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학교 대신 고른 하루, 그 안에 숨은 따듯함
오늘은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경사진 동네에 있는 산 아래 조용한 아파트. 그곳에 사는 나는 오르막길을 오르내리기 싫어 집 안에서 조용히 쉬곤 했다.
그러나 아직은 학생 신분이기에 학교에 가기 위해 주에 며칠은 집 밖에 나오게 된다. 그렇게 낮부터 저녁까지,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시간을 보내며 꽤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김없이 다가온 환절기로 인해 낮과 밤의 바람의 온도차가 심한 요즘, 나는 역시나 지독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잠에서 깬 오늘 아침, 칼칼한 목과 동시에 흐르는 맑은 콧물에 훌쩍거리며 일어났다. 오늘따라 몽롱한 게 몸이 무겁고 어질 한 느낌에 손을 이마에 얹어보았다. 이런, 이마는 잘 삶긴 달걀처럼 뜨거웠다. 열이 나고 있는 듯했다. 도무지 학교에 갈 수 없겠다고 핑계를 대며 곧장 동네 이비인후과로 향했다. 잔병치레를 자주 하는 탓에 원무과 간호사분들께서 나를 알아보셨다.
"또 오셨네요? 이번에도 감기? 수액 맞고 가실 거죠? 서류 떼 드릴게요."
라며 친절한 어조로 능숙하게 접수를 해주셨다. 괜히 머쓱해진 나는 바람 빠진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병원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머리를 툭-, 떨어뜨려 기대곤 대기실의 풍경을 보았다. 깔끔하고 흰 병원 대기실. 접수하는 환자들과 마스크를 쓴 아기들도 있었다. 병원 원장님께서 워낙 꼼꼼하고 친절하시기로 소문이 난 탓에, 소아과도 아닌 이곳에 아이들도 많이 찾아오는 듯했다.
'저 작은 아이가 어디가 아파서 왔을까... '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를 바라보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내 아이도 아닌데 괜스레 마음이 속상했다. 열을 재러 온 간호사님의 손에 들린 체온계. 귀에 저 큰 것이 들어오나 지레 겁을 먹은 아이는 엄마품에 뛰어들었다. 저 어린것도 제 몸 하나 보호해 줄 사람은 알아보는가 보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며 열을 재고 난 후, 아이는 곧장 순서에 맞춰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 너머 대기실에 있는 나에게까지 울음을 토해내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어린아이는 본인의 상태를 살펴보려 닿는 여러 기구들이 퍽 무서울 것이다. 그것들이 제 건강을 살펴줄 것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아이의 마음을 생각하며 살포시 웃음을 짓는 내게 간호사님께서 수액을 들고 오셨다. 환절기라 환자가 많아 대기시간이 한 시간이 넘을듯하니, 먼저 수액을 맞자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익숙하게 수액실로 들어갔다.
따끈한 침대에 누워 옷소매를 걷어올리면 익숙한 약 냄새가 풍겨온다. 얇고 뾰족한 바늘이 내 혈관 속으로 묵직하고 따끔하지만 간지럽게 들어오는 감각이 느껴진다. 수액실에 불이 꺼지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잠에 빠져든다.
나를 깨우는 간호사 선생님의 부름에 뭉그적 일어나 옷소매를 내렸다. 어느새 바늘은 빠져있었고, 진료실로 향했다. 익숙하게 입을 벌리고 사진을 보며 설명을 들었다. 삼일 치 약을 처방받고 나와 약국으로 향하니, 아까 대기실에서 보았던 아이가 앉아 사탕을 먹고 있었다. 눈물과 콧물이 마른 채로 약국에 있는 물건들을 구경하는 듯 보였다. 한 시간이 지났는데 왜 아직 가지 않은 건가 의문이 들 때쯤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께서 약을 처방받고 계셨다. 아, 어머니의 진료시간 때문이구나. 깨달을 때쯤 나의 감기약이 나왔다. 내가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인지, 약사님들의 손이 빠른 것인지, 잠깐 새에 약이 나왔다. 약을 받고 약국을 나오니 순간적으로 눈을 질끈 감을 만큼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오늘의 날씨는 참 따듯하다. 따듯함을 온몸에 가득 채우고 싶은 욕심에, 폐가 부풀어 오를 만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숨에 온몸에 따듯함이 가득 찬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 좋게 머리카락이 살랑거린다. 바람결에 느릿하게 흩날리는 벚꽃 잎 사이로 햇살이 나무를 감싼다. 수액을 맞으며 한숨 푹 잔 덕인지 열은 내리고 몸은 가벼웠다. 물론 아직 목은 답답하고 코를 훌쩍거리긴 하지만 꽤나 움직임이 가벼워졌다. 약국 앞에서 시간표를 확인하고 오후 강의를 들을지 고민을 했다.
에라 모르겠다! 휴대폰 화면을 끄고 얼른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오늘 강의는 땡땡이다. 가끔은 이렇게 쉬는 날도 있어야지. 더구나 나는 환자니까 그럴 수 있다며 합리화를 했다. 늘 가던 학교인데 오늘 하루 학교를 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하루가 길어진 느낌이었다. 목적지 없이 내리는 햇살을 받아내며 천천히 걸어갔다.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할까.
