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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파이 Oct 14. 2024

회색 바지

그들만의 세상

2학기 1회 고사 기간이었다. 시험기간에 시험 감독을 들어간다. 시험감독의 일은 50분 동안 시험감독을 하는 것이 일이다. 공상을 좋아하는 나는 50분이라는 지루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만약 20억 로또에 당첨되면 뭘 하지?', '내가 브런치 작가로 유명해지면 어떡하지?'와 같은 허무맹랑하지만 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이루어 질지도 모르는 상상을 한다. 공상할 것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공상과 망상을 오고 가며 시간을 때우다가 그것도 지겨워지면 여러 가지 관찰할 것을 찾아서 교실 구석구석을 헤맨다. '이 반의 시계는 이렇게 생겼네.', '담임선생님 글자체가 이쁘군.', '화분에 물 좀 줘야 되겠어.', '애들 가방에 키링이 이쁘네.', '애들은 왜 검은색 가방이 많지? 아... 어른들도 검은색 가방이 많지.' 그렇게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학생들의 머리숱이라던지 신고 있는 신발까지 관찰을 하게 된다. 다들 시험을 열심히 친다고 내가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것을 모르겠지만...

  그날은 시험기간이라 학생들이 옷을 자유롭게 입고 다녔다. 아침에 복장 지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많은 아이들이 교복을 잘 입고 온다. 교실 뒤쪽에 서서(부감독은 교실 뒤쪽에 서 있다.) 교복을 안 입은 학생들의 수를 세었다. 일단 바지부터... 그런데 규칙이 있다. 교복을 잘 입고 온 아이들 사이로 회색 트레이닝복 바지가 보인다. 회색트레이닝바지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나머지는 교복바지를 잘 입고 있었다. 우리 학교는 여학생도 교복 치마가 없기 때문에 교복 바지를 입고 있어서 교복바지들 사이로 보이는 회색 바지가 눈에 띈다. 교실 뒤에서 나는 대단한 발견을 했다. 하마터면 '유레카'라고 소리 지르며 복도를 뛰어다닐 뻔했다. 교복이 아니면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어야 하나? 디자인은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같은 재질의 디자인도 비슷해 보이는 바지다. 하늘아래 같은 회색이 없다고 하지만 내 눈에 똑같은 색깔이다. 


  그 순간 나는 회색 트레이닝 바지에 내가 모르는 암호 같은 것이 있나?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모르는 그들만이 사는 세상이 있다던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회색 트레이닝 바지가 유행이 되었다던지... 그런 재질의 회색 바지가 없는 나는 소외감 마저 느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샘이 이 바지가 없다고요?!"라고 화들짝 놀란다거나, 회색바지 비밀결사대 같은 것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 요건에 내가 자격 미달이라던지... 그럴리는 없다며 고개를 저으며,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1. 마음씨 좋은 재력가가 공부 열심히 하는 우리 학교 학생들을 위해 랜덤으로 몇 명의 학생에게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선물했다. 

2.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누군가가 회색바지를 입고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회색바지가 유행이 되었다. 

3. 학생들 여러 명이 함께 쇼핑을 하며 같은 바지를 샀다. 

4. 회색바지를 입으면 시험을 잘 친다는 징크스나 미신이 학생들 사이에서 돌았다. 

5.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회색바지가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호르몬이 나온다.


회색바지의 미스터리에서 겨우 빠져나왔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4개의 회색 후드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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