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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점순 Aug 31. 2022

그대가 친 사랑의 덫

 


   그대가 친 사랑의 덫 



   내가 스무 살 갓 넘었을 무렵, 친척으로부터 중매가 들왔다. 신랑감이 좋다는 말에 솔깃해서 다방으로 나갔다. 친척 언니가 손에 쥐여준 쪽지에 인상착의가 적혀 있었다. 나는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찻집을 한 바퀴 둘러보니 비슷한 사람도 없었다. 혹시 바람을 맞은 것일까. 조바심이 나서 손목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넘었다. 속에서 바글거리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흙 묻은 운동화를 신고 더벅머리 총각이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은 연탄아궁이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하고 옷차림새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남방은 구깃구깃했다. 칡넝쿨로 얼기설기 덧대어 기운 바지를 보니 넝마주이 같았다. 그는 내 옆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싱긋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속았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는데, 그 순간 바리톤의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여기 앉아요.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 한마디에 얼어붙듯 주저앉았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런 무례한 사람을 보았나.’ 침묵으로 일관하고 싶어도 소개해 준 언니의 체면을 생각해서 꾹 참았다. 하지만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머리를 요리조리 굴렸다. 그는 상대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듯 말을 했다. 마치 언변의 달인처럼 호소력이 깔린 설득력으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이왕 나왔으니 차 한 잔 정도는 마시고 나오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마음을 돌렸다. 서로 통성명을 하다가 별안간 그는 천애 고아로 자랐고 친척 집에 얹혀산다는 말을 태연스럽게 했다. 그런 말에 흔들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는데 무엇에 홀렸는지 자꾸만 빠져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비밀스러운 데이트로 이어졌다. 찻집에서 나온 후 철로 위를 장난치며 나란히 걸었다. 그는 이상하게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결혼에 대한 조건도 따져보지 않고 사랑의 덫에 걸렸다.


  혼자 산책하며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 시간이 떠오르면 소녀같이 가슴이 뛴다.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 너무 신비스럽고 생각이 많아진다. 철없이 사랑 하나면 만사가 다 잘 될 줄 알았는데 인생을 살다 보니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마음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몇 개월 동안 만나면서 황홀한 꿈을 꾸었다. 한 편의 드라마 주인공처럼 우리는 산으로 들로 신나게 뛰어다녔다. 찻값을 아끼려고 철길에서 만났고, 비싼 밥과 영화 구경은 꿈도 꾸지 못했다. 진담처럼 농담해도 곧이곧대로 들렸다. 만날수록 이상하기는 해도 무슨 의도로 이런 연극을 하는지 묻지도 따지도 않았다. 다만 여성의 모성본능이 발동하는지 가련한 고아 청년을 내가 구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측은지심에 약한 나를 알아보고 그런 행동을 연출한 것일까. 둘이 데이트하는 날은 라면과 떡볶이를 각각 일 인분씩만 시켜서 나누어 먹었다. 그는 가끔 맛있는 불고기를 사주지 못해서 늘 미안하다고 말할 적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다독여 주곤 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와 사귄 지 6개월이 지났다. 친척 집에 얹혀살아도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나한테 참신한 옷차림으로 나오라고 당부했다. 천애 고아라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해도 너무 순진하게도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그날은 평소와는 달리 깔끔하게 차려입고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상하게도 말과 행동이 의젓하고 딴사람처럼 보였다. 6월 중순이었다. 담장에 붉고 흰 접시꽃이 흐드러진 큰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궁궐 같은 기와집 몇 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먼저 사랑방 문 앞에서 허리를 굽히고 어른들에게 방문 인사를 드렸다.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니 가족들이 모였다. 어림잡아 어른들과 아이들을 합치면 20명쯤 되어 보였다. 낯선 환경에 모든 눈이 나에게 쏠려져서 진땀이 흘렀다. 나는 불쌍한 청년을 구해주려고 사귀었는데,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운명이었을까. 돌아보면 아직도 그때의 상황은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다. 결혼해서 살면서 서로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갈등을 겪곤 했다. 정말 나는 그가 쳐놓은 사랑의 덫에 걸려들었을까. 몇 달 후 시부모의 결혼 승낙을 받아왔다. 어머니가 성당 혼인(관면혼배)할 날짜를 잡아주고 대부모도 정해주셨다. 나는 불교 신자이고 그는 천주교 신자였다. 얼떨결에 신부님 앞에서 반지를 교환하고 남편과 아내가 되는 결혼 서약을 했다. 신혼생활은 입대로 반납을 하고, 상상했던 장밋빛 인생은 한바탕 꿈으로 깨졌다. 우리를 기다리는 수많은 시련과 대가족 시집살이는 벼랑을 타는 심정으로 견뎌야 하는 상황으로 밀려갔다. 남편은 사람을 좋아하고 돈을 물 쓰듯이 썼다. 집에 쌀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도를 넘는 사람이었다. 미래에 끝도 없는 지난한 삶을 예고하는 단면을 보여주는 것을 짐작도 못 했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내가 발버둥 칠수록 더 옥죄어 왔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가까운 사람들이 나의 팔자타령을 입에 올리곤 했다. 미래가 총망하던 청년이 폐인이 된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심장을 송곳으로 꿰 찔리듯 아팠다. 내 목에 주홍 글씨처럼 따라다니는 멍에를 벗으려고 발버둥을 칠수록 더 옥죄어왔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스스로 나를 믿고 먼 길을 걸어가기 위해 운동화 끈을 단단히 고쳐 메고 묵묵히 걷다가 넘어지면, 다시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걸어야만 했다. 


이제 함께 걸어온 날들 앞에서 뒤돌아본다. 그대가 친 사랑의 덫은 나의 인생에, 여보가 된 당신의 인생에 ‘로또’맞게 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의 남은 날들은 장성한 자식들을 바라보며 좋은 벗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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