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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손에 손 자고..

by 최점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며칠 전 충격적인 뉴스를 접하고 참담했다. 세계 경제 10위권에 들어가는 한국에서 한 가족이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다. ‘송파 세 모녀’의 일도 잊지 못했는데 올여름 ‘봉천동 모자’ 사건도 일어났다. 이럴 때 보면 친척, 지인, 이웃 간에도 서로 오가는 소통이나 왕래가 없었다는 뜻이 아닐까. 나도 어린 자식이 고열로 생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도움의 손길이 간절했던 시절이 있었다.


서울에서 문간방 하나를 얻어 네 식구가 살았다. 남편은 강원도로 출장을 갔다. 딸은 네 살이고, 아들이 6개월 될 무렵, 밤새도록 원인 모를 고열로 경기를 일으켜서 목숨이 왔다 갔다 했다. 그 순간 오직 자식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마포대로 맞은편에 있는 병원을 향해 뛰어가는 중 차들의 경적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응급실에서 의사 선생님이 아기의 옷을 벗기고 몸에 알코올을 발라 겨우 열을 떨어뜨렸다. 몇 가지 검사를 한 후 가성콜레라에 걸려 백혈구 수치가 높다고 했다. 남편에게 빨리 오라고 삐삐를 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때 집에서 혼자 울고 있을 딸을 돌봐준 이웃들이 있었다. 살다 보면 땅이 꺼지는 일이 생겨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이었다. 언덕 밑에 사는 사십 대 아저씨가 출근길에 미끄러져서 응급실로 후송되었다. 갈비뼈가 몇 대 부러져서 두 달 동안 입원을 하게 되었다. 아빠 엄마가 병원에 있는 동안 아기 세 명이 굶주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웃 주민들이 내 일처럼 솔선수범해서 당번을 정했다. 한 엄마는 도시락을 싸주고, 다른 엄마는 등교를 시켜주고, 밀린 빨래도 해주었다. 또한 생계비 걱정에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출해서 전달하였다. 입원 중인 남편의 간호를 하던 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무척 고마워했다. 먼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더 낫다고 한다. 요즘처럼 자주 가슴 아픈 사회의 이슈를 접하면 그 시절이 자꾸만 생각난다.


잠자고 일어나면 세상은 변하고 있다. 아직도 그 시절의 정을 잊지 못해 과거로 돌아가는 듯했다. 우리 동네로 이사 오는 사람이 있으면 반가운 마음에 먼저 찾아가서 친해지려고 인사를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내 마음과는 반대였다. 그런데도 두루마리 휴지나, 세제를 사 들고 대문을 두드리면, 외판원이나, 보험아줌마로 오인당할 때가 많아 기분이 씁쓸했다. 또한 동네일로 전달 사항이 생겨도 인터폰을 통해 전하거나 쪽지에 적어 대문에 붙여놓아야 했다. 정든 사람들이 직장을 옮겨가면서 떠나간 후 나만의 아린 그리움이 되었다. 우리 집은 한 동네에서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고 오래 살았으니 딸과 아들이 유치원부터 초, 중, 고등학교를 그대로 올라갔다.

김장철에 엄마들이 손을 모았다. 동네 잔칫날처럼 돼지고기를 삶아서 김칫소와 맛있게 먹었다.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아이들도 그 집으로 몰려와 허기진 배를 채웠다. 마당에 김칫독을 묻을 구덩이를 파서 동치미, 배추김치, 총각김치 등을 땅속에 저장을 해 놓는다. 겨우내 김치전이나 김치찌개와 국을 끓여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묵은지는 봄에 고등어조림이나, 볶음밥, 도시락 반찬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노동하는 일은 일거리가 없는 날이 더 많아 하루 벌어서 열흘을 먹으려고 아끼고 또 아껴야만 살 수 있었다. 어쩌다가 가장이 실직하여 가족들이 손가락만 빨게 생겨도, 회사에서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아도 생활비와 학용품값을 걱정하지 않았다. 옆집, 뒷집으로 달려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면 서로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고 흔쾌히 빌려주었다.


엄마들끼리 끈끈한 정을 쌓은 덕분에 남편들도 자연스럽게 어울려 술을 마시고, 아이들은 또래들과 구슬치기와 딱지치기를 하며 사이좋게 놀았다. 새벽 동틀 무렵에 엄마들은 용산 농수산물시장에 가서 마늘 한 자루씩 받아 왔다. 하룻밤을 자루째로 물에 불려 껍질을 까서 머리에 이고 가면 상인들이 저울로 달아보고 품삯을 쳐주었다. 그래서인지 대다수 사람은 검소하게 사는 습관이 몸과 마음에 배었다. 아이들도 명품 옷이나 운동화를 사달라고 졸랐던 적이 없다. 가진 것이 없어도 이웃들과 사랑을 나누다 보니 살아볼 만한 세상이었다.


그랬던 날들을 뒤로하고 우리의 현실은 하루가 다르게 개인주의로 변해갔다. 컴퓨터 인터넷 정보화시대로 전환하면서 사람들의 인식변화가 더 빨라졌다. 핸드폰 하나면 지구촌 구석구석 소식을 알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다. 어제도 오늘도 옆집으로 누가 이사를 오고 가는지 모른다. 한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살아서 출, 퇴근길에 눈이 마주쳐도 인사는 고사하고 먼저 고개기가 일수였다. 도시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이웃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일대일로 보면 하나같이 착한데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나도 이런 분위기에 적응이 되었는지 사람을 만나도 반갑게 다가가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요즘처럼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절실한 때가 있을까. 코로나 시국에 높은 실업률로 장애인, 쪽방촌 어르신들, 청년세대, 자영업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에서 체계적으로 관리를 한다고 하지만 한정된 공무원들만으로는 역부족인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다시는 굶주림 때문에 생을 달리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너도나도 그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나눈다면 메아리가 되어 멀리멀리 퍼져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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