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할아버지와 가짜 할아버지
그렇게 나는 여주에서 본격적인 인생을 시작했다. 그때 내 기억 속에 어렴풋이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는데,
"할아부, 할아부"
하면서 불렀던 기억이 있다. 3-5살 정도의 기억이다.
이 할아버지는 나와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할머니의 남자친구였다.
두둥!
아빠가,
"너의 진짜 할아버지는 군산에 계셔."
엄청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피가 섞이던 안 섞이던 뭐가 중요한가. 나랑 같은 공간에서 내 시간 속에 살았던 내 가족이었던 거지. 아빠는 물론 이 백 프로 싫었겠지만...
할머니의 남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많이 슬펐던 기억이 아직 있다. 할아버지는 누워계셨고 하얀 천으로 얼굴이 가리어져있었다. 할아버지 얼굴이 답답해 보였다. 흰 천을 걷어드리고 싶었는데, 할머니가 하지 말라고 했다. 마음에서 알 수 없는 뜨거운 공기가 왈칵왈칵 올라왔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내가 살면서 첫 번째로 많이 슬펐던 날이어서 그런지 기억이 생생하다. 많이 울었다. 이때부터 난 이별을 무서워했다. 죽음도 너무 두렵다.
남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아빠가 나를 편하게 보러 온 것 같다.
당시 창원과 여주의 거리는 차로 쉬지 않고 와도 자그마치 5시간이 넘게 걸렸을 시간. 아빠의 첫차인 회색 프라이드를 몰고 어린 딸을 보러 아빠는 휴일을 반납했다. 그리고 열심히 번 돈을 모아 카메라를 장만하고, 돌 지난 딸을 산속 이곳저곳에 모델 삼아 사진을 찍어주었다.
아빠는 나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난 그 사진 속에서 무한한 아빠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빠랑 함께 살 수는 없지만 보고 싶을 때마다 그 사진을 보면 됐으니까. 사진 속 내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나를 바라보며 사진 찍어주는 행복한 아빠의 얼굴이 그려졌으니까. 그걸로도 충분했으니까.
몇 가지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할머니가 이름 써보라고 하며 달력 종이를 줬는데, '김뿌' 까지만 쓰고 '듯'은 쓰지 않았다. 왜냐면 나에게 '듯'은 마음에 들지 않는 글자였다. 획수도 많고 생긴 게 이상했다. 할머니가 연신 써보라고 재촉했지만 거부했다.
"저놈의 기집애, 고집은 누구 닮아서 저러냐?"
나는 그래서 지금도 내가 하기 싫은 것은 절대 하지 않는다.
'할머니, 내가 과연 누구를 닮았을까?' 하하.
머리가 영리했던 건지 4살 때 구구단을 외우고 한글을 뗐다고 한다. 지나가는 차의 번호판, 큰 글씨의 달력, 마을의 간판, 도로의 표지판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집 앞에는
'여주 16Km, 양평 17Km'
초록색 바탕에 흰색으로 쓰인 표지판이 있었는데, 드디어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정말 신석기 혁명과도 같았으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됐을 때의 그 희열이란!
그래서 나는,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것에 희열을 느끼며 살아가는 선생님이 됐나 보다.
그 작은 마을에서는 천재가 나왔다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나를 지켜보곤 했었다.
"이런 애기는 테레비에다가 편지 써서 보내야 하는데?"
"쬐깐한게 여간 야무지다."
"아침마당에 전화 한번 혀봐." (KBS 아침마당)
시골마을에서 탄생한 천재라기보다는, 어린아이가 귀한 마을에서 천재 마냥 사랑을 받은 게 맞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어르신들이 좋다. 그 옛날 나를 예뻐해 주셨던 할머니 할아버지가 떠올라서. 세상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모두 다 나에게 후할 것 같다.
그리고 내 자랑을 좀 더 하자면, 그렇게 말을 잘했다고 한다. 할머니 표현으로는
“우리 뿌듯이는 말이여. 말이 청산유수여. 테레비에 나오는 여자 그 뭐시깽이냐 –운서 있잖여(아나운서) 시
켜야 겄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나운서 같이 말을 잘하는 손녀딸을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할머니는 그때 알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무한한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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