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우리 아빠 김흥석. 객관적으로는 훌륭하신 분이다. 방송통신대학교를 공장 다니면서 졸업하고 경제학 박사까지 되신... 지금은 어엿한 회사를 꾸리신 분. 아마 나의 아빠가 아니라면 존경해 마지않을 스펙의 소유자.
아빠는 내가 가끔 침묵으로 일관할 때,
“넌 아빠한테 왜 이렇게 불만이 많냐? 말을 해 말을. 멍청하게 입 닫고 있지 말고! 어렸을 때 부터 나랑 살아서 잘못하면 처 맞고 컸어야 하는데!!!”
할머니 앞에서는 그렇게 인정받던 나의 말들이 아빠 앞에만 가면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하는 쓰레기들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 그러니 내가 말을 하고 싶겠는가? 말을 하라고 해서 말을 좀 하면,
“넌 맨날 쓸데없는 말들만 늘어놓고, 말을 하는 거 보면 아주 생각이 썩었어! 어린 동생들 만도 못하니 쯧쯧쯧”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그냥 멍청한 바보가 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것도,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학교에서 매일 1등을 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다 나에게 깊이 찍힌 낙인이었다. 새엄마의 이야기가 자극적일 것 같지만, 아빠가 나한테 했던 말들은 자극을 넘어 중국 본토의 사천 마라맛보다 세다.
나도 말하고 싶었다.
“아빠, 세상에 딸 하나만 바라보고 재혼 안 하는 아빠들도 많은데. 아니 좀 내가 크고 하던가. 아빠가 결혼하는 바람에 내가 겪고 있는 이 상황들을 설명해 보세요. 나 하나로는 부족해요?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왜 낳아서 힘들게 해요?”
이 말을 뱉는 순간, 난 천하의 불효녀가 되겠지. 그리고 말은 한번 뱉는 순간 다시 담는 건 불가능하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살 것 같은 나였지만, 아빠 앞에서는 늘 작아졌다.
아빠의 차를 타고 대신집으로 올 때 간혹 할머니가 동행하면 아빠는 그동안 쌓여있던 불만을 쏟아냈다. 아직은 어린 내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처럼. 아주 큰 목소리로 할머니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니 할머니가 싫으면 보러 오지 말고 용돈도 주지 말던가, 왜 주고 나서 항상 마무리는 자신의 신세한탄이 섞인 폭언으로 끝나는가. 할아버지가 있는 상태에서 재가를 한 할머니의 행보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서로에게 생채기만을 내는 그 시간이 나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나이 많은 할머니는 아빠와 한바탕을 한 이후 줄곧 힘들어했다. 왜 우리 가족은 만나기만 하면 큰 소리가 나오는 걸까.
아빠는 내가 하는 모든 것을 못마땅해했다. 친구와 함께 교회 가는 것도, 기술 가정시간에 잘한다고 칭찬받았던 뜨개질 하는 것도, 서점에 책을 사러 가서 이솝우화를 고르는 일도. 아빠와 새엄마 마음에 드는 일은 아마 불가능했던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정말 슬프지만.. 아빠와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이 몇 개 없다. 살 갚게 말을 해본 적도 없고, 어디 놀러 간 적도 없다. 유일하게 아빠가 있어서 좋았던 순간이 있다.
타이거슨 표층 점상 각막염.
이름도 낯선 이 병은 주로 외국인(?) 어린 여성에게 주로 발병하는 안과 질환이다. 조금이라도 몸 컨디션에 문제가 생기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고통과 작열감이 발현된다. 처음에는 병명을 모르다가 6개월 이상 여주의 안과를 전전하고 큰 병원에 가라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서를 받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내 눈에 문제가 생긴 걸 알게 된 아빠는 그날로 나를 데리고 서울대학교병원으로 갔다. 응급실에서 위중한 환자들을 돌보느라 대기 시간이 3시간 이상이나 계속되었는데 역시나 우리 김흥석 씨는 참지 못하고 간호사와 병원 관계자들에게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지 알려라도 주던가! 내가 대학교에서 애들 가르치는 사람인데 말이야. 행정처리를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할머니에게 소리 지르는 실력은 나이가 들어도 사그라들지 않는구나... 대학교 시간강사인거 알면 창피한데… 아픈 눈보다도 아빠의 행동이 더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은근히 아빠가 나의 눈을 걱정하는구나 싶어서 기쁘기도 했다. 긴 대기 끝에 드디어 의사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미궁에 빠져있던 나의 안과질환에 대해 듣게 되었다. 별다른 약이 없고 고통이 수반될 때마다 병원에 가셔야 한다는 답. 일종의 자가면역 질환이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아파야 하는... 어쩌면 나의 삶과 맞닿아 있는 그런 병. 이 병은 지금까지도 나와 함께하는 불편한 친구다. 안 아프면 좋겠지만 달리 치료방법이 없다는데...
절망해 봤자 돌아오는 건 절망뿐이다. 그래도 눈이 아플 때 아주 가끔 아빠의 호통이 생각난다.
아빠 때문에 생긴 트라우마가 여러 개 있다. 어릴 때, 군산 할아버지 집 우물을 향해 나의 다리를 거꾸로 들고 자연농원(현 에버랜드) 놀이기구처럼 해주겠다며 위아래로 넣었다 뺏다 해줬다. 참으로 가성비 최고인 자연농원 놀이기구! 나는 덕분에 지금도 우물 옆에만 가면 공포에 휩싸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물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다.
또, 할머니 집은 미닫이나 여닫이 문이었는데, 아빠집에 가면 아파트 현관문 잠금장치가 3중으로 되어있었다. 돌리고 당기고 밀고.... 내가 집을 나설 때 문을 열어야 되는 상황이면 어쩔 줄을 몰라 열었다 잠그기를 반복… 여지없이 큰 소리가 나왔다.
“멍청해서 이런 것 하나 할 줄 모르냐? 비켜 얼른!”
내가 이런 문을 열어봤어야 알죠 아버님.
이렇게 불편하고 어렵고, 때로는 싫은 아빠가 없다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감사해야 하나? 원망해야 하나? 두 개 중에서 하나만 하고 싶은데... 두 가지 갈림길에서 나는 늘 길을 잃었던 것 같다.
왜 운명은 아빠와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까. 아빠는 자신의 엄마를, 나는 나의 아빠를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못하게. 항상 길을 잃게...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단의 하트 라이킷은 저에게 큰 응원이 됩니다. 일요일 편안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