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생일은 여주에서
엄마 아빠는 그렇게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내가 태어났다. 둘이 서로 '뿅' 갔나 보다.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결혼한 걸 보면..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이다. 혼인신고 날짜와 나의 탄생일을 조합한 나만의 추리이다.
"네가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던 아빠는 많이 실망스러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빠, 제가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요? 굳이 잘잘못의 지분을 따져보자면 아빠가 대주주인데요?'
1986년 초 가을의 어느 날. 오전 10시 즈음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큰 눈과 흰 피부를 가진 내가 태어났다. 나의 이름은 김뿌듯. 아빠가 직접 한자 사전을 찾아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이름 뜻을 풀이하면 맑은 보배라는 뜻이다. 나중에 동양사 교수님께 들었는데 ‘맑은’이라는 뜻의 한자는 사람 이름에 쓰는 한자가 아니라며 의아해하셨다. 어디서 지은 거냐고 물으셨는데, 아빠가 무안해할까 봐 대충 철학관인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내 이름의 한자가 사람 이름에 쓰이는 한자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빠가 나를 세상에서 맑은 보배가 되라고 지어주신 이 이름이 나는 참 좋다.
이름 때문인지, 나는 매일 맑은 보배 같은 아이들을 만난다.
언젠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사주를 보러 갔는데 개명을 하면 좋아질 수 있다고 했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내 다시 붙잡았다.
내 이름 때문에 일이 안 풀리는 거라면, 아빠가 지어주신 이 소중한 이름으로 나는 내 운명을 이겨 보겠노라고. 내 운명과 정면승부 해 보겠노라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다.
사실 태어난 시간은 몰랐는데 고모가 10시 즈음에 아빠한테 딸 낳았다고 전화를 받았다고 하니 그쯤 일 것 같다. 잔뜩 실망 섞인 목소리와 함께.... 근데 뭐 난 하도 들어서 처음에는 상처받았는데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그 흔한 고추 못 달고 태어나 죄송합니다. 아빠.
내가 태어나서 온 식구들이 다 모였나 보다. 나를 구경하려고. 예전에 이모할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있는데,
“너희 엄마가 너를 참 건강하게 키우더라. 따뜻한 물로 널 씻기는 게 아니라, 살짝 차가운 물에 씻겨서 너 잘 크라고. 그렇게 키우더라”
내가 어른에게 유일하게 들은 엄마 칭찬이어서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진 것이다. 나중에 새엄마에게 들은 것인데 나의 친엄마는 사치가 심했다고 한다. 아빠가 열심히 돈을 벌어다 줘도 비싼 것을 가지고 싶어 해서 그 욕심을 채워 줄 수 없었다고.
하루는 엄마 친동생이 한밤중에 칼을 들고 찾아와,
"우리 누나한테 잘하지 않으면 매형이고 뭐고 가만두지 않겠다."
협박해서 본능적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엄마가 사치를 했는지 아빠한테 문제가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것이 우리 가족에게 미친 영향이다.
엄마는 나를 버렸다. 나를 두고 무작정 집을 나갔다. 어린이집도, 특별한 보육 시설도 없는 서른 살 청년에게 갓 낳은 여자아이는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을까?
고모가 한 섞인 목소리로 나중에 얘기해 줬는데, 고모집에 내가 뻔히 있는 걸 알면서도 엄마가 보러 오지 않아 너무 화가 났다고... 갓난 딸이 궁금하지도 않냐고... 엄마의 친정집은 고모의 집과 불과 걸어서 5분 거리. 너희 엄마 되게 독한 여자라고. 고모는 이때부터 나에게 미안해했다.
지금 생각하면 굳이 어린 나에게 안 했으면 좋았을법한 이야기라 원망스러웠지만, 나중에 아이를 낳은 나의 친한 친구가
"너희 엄마, 산후 우울증이었을 수도 있어."
이야기해 주어 많이 위로가 됐다. 이것도 나의 운명이리라.
덕분에 나는 우리의 신여성 이봉례 여사님의 집에 오게 됐다. 돌잔치를 할머니 집에서 한 걸 보면 완전 신생아 딱지만 벗고 온 것 같다. 아빠는 혼자 키워보려, 할머니한테는 절대 맡기지 않으려 생각했지만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30살 청년이, 싱글 대디가 지금도 혼자 키우기 어려운 때인데 그때는...
빌리기 싫은 엄마의 손에 어린 딸을 맡기고 돌아서는 아빠의 마음이 어땠을까? 나는 감히 상상을 할 수가 없다. 마음 여린 아빠는 아마 숨어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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