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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종여일 Mar 11. 2025

고통 해소의 해법

지금에 충실하자는 이면의 그림자

 

 경기침체의 수렁에 빠진 한국 사회 곳곳에 신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특히 2024년에 삶을 비관해 하루 40명, 1년에 1만 4천여 명의 한국인이 생에 마침표를 스스로 찍었다고 한다.  그들이 비극적인 선택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겨운 나날이 있었을지 그리고 그런 삶을 보듬어주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숫자가 말해주듯 한국의 현실은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뉴스기사들이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고통이란 것이 비단 그들의 전유물이겠는가?


 고통은 누구에게도 비껴갈 수 없는 삶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아이가 태어나는 과정부터 커가는 과정이 고통 연대기라 명명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산을 대개는 산모의 고통 측면에서 얘기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고난의 시작이다. 산도의 압박과 그 압박을 견디며 저산소증을 이겨내고 세상의 빛을 보게 되기까지 아이는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극복해야만 안락한 인큐베이터에 몸을 내맡길 수 있다. 출산 때 건강하기만을 바라던 아이가 자라서 학령기에 접어들면 건강은 한쪽으로 미뤄둔 채 입시와 학업 스트레스가 끈질기게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을 타고 아이를 졸졸 따라다닌다. 어디 이뿐인가? 학업이 끝나면 또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한 취업스트레스가 일명 취준생을 맞을 준비를 하며 단단히 벼르고  있다. 그러면 낙타 구멍보다 좁다는 취업의 벽을 넘어 번듯한 직장을 가지면 고통에서 해방일까?


 단연코, 아니다.


 가정을 꾸리는 순간 그 기대는 결혼과 육아로 무참히 산산조각 난다. (뭐? 가정이 그렇다고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결혼을 권장한다. 꼭 힘주어 아내에게 이 마음을 전하고 싶다. )


 육출, 육퇴라는 용어의 흔한 사용은 직장을 다닌다는 명분으로  더 이상 육아에서 배제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서들이다. 따라서 가장의 책임감과 더불어 자상하고 능력 있는 가사와 양육 능력은 현시대의 아빠의 필수 덕목이 된 지 오래이다.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뒤쳐지면 따뜻한 비데만이 남편들의 시름을 덜어줄 안식을 따끈하게 잠시라도 제공할 뿐이다. 화장실과 바캉스를 줄여 화캉스라 불릴 만큼 화장실에 들어간 남편들이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나오질 않아서 생겨난 말이 의미하는 남편들의 초라한 처지가 불쌍하다.


은퇴 이후는 그럼 또 어떤가?


 아이도 다 키우고 직장 다니던 때 월급만큼은 아니어도 소소한 연금과 노후자금을 가지고 소박한 일상이 주는 행복한 노후를 누구나 꿈꾼다. 여유가 많아진 일상에서 평소 하고 싶던 등산을 위해 등산장비를 챙겨 산에 오른다. 선망하던 명산에 올라 최정상의 표지석을 잡고 자존감을 한껏 올려본다. (중년의 남자들은 카카오톡 프사가 하나같이 비슷하다. 등산 표지석과 함께 엄지 척을 하고 있다. 함께 약속이나 한 듯)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산에 오르지 않고 하루라도 집에서 쉬는 날이면 옆에 있던 내 인생의 반려자는 ‘삼식이’라는 예쁜 이름표를 내 가슴에 달아준다. 집에서 밥 얻어먹기도 힘든 한 인간으로서의 고난의 행군은 이렇듯 끊임없이 계속 이어진다. 인생을 이런 측면에서만 본다면 ‘헬조선’이란 용어가 전혀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어쩌면 내가 편히 쉴 곳은 관짝 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이렇듯 정말 산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을 끌어안고 힘겹게 굴러간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고통에 주목하며 해소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고 시도해 왔던 것은 인간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고통의 속성 때문일지 모른다.


 고통이란 단순히 신체적인 아픔을 넘어서, 우리 몸과 마음이 어떤 위협이나 불편함을 감지할 때 나타나는 깊고 복합적인 경험이다. 이런 경험은 내외부적 요인에 따라 발생된다. 고통이 자신으로 인해 발생되는 내부적 문제라면 본인의 결심이 중요할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아닌 사회현실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그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투쟁할 수도 있다. 다만, 외부 환경의 변혁이 녹록지 않은 현실이라면 변화를 위해 힘쓰기보다 내면 변화를 꾀하는 것이 더 쉬운 선택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사회현실에 냉소나 무관심을 피력할 수도 있다. 즉, 사회에 대한 관심은 뒤로 한채 나에게 오로지 이기적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사회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의 다른 변주는 처해진 삶의 현실을 운명론, 숙명론으로 체념한 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서양사상에서 숙명론으로 유명한 사상 중에 스토아학파가 대표적이다. 운명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운명을 거스르는 저항심과 같은 감정이 일어날 때는 그것을 끊어내라고 한다. 변하지 않을 운명에 감정을 소모하는 행위 자체가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고통을 만든다고 보는 것이다.


