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
아빠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게 되었다.
그 시절 여주에는 금융거래로 돈을 모으기보다는 전통적인 ‘계’ 문화가 있었다. 우리 민족 고유의 풍습인 ‘계’는 어려운 일과 기쁜 일을 함께하는 우리나라의 전통 제도다. 아빠는 성실하게 일한 돈의 대부분을 할머니에게 맡겼다. 은행 이자보다는 동네 아줌마들끼리 만든 계에 돈을 넣어 두는 것이 훨씬 목돈을 만드는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목표 금액이 100만 원이라면 아줌마, 할머니 조합 5명이 모여 매달 20만 원을 낸다. 그러면 윤순이 계주 아줌마가 회계를 맡고 매달마다 제비 뽑은 순서대로 100만 원을 가져가는 방식이다.
1등 창희 할머니 2등 절집 할머니 3등 뺄례네 4등 윤순이네 5등 청수네 이런 식이다. 운 좋게도 1등이나 앞 순서가 된다면 일단 20만 원만 내고 100만 원을 굴릴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계가 열리는 날은 아줌마들 집에 놀러 가서 맛있는 걸 먹고 화투도 치는, 일종의 파티타임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이봉례 여사는 여느 어머니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아들이 힘들게 벌어서 맡긴 돈을 다 쓰셨다고 한다.
'네가 벌어온 돈은 내 돈, 내가 번 돈도 내 돈'
나중에 모은 돈 달라고 하니,
“뭐시라고야? 오메. 그 돈을 도로 내놓으라고?”
여기에서 우리 할머니의 신여성 다운 면모를 알 수 있다.
아빠는 나이가 서른이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했다. 낮에는 일 밤에는 공부. 혼자 살아남기에도 벅찬 인생이었다. 그렇지만 인생이란 예상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이때 아빠에게도 운명의 상대가 등장했는데, 고모가 교회에서 알고 지낸 친구의 여동생을 소개해 준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한경순. 나의 엄마였다. 나는 지금도 그녀의 얼굴을 모른다. 아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맞겠다. 사진첩에서 아빠 옆에 서있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본 기억이 있다. 아빠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내 눈앞에서 그 사진을 들고 박박 찢어 조각냈다. 아빠는 내가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사진을 찢으며 굳어버린 아빠의 표정이 생생하다.
우리 가족 중 그 누구도 엄마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빠에게 단 한 번도 엄마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았다. 그런 행동이 아빠를 더 슬프게 할 거란 걸 본능적으로 알았으니까. 알고 싶었고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참았다. 참는 것이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 사회시간에 호적이란 걸 배우면서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등본을 떼고 알았다. 혹시 엄마가 살아 있는데 아빠가 보여주지 않는 걸까 싶은 마음에. 내 기대는 차가운 현실로 다가왔다.
'제적'
두 글자가 심장을 찌르는 듯했다. 엄마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이모할아버지가 딱 한번 엄마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는데, 덧니가 있었고 참 예뻤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난 내 덧니를 훈장처럼 생각했다. 내가 볼 수 없는 엄마의 모습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엄마를 닮은 구석이 있구나! 하면서.
하지만 현재 나는 세상과 타협했다. 치아 교정을 했다. 미안해요. 엄마.
그리고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내가, 너 크려면 주려고잉 네 엄마 사진 두 장을 감춰놔부렀엉. 너 크고 말 잘 들으면 줄거랑께.”
난 바로 보여달라고 떼를 쓰고 싶었지만 참았다. 참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가 말도 안 듣고, 땡깡 부려서 할머니가 엄마 사진을 영영 감추어 버리면 어쩌지?'
결과적으로 그 사진은 영원히 봉인되었다.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사진 둔 곳을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은 아파도 어쩌겠는가 이것이 나의 운명인 것을. 나는 그냥 내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은, 참을 수 없는 힘든 일이 오면 괴로워하기보다
‘그래, 이것도 다 어쩔 수 없지 뭐. 괴로워하면 나만 고달프다. 할머니가 지 팔자 지가 꼬지 말라고 했어’
애써 쿨하게 넘겼던 것 같다. 별거 아닌 거라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별거 아닌 게 되더라.
이후에 대학시절 윤리교육과에서 니체를 배운 적이 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개념이 ‘Amor Fati.' (아모르파티)였다. 김연자의 노래로 유명하다.
'삶 자체를 사랑하라. 나의 운명을 사랑하라.'
이 단어는 아프고 힘들었던 니체가 자신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힘들고 고난이 와도 삶 그 자체를 사랑하라!'
그런 니체가 너무 나와 닮아서 마음 한편 위로가 되었다.
'지구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