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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뿌듯 Sep 21. 2024

30. 잘못된 복지의 수혜자

당당하게 살아봅시다.

 나는 드디어 고등학생이 되었다. 지은이와 처음 다른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낯설었을 뿐 중학교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주와 이천의 낯선 친구들이 인문계반을 구성했다. 나는 시골 종합고등학교의 단 하나의 인문계반인 ‘충’ 반에 들어갔다.


 내가 좋아했던 과목인 과학 선생님이 나의 고1 담임선생님이 되셨다. 예전 글라이더 대회 때 나에게 쓴소리를 날리셨던 그분... 이제와 알게 되었는데, 그 선생님이 날 안 좋아하셨던 것 같다.


생활기록부에,


'자신의 문제점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고치고자 노력함.'


이라고 적혀있는 걸로 보았을 때... 선생님이 보시기에 나는 문제가 참 많은 학생이었나 보다. 아직 눈치가 여러모로 부족했던 것 같다. 역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것은 욕심이다.  


 대신은 시골이라 따로 과외도 학원도 없었다. 오로지 밤 12시까지 하는 야자. 말이 자율학습이지 선생님들이 남아서 관리 감독하는 타율학습이다. 7교시 정규수업 후 8,9교시 보충학습을 하고 저녁을 먹는다. 이후 7시부터 12시까지 독서실에서 이루어지는 자율학습! 다행히 공부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인지 힘들지 않았는데, 나에게 뒤따르는 문제는 산속에 있는 우리 집까지 안전하게 도착해야 한다는 미션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님이 차로 데리러 오시지만, 난 그럴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야자는 해야 했지만 가로등 하나 없는 밤길을 혼자 가야 하는 것이 훨씬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체육이 있는 날이건 없는 날이건 항상 내 가방에는 체육복이 담겨 있었다. 야자가 끝난 후 퉁퉁 부운발을 운동화에 집어넣은 후 체육복 바지를 입고 교복치마를 얼른 가방에 넣었다. 기웃기웃거리다가는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이 차를 태워줄 수도 있었다. 나 때문에 길을 돌아가는 수고로움을 견디느니 나는 내 두 발로 당당히 가는 편이 더 좋았다. 그리고 학교 정문 앞부터 시작해서 쉬지 않고 산속 집까지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공포도 이기고 체력단련도 되는 일석이조!!


 차가운 공기를 폐부 끝까지 들이마시면서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과 달리다 보면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어렸을 적 제대로 먹지 않는 폐결핵 약 때문에 폐 기능이 약화된 거면 어쩌지 하는 후회와 함께. 내 폐는 다행히 잘 버텨주었다. 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으로 하늘을 바라보면, 반짝이는 별이 내 품으로 쏟아져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가끔은 너무 힘들어서 눈앞에서도 별이 반짝이긴 했지만..


 이렇게 달려 땀이 나서 들어오면 할머니는 TV를 틀어놓고 가수면 상태로 나를 기다린다. 분명히 잔 게 맞는데도 안 잤다는 거짓말을 내밀면서,


"우리 뿌듯이 왔냐. 공부 쉬엄쉬엄 혀. 밥 차려 놨응게 한술 뜨고자"

"지금 먹으면 속 더부룩해!"

"그래도 차려놓은 성의가 있는디, 한 숟가락만 먹고자."

"알았어"

"공부하느라 너무 고단해서 어쩌냐잉."

"공부 안 하면 뭐 앞으로 어떻게 살아. 이거라도 해야지."

"역시 우리 뿌듯이는 참말로 장하다잉. 징한 기집애."

"또 욕을 해 욕을.."

    

고등학교 생활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쯤, 이장아저씨가 주말아침 일찍 우리 집으로 오셨다.      


“뿌듯이네 할머니 계십니까?”

“아이고매 이장님 웬일이시오?”

“이장님 안녕하세요!”

“그래 뿌듯이 할머니 말 잘 듣고 있제?”

“네”

“내가 뿌듯이 할머니랑 뿌듯이 얘기를 면에다가 했는데, 그 나라에서 돈을 조금씩 준다고 하네요. 병원비도 안내도 되고요. 쌀이나 이런 것도 조금씩 준다고 합디다.”

“오메 진짜요. 고마워서 참말로 죽겄네.”

“(어리둥절... 할머니가 눈짓을 줌) 감사합니다. 이장님.”

“이번달부터 뿌듯이 할머니 통장으로 들어올 것이니께. 그렇게 아시고 농협에서 찾아서 요긴하게 쓰십시오.”

“아이고 고마워요 이장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랑가 모르겠네.”

“제가 주나요. 나라에서 준다고 허니까!! 건강 잘 챙기시오.”

“안녕히 가세요 이장님.”

     

“할머니, 우리 아빠가 있는데 이게 되는 거 맞아? 안되는 거 같은데? 뭐 잘못된 거 아냐?”

“네 아버지 있다고 해도 보탬이 크게 안되니 나라에서 해준다고 하는 거 아니여. 잔말 말고 받을 수 있을 때 받아.”   

  

 내가 생각했을 때 이건 맞지 않았다. 어떠한 절차로 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장님이 힘을 쓰신 건지... 나라에서 무언가 잘못된 건지... 이 과도한 복지로 아니, 잘못된 복지로 나는 학교 급식비, 병원비, EBS 책값을 내지 않아도 됐다. 담임 선생님께서 월 말에 따로 부르셔서 몰래 주시는 30여 장의 식권은 나의 자존심을 깎아내렸다. 급식을 먹을 때마다 잊지 않았다. 내가 받은 이 잘못된 복지로 내가 크고 있으니, 언젠가 돈을 벌게 되면 꼭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갚을 거라고.. 마음에 항상 작은 가시가 나를 쿡쿡 찔러댔다.


 병원에서도 나의 주민번호를 부르면..


"아! 김뿌듯님 그냥 가셔도 돼요."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아는 나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색해하는 그들과의 침묵의 1초가 참 어색했다.


 작게나마 나는 그때의 다짐을 지키며 살고 있다. 내가 돈을 벌게 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속죄하는 마음으로 매달 기부를 하고 있다. 잘못된 복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 돈을 벌어서 좋은 것 중에 하나는 내가 받은 진료의 대가를 당당히 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당당함이 나에겐 축복이다. 이제는 내 삶에서 더 당당해지고 싶다. 앞으로도 더 당당해지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추석에 중국에 여행을 다녀오느라, 한 주 쉬어갔습니다~ 중국은 시원했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아직도 여름이 끝나지 않았네요. 어서 가을이 오기를 기다려봅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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