ‘강하면 부러진다’고 유별나게 '우리' 내부로부터 고통을 받기도 하였다. '눈치'가 생존의 수단이 되었다. 사실, ‘눈치’에 익숙한 개인은,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라기보다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우리’라는 사회의 구성원의 한 부분으로서 각각 그 존재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우리’ 속에 있을 때 더 편안한 심리적 안정감마저 갖는다. 


이런 사회는 ‘내가 어떻게 하고 싶다’라기보다는,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 남들이 ‘우리’의 구성원들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이니까.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면, 조폭이나 갱단이 내세우는 '조직의 식구'라는 표현과 다를 바 없을 만큼 '나'의 존재는 사라져 버린다. 많은 아이들이 학폭이나 왕따에 쉽게 동화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크’와 ‘찌개’ 

필자가 해외 근무를 하는 동안 아이들이 미국계 초, 중, 고교를 다녀, 자연스레 미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둘째 아이는 대학마저 미국 대학으로 진학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때문에, 일부러라도 한국에서 고교를 마치고 유학 온 또래들과 어울리려 노력했고, 그리고, 친하게 된 몇, 몇 친구들과 함께 집(House sharing)을 빌려서 방은 따로 쓰되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였다. 


노크하기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친구가 아이의 방에 '노크도 없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는 친구의 무례함에 깜짝 놀라 잠시 당황하였는데, 그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술 더 떠서, 아이가 아끼는 물건들까지 허락도 없이 만지작거렸다. 사실, '노크'도 안 하고 불쑥 들어와서, 자기 것도 아닌 방안의 물건을 함부로 만진다? 이런 일은 미국 아이들 간에는 용납하기 어렵지만, 한국 아이들 사이에서는 예사로운 일이다. ‘우리’는 친구니까..., 친한 친구 간에는 ‘내 것, 네 것이 없다’는 강한 일체감을, 아이의 친구처럼 이를 ‘우정의 척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만약에, 한국에서 친한 친구사이에 노크를 요구하고, 물건을 만지는데 무슨 허락을 요구한다면 친구관계가 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친구들과 잘 지내고 싶어 하는 아이여서, 늘 친구를 위해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들을 대하였다. 하지만, 친구지간이라도, 어떤 경우든 노크를 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으로 인해, 아이에게는 한국 친구들과의 관계가 늘 조심스러웠고, 그러다 보니, '문화적 차이'를 극복해 가는 동안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큰 아이도 ‘유별나게’ 친구를 좋아하여 미국 아이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우리 방식이 통했던 것일까? 보통의 미국 아이와 달리 미국에서 살 때, 유년기 이웃 친구와 지금껏 교류하고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표현처럼, 친구는 ‘우리’의 한 부분이었고, ‘우리’라는 개념은 한국인에게 매우 강한 유대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이런 순수함으로 평생의 지기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갓과 갓 끈

그런데, 우리가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우리’라는 개념은 개별적인 ‘나’와 ‘너’의 합(合) 집합이다. 합집합은 ‘나’와 ‘너’ 사이를 묶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 연결고리를 ‘끈’이나 ‘줄’로 표현하였다. 그러고 보니, ‘줄을 잘 잡아야 끈 끊어진 갓 신세가 안 된다’는 표현이 새삼 와닿는다. ‘끈’이나 ‘줄’은 묶거나 매는 역할이다. 그래서 인연이나 우정을 맺고, 계약을 맺고, 지연, 혈연, 학연 등 ‘연(緣) 줄’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끈으로 매면, 두 개는 독립성을 상실하고, 서로를 속박한다. 상대방에게 그냥 ‘나’를 맡기고 ‘나’도 ’ 너’도 아닌 ‘우리’가 되니 ‘너와 내가 모든 것을 공유’하는 관계, 그야말로, ‘우리끼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못 끼이면 ‘왕따’가 되는 것이고… 


우리 마누라?? (출처: 우리 문화신문)

이처럼, '우리'는 친함의 상징이다 보니, ‘우리’라는 말은 누군가를 호칭할 때 가감 없이 전달된다. 학교에서 같은 반 친구끼리라면, “우리” 사이이니 선생님은 ‘우리 선생님’이고, 친구 간에 자기 아빠를 칭할 때도 ‘우리 아빠’다. 하물며, 어른들 간에도 친구라면, '우리 집', ‘우리 마누라’라는 표현조차 자연스럽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내 물건’, ‘네 물건’이 있을 수 없는 구조이다. 단수, 복수의 구분이 뚜렷한 영어와 달리, 두리뭉실한 '우리'는 공생을 지나 공유의 의미라고로도 전혀 이해가 되질 않는다. 


특히,  외부와의 교류가 제한되는 외진 지역일수록 “우리’라는 관계가 더 강한 의미가 있는 듯하다. 어느 전직 대통령이 모 검찰총장을 "우리 000"라고 칭하였듯이, 일부 남쪽 지방 사람들은 누군가와 “친숙함”을 자연스럽게 과시하려 할 때, '우리 아무개'라는 표현을 버릇처럼 사용하였다.  


모두가 함께 즐기는 찌개(출처: 중앙일보)

그렇다면, 이런 '우리'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누구는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들인 “00 찌개”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찌개는 먹을 게 풍족치 못한 시절, 작은 량의 고기나 생선이든 야채든, 된장이든, 김치든 무엇이든 큰 냄비에 물과 보글보글 끓여서 국물을 함께 떠먹는 음식인데, 농경문화의 유산이라지만 우리에게만 있는 독특한 음식 문화이다. 


예전에는 ‘우리’ 친척이나, 가족 모두가 이 찌개 주위에 둘러앉아 각자의 숟가락으로 퍼서 먹었다. 최근 들어, 여러 사람의 숟가락이 같은 음식 그릇에 들어가면 질겁을 하고 위생 관념이 어떠니 하면서, 별도의 '앞 접시'에 먹을 만큼 들어서 먹고 있지만…, ‘한 솥밥을 먹는 사이'라는 표현처럼 '함께' 퍼먹는 음식이야 말로 ‘우리’ 사이가 아니면 누구랑 같이 정을 나눌 수 있겠는가? ‘공유’의 개념은 ‘우리’가 되기 위한 본질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 역사에는 공과 사를 구분치 못하는 모습이 수없이 등장한다. ‘우리’라는 범주 내의 ‘이웃’과 유착의 ‘끼리끼리’ 인간관계는 지금껏 발생한 대형 부정부패 및 비리사고의 원인이었다.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모두가 아팠다. 사고조사 과정에서 공무원 사회의 병폐인 나누어 먹기, 봐주기, 돌려 막기 등 '관피아', '해피아' 등의 패거리 관계가 적나라하게 불거졌다. 힘 있는 관가 주변에는 이들처럼 ‘악어와 악어새’가 ‘우리’ 사이의 ‘의리’라는 명분으로 공존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들의 '우리' 앞에 '규정'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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