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에는 없는 맥도날드
나의 자율학습은 고2시절도 계속되었다. 밤 12시에 끝나 체육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눈 감고도 올 수 있을 정도였다. 밤에 혹시 무서운 산짐승이 나올까, 그보다 무서운 사람이 나올까 보다 나에게 더 두려움과 압박감을 주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부모님이 준비해 오시는 야식이다.
밤 9시에서 30분 정도 늦게까지 공부하는 딸들을 위해 집집마다 순서를 짜서 간식을 가져다주셨다. 김밥이나 샌드위치에서 부침개나 튀김까지! 농번기로 바쁜 와중에도 그날만큼은 딸의 친구와 선후배에게 정을 나누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진학 상담까지 하는 아주 중요한 날이다. 아무리 바빠도 한 학기에 한 번은 부모님들이 오셨다.
나는 아빠 엄마에게 자율학습 간식에 대한 얘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여러 번 망설였다. 거동이 온전치 않은 할머니에게 부탁하기도 어려웠다. 아빠가 퇴근하고 저녁시간에 간식을 준비해서 와줄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계속 시간계산을 했다.
아빠는 나랑 가까운 여주에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이천으로 집을 이사했다. 조금 더 멀어졌지만, 올 수 없는 거리는 아니었다.
여느 주말 아빠 집에 갔을 때,
“아빠 다음 달 말에 제가 야자 간식 당번이에요. 아빠 혹시 간식 준비해 주실 수 있어요?”
“그래 뭐 어렵다고, 맥도날드 햄버거랑 콜라랑 준비해서 갈게. 몇 명 정도야?”
“20명에서 25명 정도예요.”
“그래 알겠어.”
내가 고민 고민 해서 어렵게 꺼낸 말이 무색하게, 아빠는 흔쾌히 햄버거를 사 오겠다고 했다.
“간식만 주고 가는 건 아니고 선생님이랑 저에 대해서 상담도 잠깐 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해야지. 너 어깨 좀 펴게 아빠가 꼭 갈게.”
학부모의 날이나 수업 공개 때 엄마 아빠가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초중고 11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 나를 위해 아빠가 드디어 학교에 온다고 하셨다. 그것도 여주에는 없는 맥도날드를 사가지고! (당시 여주 시내에는 롯데리아만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왠지 공부가 더 잘되는 것 같았다.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아빠에게 나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내가 자율학습 간식을 준비하기 며칠 전, 재차 확인하기 위해 학교 공중전화로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 모레에 학교 오기로 한 것 잊지 않으셨죠?”
“ 아아, 그랬지. 아빠가 바빠서 못 갈 거 같다. 돈 부쳐줄 테니 네가 알아서 해.”
“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까지 서운해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이 통화를 한 날, 할머니에게 못되게 쏘아붙였던 것 같다. 누구한테 뺨 맞고 누구에게 화풀이를 한 건지...
“아빠 안 온데 할머니. 그러면 그렇지. 기대한 내가 바보지.”
“너희 아빠가 회사 다니느라 바쁜가 보지.”
“아니 그러면 애초부터 사 온다고 말을 말던가. 친구들한테 아빠가 맥도날드 햄버거 사 온다고 자랑했단 말이야.”
“그럼 우짜냐. 대신에는 없는데.”
“참 누구 닮아서 이렇게 신용이 없는지...”
“뭐라고?”
“됐어. 단비네 가서 김밥이랑 어묵이랑 사가지고 갈게.”
“...”
할머니는 억울하게 화풀이의 대상이 되었다.
나의 야식 당번인 날. 야자 쉬는 시간 헐레벌떡 나와서 양손에 김밥과 어묵을 들고 기숙사 독서실로 향했다. 양손에 무겁게 든 짐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나의 운명 같기도 했다. 간식이고 뭐고 집어던지고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학교 생활 11년 중 단 하루도 나에게 허락해 줄 수 없는 것인지. 아니 애초에 그걸 잊어버렸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이복동생들을 위해 새엄마는 늘 어머니회에 참석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담임 선생님들의 특징, 동생 친구들의 모습을 얘기하는 시간엔 마음이 서늘했다. 왜냐하면 아빠 엄마는 나의 가장 친구인 지은이의 이름도 존재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인간에게는 어떠한 박탈감보다도 상대적 박탈감이 영혼을 좀 먹게 하는 것 같다.
내가 애초에 바란 것이 잘못이다.
18살이나 되었지만, 아빠 집에 가면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빠 집 전화가 아무리 울려도 받을 수 없다. 혹시 나의 존재를 모르는 새엄마의 가족이 전화를 할 수도 있었기에... 동생들과 놀아주려 아파트 놀이터에 나가도,
“누구야?”
묻는 주민들에 말에 내가 먼저 친척언니라고 둘러댔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동생들과 찍은 사진에 나는 있을 수 없었다. 새엄마는 내가 나온 사진은 철저히 선별해 나에게 줬다. 마치 무슨 전염병 마냥, 아빠집 사진첩 속에 나는 한 칸도 차지할 수 없었다. 행여 나의 존재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보이면 안 됐기 때문이다.
명절이 되면 당일만 아빠집에 있고, 아빠와 새엄마는 서둘러 나와 할머니를 대신집에 데려다주었다. 엄마의 가족에게 가야 했기 때문이다. 함께 가자고 한 적도 없지만 가고 싶지도 않았다.
‘더도 덜도 말고 명절만 같아라.’
라는 말이 있는데, 명절은 항상 나의 마음을 체하게 만드는 날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별로 불편하지 않은데, 거짓말의 대상자가 되는 나는 불편했다. 철두철미하게 거짓말을 하는 노력으로 내 마음을 조금만 헤아려주었다면 어땠을까?
있지만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
언제쯤 이 감정에 초연해 질 수 있을까?
* 쌀쌀한 가을 저녁은 햄버거 어떠세요? ㅎㅎㅎ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