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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Aug 21. 2022

나의 소확행

얼마 전, 읽었던 책을 다시 한번 완독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이십 대 즈음에 읽지도 않는 책 한 권을 또 읽지도 않는 신문을 손에 쥐고 다니는 허세 부리기를 꽤나 했었다. 외모에 대한 자존감이 낮았던 나로서는 지적 이미지 연출을 기대하며 내용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좀 있어 보이는' 제목에 더 중심을 두고 책을 선택했는데 그때 겨드랑이 착장 허세용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였다. 솔직히 내용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게 없는데 어쨌든 난 '상실의 시대'를 '읽어 본 사람'으로서 우연히도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책을 서점에서 보았을 때, "아! 하루키가 쓴 에세이네." 하며 작가에 대해 아주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책을 구매했다.




요 며칠 사이 아침 출근을 평소보다 10여분 정도 빨리 한다. 바쁜 아침에 식구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어떤 날은 아이의 방과 후 간식도 함께 마련한다. 게다가 나는 점심 도시락을 싸다니기에 도시락까지 준비하고 나면 아침 스케줄은 소화하게 된다. 빨리 출근하는 이유는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회사 앞 내가 좋아하는 커피점에서 시럽을 반 만 넣은 바닐라 라테 한 잔을 주문하고서 통창 너머를 보며 멍 때리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10분 남짓 시간 동안 따뜻한 라테 몇 모금 마시면서 창 밖을 응시하고 있으면 마음이 잔잔해진다고 할까. 일종의 명상과 같은 의식을 치르고 나서 사무실 문을 열고 출근하면 확실히 기분이 가볍다.

바리스타가 예쁜 하트를 그려준다. 나도 하트 그려줘서 고맙다고, 힘 난다고 답해주었다.




작년 7월, 건강검진을 마치고 결과표를 받았는데 총 콜레스테롤 270에 가까운 수치로 고지혈증 소견을 받았다. 평소 육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 편이고, 채소 과일 위주의 식사를 즐기던 터라 검진 소견을 받아들이기에 다소 어려웠다. 나이가 한 살 늘어나면서 검진 소견도 그 내용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거라고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말하지만 나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뭐가 문제였을까. 혹시 빵, 면 종류의 밀가루 음식을 즐겨 먹어서 그런 걸까. 이런저런 고민 끝에 식사 구성을 바꿔보기로 했고, 회사 구내식당을 이용하는 대신 도시락을 싸서 가지고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식사 구성이라고 해서 대단한 식이요법을 한 건 아니고 늘 먹던 채소 위주의 식사를 더욱 확고하게 지켰고, 나 혼자 먹는 도시락이었지만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채소 김밥, 양배추 절임, 두부 구이, 곤약 조림, 현미밥 등을 도시락으로 준비해 가면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음식을 선택의 여지없이 먹지 않아도 되고, 반대로 누구의 의견을 들을 필요 없이 내가 먹고 싶은 밥과 반찬을 준비해서 휴게실에서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면서 식사시간을 가지게 되니 처음엔 준비하느라 아침시간이 분주했지만 지금은 바쁜 업무시간 속에서 나 혼자서 오롯이 가질 수 있는 이 시간을 잘 채우고 싶어서 준비도 즐겁다. 게다가 영화 보며 책보며 천천히 밥 먹는 시간은 더욱 즐겁다.

업무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점심 식사시간.




내가 사는 아파트 인근에는 철도역이 있고 철길이 있다. 15년 전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를 결심했을 때 주변에서는 "여름에 베란다 문 열어 놓고 있을 때, 기차라도 지나가면 시끄러워서 잠깐이지만 대화도 어렵대.", "새벽에 화물기차 지나갈 때 시끄러워서 깬대." 등의 소음과 관련된 카더라를 전해주었다. 그럼에도 친정부모님의 도움을 구해야 했기에 부모님 댁과 가까운 지금 이곳으로 이사를 했고, 카더라는 카더라가 아닌 사실임을 실감했다. 소음의 정도에 따라 지금 지나가는 기차가 KTX인지, 새마을호 인지, 화물열차 인지를 구분할 수 있었고, 여름 한낮에 화물열차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실감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식구 세 사람 모두가 익숙해져서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그저 일상일 뿐이다. 그런데 기찻길 방음벽 하나를 두고 그 옆에는 예쁜 숲길이 있다는 걸 알았다. 2킬로미터 정도의 거리가 되려나? 나무가 울창하고 중간중간 벤치도 있으며 또 주민들이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체육시설도 한 곳에 마련되어 있다. 주말 아침 나는 종종 그곳을 느린 걸음으로 산책한다. 산책할 때는 이어폰을 끼지 않는다. 걸을 때 나는 흙 밟는 소리, 새들 지저귀는 소리, 고양이의 야옹 소리를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함이다. 느린 걸음으로 걷다 보면 숲길 끝에 새로 생긴 커피점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마무리를 짓는다. 물론 산책이 끝나면 나에게 주어진 주말 과업(욕실 청소, 밑반찬 만들기) 명세를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복기하며 돌아오긴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고양이, 마라톤, 맥주, 집필 등 하루키의 소소한 일상을 누군가에게 조곤조곤 말하듯 서술되어 있다. 문장 구성도 어렵지 않고 가깝게 지내는 이웃 아저씨의 일상을 내 시선에서 편안하게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웃 아저씨는 일상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지킬 건 지키고, 크고 작은 곳에서 섬세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확실한 행복을 느끼는 듯하다. 그건 "이게 행복이야. 확실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출근길 10분 동안의 멍 때리기와 라테는 곧 분주한 업무에 돌입해야 하기에 10분이 짧다고 느끼기보다는 소중함으로 다가오게 된다. 1년 넘게 지속하고 있는 점심 도시락 준비는 바쁜 아침시간에 약간의 수고를 필요로 하지만 나에게 좋은 식습관을, 즐거운 점심식사시간을 준다는 것을 알기에 그 수고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기찻길 옆 숲길 산책은 주말의 휴식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는 강한 동기가 된다. 이 모든 것이 행복이라고 알아차리고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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