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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Sep 04. 2022

아버님......

시아버님은 말수가 적으셨다. 남편과 처음 교제를 시작하고 몇 번의 만남을 이어가던 중 부모님께서 나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 하신다는 남편의 말에 뛸 듯이 기뻤다. (뛸 듯이 기뻤던 이유는 차후 남편과 내가 만나게 된 에피소드를 소재로 글을 쓰게 될 때 자세히 서술하도록 하겠다.) 미래의 시부모님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예상으로 긴장하며 부모님을 뵀는데, 내가 기대했던 반응과는 달리 두 분은 나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으신 듯했다. 특히 아버님은 거의 말이 없으셨고, 간간히 어머님께서 "밥 많이 먹어요.", "와 줘서 고마워요."등의 인사치레 말을 건네셨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님 어머님도 나를 부르고 보니 쑥스러워서 그러지 않으셨을까 짐작이 간다. 하여간 그때 나는 두 분을 뵙고 나오면서 며칠간 고민에 휩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나를 탐탁지 않아하시는 듯, 느낌을 파악하기 어려운 두 분의 표정이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남편도 딱히 이렇다 저렇다는 별 말이 없었고 또 데이트를 약속하자고 전화를 주는 게 아닌가. 


두 어달쯤 지나서 1월 1일 해맞이를 둘이서 가게 되었다. 새벽에 일찍이 지하철 역에서 만나 광안리 바닷가로 향했는데, 어마 무시한 인파를 뚫고 자리 잡고 서서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지금 제 옆에 선 이 남자와 잘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 결혼할 수 있게 해 주세요.'하고 계속 반복 기도를 했다. 물론 우리는 20년 전 그 해맞이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번은 가지 않았다. 진짜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해맞이를 끝내고 몸을 녹이려고 커피숍을 찾았는데, 자리 잡기가 하늘의 별따기였고, 또 겨우 자리를 잡아도 너무 시끄러워서 그 공간에 있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남편이 자기 집으로 가지 않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부모님께서 계시는데 같이 차를 마시자는 것이다. 그 제안에 나는 또다시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내 그러겠노라고 답하며 남편의 집에 가게 되었고 두 번째로 부모님을 뵙게 되었다. 그 당시 두 분은 딸(지금의 손아래 시누이)의 둘째 아기를 돌봐 주고 계셨는데 집으로 가니 아버님께서는 나의 인사만 받으시고 아기를 안고 방으로 슬며시 들어가시고, 어머님과 남편, 나. 이렇게 셋이서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난 아버님의 반응이 또 신경 쓰였고,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서로 할 말 없이 손에 든 잔만 응시하고 있는데 어머님께서 "저기...... 상견례는 언제가 좋을까요?"하고 어렵게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두 번째 만남에 뜸 들임 없이 직진 질문하시는 어머님의 진도 속도에 다소 놀라긴 했지만, 그때는 '뛸 듯이'가 아닌 '날아갈 듯이' 기뻤다. '아, 나를 탐탁지 않아하신 게 아니구나.'하고 생각하며 그간 내가 고민했던 생각들이 한순간 다 씻겨 나갔다. 하지만 그때도 아버님은 안방에 서서 외손자를 안고 계시며 느린 걸음으로 방을 돌고 계셨다.


일사천리로 상견례를 하고 결혼 날짜까지도 다 잡은 상태에서 어느 날 나는 남편이 야간 근무를 들어가고 난 후 어머님께 전해드릴 물건이 있어서 남편의 집에 혼자서 가게 되었다. 물건을 드리고 잠시 앉아 있다가 나서려는데, 아버님께서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나서시는 게 아닌가. 순간 말수가 거의 없으신 아버님과 어떤 대화를 하며 10분 남짓의 거리를 걸어가야 할지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1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버님과 나 둘이서 내려오는데 아무 말 없는 그 상황이 너무도 길게만 느껴졌다. 어두워진 거리를 천천히 걸어내려 가는데, "우리 아들 C가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너무 기쁘다. 고맙다."하고 웃으시며 나에게 말을 건네주시는데 순간 내가 너무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시고는 어머님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어떤 장사를 했는지, 장사하면서 있었던 웃겼던, 슬펐던 이야기도 계속 이어졌다. '이렇게 이야기를 잘해주시는 분이었네.' 하며 내가 걱정했던 아버님의 캐릭터는 사라지고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8년 전쯤이었을까, 시댁에 부모님을 뵈러 갔을 때 아버님은 풀 죽은 채 앉아 계시면서 나를 보시더니 뜬금없이 "내가 공부를 못 했던 게 너무 한이 된다." 하시길래, 이 철없는 며느리는 "아유~~ 아버님, 아버님 세대는 식민지 시대를 거치고 전쟁 거치면서 공부하기가 당연히 어려웠죠. 공부하고 싶어도 상황이 안 된 거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하고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위로랍시고 답을 드렸다. 


"내가 공부를 못 했던 게 너무 한이 된다." 

"에이~~ 아버님, 괜찮다니까요."

10여분 정도 지나 아버님은 똑같은 내용으로 한탄하셨고 나는 다시 영혼 없는 답을 드렸다.


"내가 공부를 못 했던 게 너무 한이 된다." 

"......"


아버님의 치매는 그렇게 우울함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머님께서는 할 수 있을 때까지 아버님을 당신의 손으로 보살피고 싶어 하셨고, 1년 전, 더 이상은 어머님을 위해서라도 안 되겠다는 남편과 시누이의 결론에 아버님을 요양원으로 또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2022년 9월 1일.

아버님께서 눈을 감으셨다. 


아버님은 참 성실한 분이셨다. 검소하셨다. 묵직하셨다. 올바르셨다. 깔끔하셨다. 지켜봐 주셨다. 자식들과 사위, 며느리를 늘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말수가 적으셨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님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까 봐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기억을 기록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록을 하고 있으니 눈물이 자꾸만 흐른다. 아마도 나는 아버님을 잊을 것 같다. 아버님도 자식들이 당신을 붙들고 눈물짓기보다는 자연스레 잊고 현실을 살아가길 바라실 것이다.. 살아가면서 문득 아버님이 생각나면 이 기록을 다시 펼쳐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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