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들어 본 할아버지 음성의 전화를 받았다. 초등학교 동창회장이라 했다. 고향을 떠나온 지 오십 년이 되었다. 어릴 적 헤어진 후 연락이 끊겨 얼굴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결혼 후 서울에서 살았다. 남자들은 결혼을 해도 고향 친구를 한 번씩 만나지만, 여자들은 결혼하면 남편을 따라다니다 인연의 고리를 놓고 말게 된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내게 동창이라고 하니 기분이 묘했다. 소식을 모를 때는 몰랐지만 만나게 된다니 꿈길이 펼쳐졌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졸업식 날, 후배들이 불러 주던 노래가 가슴에 꽂혔다. 그런 기억을 쥐고 손꼽아 기다리는 내내 설렘이 나를 휘감았다. 서울역 광장을 서성이며 상상의 나래를 피워냈다. 무궁화호를 타고 경주로 수학여행 갔던 시절이 떠올랐다. 카톡에는 저만치 푸른 유년의 흑백 사진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무궁화호가 도착하였다. 개찰구로 나와 기차를 탔다. 모두가 고향 친구처럼 보였다. 그 시절처럼 ‘오징어 땅콩’ 한 봉지를 뜯었다. 창가의 들판을 휙휙 마라톤 선수처럼 뒤로 밀어내며 달렸다.
가물거렸다. 전화기 문자메시지에는 보고 싶다는 말이 오갔다. 50년 만의 동창회 모임이었다. 이름이나 얼굴이 생각나는 친구는 한두 명뿐이었다. 기차표를 한 달 전에 예매해 놓았다는 친구의 마음이 내 마음이었다. 팔도에서 친구들이 기차와 버스를 타고 달려오는 오후였다. 세월의 벽을 허무는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3년 전 학생이 없어 모교가 폐교되었다고 했다. 운동회 때 발목을 묶고 하나 둘, 뛰었던 짝이 나타났다. 그날의 응원가가 울려 퍼졌다.
외로움이 밀려올 때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꿈속에서 유년의 눈길을 뽀드득뽀드득 걷곤 한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우리반의 대부분 남자아이들은 진학을 하고 여자아이들은 방직공장으로 가게 되었다. 헤어짐의 섭섭함을 달래기 위해 반 아이들이 모였다. 몇 명은 팥죽, 또 몇 명은 고구마를 삶아 왔다. 나는 아버지가 가을에 묻어 둔 무 서리를 하기로 했다.
텃밭에 저장고가 있었다. 돔 형태의 움집이 수십 개였다. 깊이가 어른 키 두 배의 정도다. 눈·비 들어가지 못하게 볏짚을 깔고 지붕을 덧씌웠다. 무·배추는 겨울 반찬거리였다. 동지섣달 긴긴밤에 친구들과 놀다가 하나씩 훔쳐 와서 깎아 먹었다. 그날은 폭설이 내려서 온 세상이 대낮같이 밝았다. 혼자 서리하러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랑 같이 갈 사람, 손들어 봐.”
또래보다 큰 아이가 자청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그와 눈길을 걷다가 획 돌아섰다. “너, 꼭, 판검사 되어야 해.” 내 말에 킬킬거리며 “운동선수 될 거야.”라고 하였다. 어느새 텃밭에 도착했다. 힘 좋은 그가 구덩이 마개를 쑥 잡아당겼다. 벌렁 넘어졌다. 함박꽃처럼 웃는 그를 보면서 내 입을 꽉 막았다. 순간 풍선처럼 부푼 마음이 둥둥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했다. 무가 손끝에 잡히지 않았다. 가자미처럼 엎드려 조금 더, 더 하다가 곤두박질쳤다. 쿵, 자지러지는 비명이 깜깜한 구덩이 안을 메웠다. 그가 말을 하였다. “야, 빨리 내 손 잡아” 팔을 뻗어주어도 손끝이 닫지 않았다. 그때 또 한 차례 흙이 폭삭 무너졌다. 그도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시간이 정지된 공간에 찬란한 달빛이 비치었다.
우리는 정신을 잃었다. 허우적거렸고, 머리통이 끈적거렸다. 그가 머리를 다쳤다. 두려움이 몰려왔다. 온몸이 번데기처럼 오그라들었다. 소리치고 싶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싸늘한 흙구덩이에서 웃옷을 벗어 내 어깨를 덮어 주었다. “너도 춥잖아.” “하나도 안 춥다.” 그는 말과는 달리 떨고 있었다. 한밤중에 구해 줄 사람이 없었다. “너라도 살아야지.” 어깨를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밟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른들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혼날 것 같았다. 번뜩 생각이 났다. 굵은 밧줄이었다. 외양간으로 갔다. 누렁이 목의 줄을 잡는 순간, ‘땡그랑’ 소리가 났다. 얼른 방울을 쥐고 밧줄을 풀었다. 허겁지겁 뛰었다. 멍에 풀린 소가 따라오는 줄도 몰랐다. 구덩이로 힘껏 던졌다. 이제 끌어올려야 하는데 힘이 달려 두리번거렸다. 누렁이가 옆에서 싱긋 웃으며 달빛을 받고 서 있었다. 마치 나를 보고 줄을 걸라는 듯이 자신의 목을 들이밀었다. “이랴” 고삐를 당겼다. 그는 낚싯밥을 문 물고기처럼 조금씩 당겨 올라왔다. 처음 느껴보는 설렘에 어린 새가슴이 콩닥거렸다.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눈길 위에 뽀드득뽀드득,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어느새 나를 바래다주고 뒤돌아갔다.
다음 날 학교에서 만났다. 서로 눈으로만 말했다. 얼마 후 졸업하고 그는 진학을 해 대처로 떠났다. 몇 년이 흘렀다. 소식이 끊겼다가 수소문 끝에 주소를 알았다. 안부 편지가 몇 번씩 오간 후 다시 소식이 끊겼다. 그는 학구열이 높았다. 우주항공 연구원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친구가 꿈을 향해 높이 오를수록 멀어졌다. 20년 후 대전 연구소에 근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엇갈린 운명을 뒤로하고 세월이 흘렀다.
고향 가는 기차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내 마음보다 느렸다. 그 친구를 다시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까? 모든 촉수를 동원해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기차가 도착했다. 홈으로 나왔다. 친구들의 승용차가 역에 줄이어졌다. 은발의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었다. 코를 찔찔 흘리던 개구쟁이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반가운 해후를 했지만 실감 나지 않았다. “반갑다, 친구들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잔칫상이 차려졌다. 효선 16기가 다 모였다. 75명 졸업생 중에 45명이 참석했다. 모두 재벌 회장님처럼 의젓했다. 얼굴에는 세월의 결이 새겨졌지만 단풍잎처럼 곱게 물들었다. 나는 두리번거렸다. 그가 보이지 않았다. 옆 친구에게 물었다.
“왜, 공부 잘하던 걔 있잖아. 음….”
“그 친구는 연구원이었는데, 최근에 쓰려져서 그만….”
그날의 방울 소리가 땡그랑, 내 가슴에 울려 퍼졌다. 마시던 막걸리가 입가에 베어져 나왔다. 냉기가 몰아쳤다. 그와는 이별을 했어도 그는 내 가슴속 구덩이에 있었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복자야, 잘 살지.’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아직도 구덩이 속 밧줄을 끌어당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