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도토리를 안 먹어요
할머니는 내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때 사용하는 레퍼토리가 있다.
“이년아, 넌 나 죽으면 개밥의 도토리야.”
“개밥의 도토리?”
“그래 이년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뜻이여.”
“내가 왜 쓸모가 없어?”
“니 애비가 네 동생 엄마 등살에 너를 거들떠나 볼 것 같냐잉? 나한테 잘혀.”
“할머니나 나한테 잘해... 나 아빠집에 가서 살면 보고 싶어서 어쩌려고? 자신 있어?”
“옴마 저년이 한마디도 안져 한마디를”
“누구한테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말라고 배워서, 말로도 지면 안되잖아?”
“이년이. 밥이나 먹어 얼렁.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말은 저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두려웠다. 할머니가 없는 삶? 그런 시간이 오지 않았으면... 어느 날 할머니가 갑자기 죽어서 내가 아빠집에라도 가게 된다면 내 인생이 끝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몰래 나 혼자 다짐했었다.
“할머니가 죽는 날. 그날... 나도 죽을 거야.”
가장 친한 지은이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마음속에서 할머니가 아플 때마다 유서를 써 내려갔다.
내가 성장해 나가는 대가처럼, 할머니는 점점 노쇄해 갔다. 병원에 입원하는 날도 많아지고, 한밤중에 갑자기 쓰러져 119를 부르기도 했다.
“우리 할머니가 쓰러졌어요. 보통 3리 222번지요. 산속 길가에 집이 있어요. 빨리 와주세요.”
병원으로 구급차를 타고 가서 할머니의 주민번호를 부른다. 30년생. 이봉례. 평소에 혈압이 높아 혈압약을 먹고 흡연을 즐겨합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내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할머니는 링거주사를 맞고 살아났다. 할머니랑 병원 침대에서 구겨져서 자다가 헐레벌떡 씻지도 못하고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다. 힘들기도 했지만, 할머니가 살아났다는 안도감이 훨씬 컸다. 잠자리의 불편함과 씻지 못하는 찝찝함? 그건 할머니가 없는 슬픔에 비할 것이 못됐다.
“할머니가 나 키워준 거에 비하면 이 정도쯤이야. 그리고 할머니 이번에도 살아났다. 휴.”
내가 어릴 때 음식을 잘못 먹고 체하거나, 열감기로 할머니를 많이 고생시켰다. 꼭두새벽부터 밭일을 나가야 하는 할머니지만 밤을 거의 새워서 나를 간호하고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밭에 나가는 일이 많았다. 어린 눈에도 일하러 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면 가슴이 저렸다. 내가 성공해서 꼭 할머니 호강시켜 주리라 다짐했지만, 나에게 과연 그런 시간이 올 수 있을까? 할머니와 나 사이에 허락된 시간은 얼마큼일까?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우리 이봉례 여사는 금방 저세상 갈 것 같이 아프다가도 살아나서 씩씩하게 밭일을 다녔다. 씩씩하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씩씩하다.
“담배라도 좀 끊으면 안 돼?”
“담배 없이 인생을 뭣하러 사냐잉?”
“창문 없는 방에서 그렇게 하나로(담배 브랜드)를 피워야 되겠어? 그리고는 죽겠다고 하면서 병원에 가고?”
“그거랑 그거랑 뭔 상관이여.”
“그렇게 좋은 거면 어디 줘봐 손녀딸도 한번 펴보게.”
“뭐시라고야? 뭐 좋은 거라고 배울라고 혀. 이년이 미쳤나?”
“그럼 할머니도 미친 거네?”
“이년이!!!!!!!.”
할머니의 담배를 다 꺾어놓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람이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 하니까. 아무리 손녀딸이라도 할머니에게 허락된 잠시의 자유시간을 뺏을 권리는 없다. 할머니가 나한테 하지 말라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더 했기 때문에 나는 거기서 잔소리를 멈췄다.
나의 시골집에는 일어나기 싫은 주말 아침에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제 맘대로 울려대는 이장님의 방송소리 때문이다.
"아아~ 동네 여러분들. 오늘 면에서 모종을 준답니다. 마을회관으로 다 나오셔서 얼굴도 보고 밥도 잡수고 하시죠"
잠 좀 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할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할머니랑 같이 마을회관으로 갔다. 보통 3리 마을회관에는 나의 팬이 참 많았다.
"뿌듯이, 할머니 말 잘 듣고 학교 잘 댕기냐?"
"네가 그렇게 공부 잘해서 상도 타오고 그런다면서?"
"너네 할머니 밭에만 가면 네 얘기로 자랑이 여주 다리까지 늘어진다"
"누가 뺄례네 손녀딸 아니랄까 봐 그렇게 빼빼 말라가지고, 밥 좀 많이 묵어."
"어릴 때 그렇게 밭에서 트로트를 잘 불렀는디, 어디 한 소절 해볼텨?"
나는 속으로,
"돈 주시면 할게요 할머니 할아버지.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돼요."
여기저기 쏟아지는 나에 대한 관심이 싫지는 않았다. 내가 이 맛에 밭에 나갔었지 하며 속으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서 이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신나게 놀고 싶었다.
"뿌듯이가 쏠게요. 마음껏 즐기세요."
* 개학을 했습니다. 오랜만에 본 아이들 얼굴이 맑아서 마음이 좀 놓였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보고 싶네요. 연락하실 주변의 어른들이 계시다면 연락한번 해보시면 어떨까요?
“할머니 돈 붙여줄테니까, 거기서 한턱 내.”
저는 오늘 할머니에게 전화한통 간절히 해보고 싶네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