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음식을 경상도에서만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왜 경상도에서만 먹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 다른 지역사람들은 늙은 호박으로 호박죽만 끓여 먹는단 말인가? 우리는 늙은 호박이 생기면 두 개의 선택지가 생긴다. 죽을 끓여 먹든지, 호박전을 해 먹든지, 호박이 크다면 둘 다 해 먹든지... 나는 개인적으로 호박죽보다는 호박찌짐을 더 좋아한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쫀득하고 단짠단짠의 늙은 호박전
집에서는 "호박 찌짐"이라고 불렀다. 2~3개월 전만 해도 아기 호박이었을 호박에게 '늙은'을 같다 붙이는 건 좀 매정하다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호박전이라고 하면 동그란 초록의 애호박 전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늙은'을 붙여줘야 오해가 없을 것 같다. 늦가을이 되면 늙은 호박이 많이 나타난다. 이 호박은 나타난다는 의미가 맞는 것 같다. 어디에선가 모르게 나타나서 호박주제에 거실 소파옆을 차지하고 있다. 집에 늙은호박이 나타나 있고, 날씨가 싸늘해질 쯤이면 호박 찌짐을 먹을 수 있다. 겨울방학에 이불속에서 뒹굴거리며 놀고 있으면 엄마가 해주시는 그 호박찌짐이 가장 맛있다. 식당 같은데 가도 가끔 나오기는 하지만 역시 집에서 해 먹는 호박찌짐이 최고다.
호박찌짐을 쉽게 만들 수 있다. 반죽만 잘되어 있으면 금방 부쳐 먹으면 된다. 늙은 호박을 반을 쪼개고 씨를 긁어낸다. 나는 채칼에도 갈아보고 칼로도 썰어봤지만 왠지 모르게 늙은 호박을 긁어내는 필러같은것으로 긁어낸 게 제일 맛있는 것 같다. 호박은 채 썬다는 말을 하지 않고 긁어낸다는 표현을 썼다. 우리 집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호박이 어느 정도 긁어졌으면 거기에서 소금과 설탕을 적당히 넣고 부침가루를 넣는다. 엄마가 물은 절대 넣으면 안 된다고 했다. 소금과 설탕, 부침가루을 넣으면 자체적으로 물이 생겨서 반죽이 된다. 그 반죽을 넓은 전을 부치듯이 부치면 끝이다. 약간의 설탕이 들어갔기 때문에 겉은 카라멜라이징화 되어 약간의 갈색으로 되며, 부침가루와 설탕의 조화로 바삭한 겉이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속은 촉촉하다 못해 쫀득한 식감의 호박지짐이 완성되는 것이다. 크게 찢어서 한입에 넣으면 바삭한 식감과 쫀득한 식감이 어우러지고 단짠 단짠의 향연을 느낄 수 있다. 호박의 향과 단맛도 함께 육즙처럼 나오면서 온 입 가득 온기 가득한 향기로운 맛이 퍼진다. 호박 찌짐을 만드는 과정에서 호박을 긁어내는 과정이 제일 어렵고 힘든 과정인데, 한입 먹는 순간 가득 긁어놓은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긁어내는 것이 제일 어렵기 때문에 경상도 시작에 가면 할머니들이 가득 긁어놓은 호박을 팔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볼 때마다 저 많은 것을 어떻게 긁으셨을까? 할머니들의 부지런한 수고에 감탄할 뿐이다.
겉바속쫀의 이 마성의 요리를 즐겨 먹는 경상도 사람들은 음식처럼 겉은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은 사람들이 된다. 노란 호박 찌짐은 겉으로 봤을 때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막상 먹어보면 감동을 느낄 만큼 맛있는 음식이다. 고심 끝에 준비한 선물을 건네주며 "오다 주읏다."라는 말은 "너를 위해 준비했어."라는 말보다 무뚝뚝해 보일지는 몰라도 상대방을 전혀 기대하지 않게 만들면서, 감동을 주는 동시에 별거 아니라는 듯, 자신이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앞으로 오다 주은 것보다 더 정성스러운 선물을 하겠다는 예고까지 담겨 있는 깊은 뜻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먹는 음식을 복제하며 음식과 비슷한 사람이 되어간다.
난 호박찌짐을 좋아해서 늙은 호박을 보면 괜히 욕심이 나지만 내가 만드는 것보다 엄마가 만들어주는 게 희한하게 더 맛있다. 아마 부모님의 둥지 밑에서 편하게 살던 시절에 먹었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추워지는 계절에 따뜻한 방에 배를 깔고 이불을 덮고 누워 만화책을 읽으면서 보내는 나른한 오후에 엄마가 간식으로 만들어 주시는 그 호박찌짐이 너무 그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1차시도: 호박찌짐은 굽는 게 어렵다. 오랜만에 구우니 감이 안 잡힌다. 불조절도 못하고 뒤집다가 자기들끼리 붙어서 떡이 되어버렸다.
2차시도. 이제 약간 감이 잡힌다. 호박찌짐은 갈색 부분이 맛있다. 바삭하고 달달한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