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만 원의 행방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에 큰일이 두 개나 생겼다. 여러 번 스쳐간 이모할머니와 우리 할머니의 다툼으로 보기에는 그 사이즈와 파급력이 너무나도 큰 일.
이모할아버지의 아들 한유승은 보험 관련일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낸 조카의 권유로 할머니는 10여 년 전 내 이름으로 보험 하나를 들어놓았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학자금으로 쓸 수 있도록 밭일을 해서 매달 꼬박꼬박 저금을 했다. 할머니가 늘 자랑처럼 나에게,
“우리 뿌듯이 대학만 가면은 등록금은 할머니가 줄거니께. 너는 그저 공부만 열심히 혀! 이 늙은 할마시가 뼈가 부서져라 일할테니.”
“돈이 어디 있어서?”
“너 어렸을 적부터 적금 부어놔서 곧 타먹으면 되니께. 걱정 말어.”
“얼만데?”
“이천만 원이 좀 넘을거여. 너는 공부만 혀.”
“알겠어”
어쩌면 그 적금이 할머니에게는 자신의 아들보다도 더 의지하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종종 쌓인 돈을 열심히 확인하던 할머니의 얼굴에서 피곤함이 일순간 사라지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 하게도 이 시기 늦게 사춘기가 온 것 같다. 공부도 하기 싫고, 공부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간들 비싼 등록금과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그렇다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실력도 아니었고... 이도저도 아닌 내 인생에 회의감이 몰려오고 있었다. 잠을 줄여 공부하겠다는 의지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내신 등수가 급 하락해서 담임 선생님께서도 많이 걱정하셨다.
"뿌듯이 너 무슨 일 있니? 왜 이렇게 내신 점수가 떨어졌어?"
"잘 모르겠어요."
"그동안 열심히 해오던 게 사라질 수도 있어. 조금만 더 힘을 내!"
"네. 선생님"
나를 위해 장학금을 받게 해 주시느라 추천서를 여러 번 쓰셨던 아빠 같은 담임선생님의 걱정도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시간이었다.
평범한 날의 조례 시간에 아이들이 단체로 왜 뿌듯 이만 장학금을 받냐고 선생님께 심하게 따져 묻기도 했었다.
"선생님 왜 뿌듯 이만 장학금 계속 받아요!!!"
"맞아요 선생님. 한 번도 못 받은 아이들이 엄청 많은데, 쟤만 계속 받아요!"
얼굴이 화끈해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때,
"그럼 너희가 공부를 뿌듯이 만큼 해. 뿌듯이는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야!"
저 말속에 있는 그 '조건'이라는 것이 소가 평생 끼고 사는 굴레 같았다. 그 장학금으로 문제집과 책을 사고 저녁값도 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버티는 환경이 고맙고도 무거웠다.
무엇을 위해 공부를 하고,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 해지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야 하는지... 아빠는 나에게 등록금이 들지 않고 취직을 바로 할 수 있는 경찰대학교나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권유했지만, 그러기에 나의 수학 실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사교육 없이 EBS만으로 공부해서 상위권을 갈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말이다.
주말의 어느 날 집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할머니와 이모할머니의 언성이 높아지고 이모할아버지까지 가세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할머니가 내 앞으로 들어놓은 보험을 삼촌이 마음대로 해지했다고 했다. 삼촌이 할머니의 동의 없이 벌인 일이다. 이천만 원은커녕 중간에 해약을 해서 25프로 정도만 남은 돈을 삼촌이 가져갔다고 했다. 할머니는 왜 허락도 안 받고 해약을 하냐고 화를 냈고, 이모할아버지 부부는 잠시 빌려간 것이라고 아들 편을 들었다. 안 준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난리냐며 할머니를 몰아세웠다.
이건 명백히 사기다. 아니 범죄다. 본인의 동의 없이 해지된 만기가 얼마 남지 않은 적금 같은 보험.
어른들의 고성이 오가는 상황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어쩌면 아빠보다 더 의지했던 이모할아버지가!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아들이! 나와 할머니에게 크나큰 피해를 주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이모할아버지는 정확하게 판단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자식이 저지른 잘못을 두둔하기에 급급했다. 돈도 돈이지만 그때 배신감이라는 단어를 확실히 안 것 같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몸에 있는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모할아버지가 우리 할머니에게?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이렇게 한바탕 큰 폭풍의 시간의 와중에 할머니가 정신을 잃었다.
어떻게 할머니를 병원에 데려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 남은 장면은 할머니가 내가 결핵을 진단받은 여주에서 가장 큰 병원에 누워있었고, 의사 선생님이 뇌출혈을 이야기하셨다.
“뇌 CT를 보니 출혈 소견이 있습니다. 연세도 있으셔서 좋은 예후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준비? 무슨 준비!’
눈물로 내 눈이 엉망이 되었다. 눈물이 차 오르는 속도를 닦는 손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눈물이 흘렀다. 아빠와 새엄마도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할머니와의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 이렇게 빨리 찾아오다니...
이때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에게 절실히 빌고 또 빌었다.
‘할머니만 살려주세요 제발. 그럼 앞으로 제가 시키시는 것은 다 하겠습니다. 할머니를 살려주세요. 제발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기다려야 하는 그날의 밤이 힘들었다.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인생의 여러 밤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밤이었다.
* 발행요일을 토요일에 일요일로 옮겼습니다. 침대에 더 머물고 싶은 쌀쌀함이 반가운 계절이네요. 환절기 건강 조심하세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