'카페에 가서 책을 읽을까? 아냐 귀찮아. 그럼 어디 쉴만한 곳을 찾아 누워서 만화책을 볼까? 커피도 한잔 마시면서. 아니면... 오랜만에 산책이나 할까? 아니면..., '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딘지 모를 고요한 주택가에 덩그러니 서있었다. 지도를 보며 길을 걸어도 헤맬 정도의 길치인 나는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응? 이런 한적한 주택가에 조용히 숨은듯한 자그마한 카페가 하나 있었다. 은은하게 커피 향을 내고 있는 카페를 바라보며 홀린 듯 그쪽으로 걸어갔다. 혹시나 학교를 갈 수도 있다며 가져온 가방에는 커피를 담기 위한 텀블러도 있었다. 텀블러를 꺼내어 조심스레 카페로 들어갔다. 메뉴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이내 아메리카노를 마시기로 결정했다. 목이 부었을 땐 차가운 얼음으로 가라앉혀야 한다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고서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가게 앞에 서서 동네를 둘러보다 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 후다닥 도망가는 고양이의 엉덩이가 꽤나 귀여웠다. 햇살과 잘 어울리는 고양이는 햇빛에 반짝이는 황금색 털을 흩날리며 어디론가 달려갔다. 고양이가 사라진 자리를 한참 바라보다 어느새 눈앞에 놓여있는 내 텀블러를 발견했다. 텀블러를 가지고 다시 휴대폰을 꺼내어 지도를 켰다. 이대로 집에 가면 조금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거 같으니 도서관에 가자. 동네 도서관의 위치를 입력하곤 지도를 따라 걸어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한적한 오후 2시.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앉아있는 내 모습이 왜인지 너무 좋았다. 학교를 가지 않아서 그런가? 라며 마스크 안으로 한껏 미소를 머금은 채, 도착한 버스를 타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린 후 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유모차를 끌고 온 부부가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들어왔다. 엘리베이터에 있던 사람들은 당연하고 익숙하다는 듯 이리저리 몸을 틀어 유모차가 들어올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유모 차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아기를 보고 미소 짓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중엔 나도 포함이 되었다. 아기와 부부가 내린 후, 엘리베이터는 조금 더 올라가 열람실에 도착했다.
다수의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 일자로 된 책상을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제각각 할 것들을 펼쳐놓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자리를 잡으려고 안쪽으로 걸어가는데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시력이 안 좋아 흐릿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책에 들어갈 듯 고개를 숙이고 열중하는 모습인듯했다. 정말 열심히 하는구나-, 생각을 하며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의자 뒤쪽을 살짝 들어앉을 공간을 마련하고, 조심스럽게 가방 속에서 책을 꺼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텀블러를 책상에 두고 안경을 꼈다. 다시 보니 아까 그 사람, 책에 머리를 처박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졸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왜인지 안쓰럽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해서 소리 없는 웃음이 나왔다. 주위를 슥-, 한 번 둘러보니 다들 제각각 책을 챙겨 와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듯 책장을 넘기고, 볼펜을 끄적일 때마다 조심하는 듯 보였다. 사각사각 볼펜 소리와 팔랑거리는 종이의 소리가 잔잔한 음악 같다. 나는 이런 일상 속, 사람들의 사소한 배려들이 참 좋다.
기분 좋게 앉아 전공 책을 펼쳤다. 아,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힌다. 숫자와 공식이 난무하는 표. 정말 아무리 봐도 이 전공은 도무지 친해질 수가 없다. 한숨을 한번 내쉬곤 글을 읽어 내려간다... 만,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놈의 학교를 때려치우던가 해야지' 심통이 난 채로 팔짱을 끼곤 열심히 글자를 하나하나 뜯어본다. 그렇게 겨우겨우 읽어 내려가며 공부를 한지 약 두 시간 반 째, 시간은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어간다. 몸이 찌뿌둥해 도서관 옥상으로 올라간다. 옥상정원 벤치에 앉아 굳어있는 몸에 기지개를 켠다.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럼에도 아직 찌뿌둥한 몸을 가지고 따듯한 바람에 몸을 맡긴다. 따듯한 바람 한 결, 서늘한 바람 한결. 응? 저녁이 되어가니 서늘한 바람도 함께 불어온다. 이런, 낮의 햇살이 너무나도 따스하기에 옷을 얇게 입고 나왔는데. 콧물이 다시 훌쩍, 흐른다. 잠시 고민하다 다시 열람실로 내려가 가방을 챙겼다. 저녁시간도 됐겠다, 나름 공부도 했겠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며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등산하는 기분으로 집에 가는 오르막을 오르며 가쁜 숨을 내쉰다. '내가 올해는 꼭 평지에 있는 원룸으로 자취하고 말 테다.' 하루에 다짐만 수십 번이다. 집에 도착해 저녁을 먹고 감기약을 먹은 후, 얼른 씻고 나와 보드라운 수면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역시, 이거지. 부드러운 이불과 푹신한 베개들에 파묻혀 행복을 만끽했다. 나의 하루는 푹신한 침대가 있는 한, 행복하게 마무리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엎드려 휴대폰을 켠다. 메모장에 오늘의 일기를 적어 내려가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어차피 잠들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이렇게 뒹굴뒹굴할 게 뻔하니 저녁시간은 더 적을 것도 없다.
얼렁뚱땅 하루를 마무리하며, 따듯했던 햇살과 흩날리던 벚꽃 잎, 고양이의 금빛 털과 아기의 웃음, 사람들의 작지만 당연한듯한 따듯한 배려를 되새김질하며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가끔은 이렇게 흘러가는 하루도 필요하다. 아무 일도 없는 반복되는 하루가 이렇게 따듯할 줄은 몰랐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