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시간, 모두 폐허여도 괜찮다!

by 최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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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였던 창 하나가 산산이 부서졌다.

처음엔 그저 아릿한 통증뿐이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자, 깨진 유리 틈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그 틈으로 나는 내가 보지 못했던 길을 마주했고,
그제야 숨이 트였다.

오래도록 내 마음은 망치질을 당해왔다.
숱한 나날 동안, 나는 내 안의 정을 대고
스스로를 내리쳐왔다.

그 고통이 내게 남긴 것은 상처가 아니라 틈이었다.
그 틈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아팠던 시간도, 어쩌면 숨통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바닥을 치는 순간,
비로소 바닥이 내게 말을 걸었다.

“이제 그만 쉬어도 된다”고.
그 말은 기도처럼 들렸다.

살다 보면, 살아온 뒤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를 파괴했던 경험은 어느새 시가 되었고,
눈물의 흔적은 노래가 되어 흐른다.

비가 내리고 또 내렸지만,
끝내 무지개의 지각으로,
우린 그 아팠던 날들의 아름다움을 뒤늦게 발견한다.


이제 마흔.
영영 나를 떠나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나이가 되어

나는 나의 영혼을 가둔 창문 앞에 선다.
그 창은 너무도 작아
나의 마음 한 뼘조차 비추지 못했지만,
그 속엔 입김 같은 인연과
한때 눈부셨던 풍경이 모두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것이 나이탓이 아니라,
나의 탓이었음을 이제야 안다.


내 시각으로만 세상을 재단하고,
내 언어로만 함부로 말하던 무지의 나날을.
나이란 그래서 드는 것이다.

그 속의 날갯짓과 실수, 청춘의 포류 속에서
비로소 나를 만나는 시간.

이제 오래된 무늬의 의자에 앉아
텅 빈 그늘이 되어보려 한다.

성장에 몰두하지 않고,
누군가를 붙잡지 않으며,
외로움을 핑계 삼아
그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리.


작은 창에도 머물다 떠나는 하늘처럼,
거미줄처럼 얽힌 인연에도
미련 없이 손을 놓으리.

먹구름 낀 얼굴조차 사랑하리.

부디 혁명 같은 사랑을 꿈꾸는 어리석은 이로 살지 않으리.


대신, 내게 머물렀던 이들에게
따뜻한 옷 한 벌을 내어주고,
차 한잔의 언어로 체온 같은 말을 건네리.


별 없는 밤이라도 괜찮다.
그 평온함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러니 이제, 그대여—
내게서 나를 찾지 말고
당신의 계절을 그리며
천천히 살아가 주오.


사랑해야만 살 것 같던 날들은
이제 나를 조금 더 지혜롭게 만들었다.

내가 만든 노랫말과 음표들은
허공을 떠도는 새처럼,
울음인지 노래인지 모를 지저귐으로
공허를 채운다.


기울어진 언덕에 선 노인은
묵직한 손으로 오늘의 폐지를 실어 나르며,
저 노을 속으로 춤추듯 걸어간다.

그 모습에 나는 배운다—

오늘 초록이었던 것이 금세 빛을 잃어도 괜찮다는 것.
햇살이 따뜻한 살내음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내가 사랑했던 그 시간,
그 체온과 목소리,
그 모든 풍경이 여전히 내 마음에 살아 있으니,

아직 사랑 때문에 아파해도 괜찮다.

이제 나는 선언한다.


사랑했던 시간, 모두 폐허여도 괜찮다.

그 폐허 위에, 나는 나를 다시 세우리.
그리고 그 자리에, 바람이 지나가도 빛이 머물 수 있도록 창을 남겨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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