 한편 불교에서는 그러한 운명론, 숙명론의 인과적 관계에 주목한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날 수 없듯 인과 관계를 인식하여 자신의 고통이 유발되는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수행을 강조한다. 고통의 씨앗이 되는 근원으로서 생각이 밝지 않아 빚어지는 탐욕과 번뇌를 끊어내는 이른바, 해탈을 불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다른 한편, 운명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내면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한 움직임도 예나 지금이나 있어왔다. 과거 에피쿠로스 학파가 그러했고, 요즘 자주 볼 수 있는  ‘Carpe Diem’, ‘here and now’, ‘YOLO’ 등의 구호가 그러하다. 현재의 자신에게 집중하며 소중하고 확실한 행복은 자신의 소박한 장면들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 행복을 포착하는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행복 감수성의 포착능력은 며칠간 염분이 적은 음식을 먹다가 작은 염분이 몸에 들어오면 맛있다는 느낌을 느끼듯, 우리에게 소박한 생활을 전제로 삶의 욕구를 최대한 억제할 것을 강조한다.


앞서 말한 다양한 고통에 대한 해법 중에 요즘 크게 대세를 이루는 것이 ‘현재의 삶에 집중하라’는 주장이다.


사회적 양극화가 심한 오늘, 빠르게 이 논리가 사회에 받아들여지게 된 이유는 사회에 대한 암울한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사회변화는 어렵고 변화가 되더라도 그 혜택은 빈자인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 타인과 연대를 통한 사회변화를 꾀하기보다 내 안락의 밥그릇을 챙기기에 분주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기반 위에서 안분지족의 논리는 우리 사회에 빠르게 흡수되고 통용되어 뿌리내렸다. 여하튼 자기 삶에 초점이 맞춰진 ‘힐링’, ‘소확행’, ‘욜로족’ 등의 용어를 요즈음 심심찮게 듣고 보게 된다. 사실 ‘현재의 삶에 집중하라’는 주장은 물질적 기준이 행복의 중요한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빈자만이 아닌 사회 계층을 가리지 않고 각계각층의 다양한 고민을 처리하는 쓰레기통의 값싼 비닐봉지가 되었다.


 가진 자들은 자신이 쌓은 부가 도덕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을 부각하고 싶어 한다. 경제적 지위뿐 아니라 도덕적 지위의 탄탄함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그래서 물질적 풍족함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부자임에도 물질에 기댈 수 없는 빈자의 문화를 차용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아주 청빈하다는 인식을 사회적으로 각인시키고자 한다. 가령, 부자들이 털털하고 검소한 라이프 스타일을 내보이면 대중들은 부자에 대한 적대감과 질시를 조금은 거둬들인다. 일종의 이미지 세탁은 부자들의 영향력 있는 대외활동을 더욱 지원하게 되는 촉매가 된다. 청빈과 소박함이 부자에게는 기업과 회사의 좋은 이미지 구축을 통한 마케팅 수단이 되는 것이다.(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겨울철만 되면 볼때기에 연탄을 바르며 봉사활동하는 장면을 내보이는 국회의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고 또 믿는다. 자신의 이미지와 무관하게 평생 김밥 팔아 벌은 전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돌아가신 김밥할머니 같은 분도 우리 사회에 분명히 계신다.)


 또 다른 부류는 힘들었던 과거와 힘들 미래를 한 발치 떨어져서 보는 방편으로 검소한 일상 속 현재에 집중하자는 주장을 끌어들인다. 퍽퍽한 생활 속에서 물질적 안락을 그토록 바라지만 내일의 풍요를 담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크기가 크든 작든 하루의 만족은 놓칠 수 없는 한 줌의 황금같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두 부류를 예로 들었지만 여기서 유의할 점은 소박한 행복을 방편으로만 활용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삶의 외형만을 차용하는 형태는 정신적 빈곤을 가져온다. 이건 부자나 빈자 모두 예외가 없다. 나의 조건을 고려함과 동시에 흉내내기가 아닌 자주적 선택을 통한 청빈한 삶의 태도가 현대인이 물질로 인해 받는 상대적 박탈감, 위축감, 미래에 대한 불안 등의 고통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사랑을 흉내 내는 바람둥이들의 전형이 어떤가? 현재에 집중하라고 얘기한다. 엄청 로맨틱하게 들리기도 하는 현재에 집중하라는 바람둥이의 속삭임은 곧 현재가 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전제로 타인을 기만하기 위한 눈가림이다. 그리고, 곧 과거가 될 현재의 외도를 지나간 일로 그녀의 기억에서 빨리 휘발되도록 만들기 위한 망각제이다. 우리 사회에서 현실의 삶을 소중히 여기자는 주장이 한낱 눈가림이나 망각제로 쓰여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현재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에서 꼭 견지해야 할 부분은 현재에 집중하라는 것이 과거와 미래의 연속성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삶의 탐색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인생에서 소중하지 않은 부분이 없듯이 행복 감수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통합된 연속성 속에서 현재에 내가 물질적 망상 또는 물질적 충만으로 인해 놓치는 부분이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흉내 내지 말고 과거로부터, 사회적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말아야 한다.


 “Seize the day” 는 그런 통합된 나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을 잡으라고!

잡히지 않는 하루를 움켜쥐다가 놓칠 어딘가에 있을 40명이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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