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소 Dec 10. 2022

역사 깊은 현대 도시 플로브디프(Plovdiv)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도시, 플로브디프를 방문하다.

불가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플로브디프(Plovdiv)'에 도착했다.


도시 플로브디프의 명칭은 하루아침에 단순하게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트라키아 지역 언덕 주위에 풀프데바라고 불리는 거주지가 형성된 뒤, '풀프데바'라고 불렸고 기원전 342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점령되면서 이름도 '필리포 폴리스(Philippopolis)'로 바뀌었다.  하지만 고대 로마제국의 점령기에는 세 개의 언덕이라는 '트리몬티움'으로 불리었다가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점령된 시기에는 '필리베'로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지금의 '플로브디브(Plovdiv)'로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도시의 이름이 몇 차례나 바뀌어 가면서 유지한만큼 어렵고 모진 시련을 겪어온 격랑의 도시, 플로브디프지만 이 도시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과거와 현재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정갈한 도시로 다가왔다.

'플로브디프(Plovdiv)'라는 이정표를 지나 도시에 들어서자 과연 대도시답다.

잘 정비되어 넓게 뻗은 도로와 높은 빌딩들이 그 어느 도시보다 많이 들어서 있다.

반면 불안정하며 요동치는 시간을 이겨내며 이 곳에서 삶을 유지해 온 사람들이 살았던 오래된 집들은 그 시대 역사의 산증거이자 박물관으로 자리 잡아 전 세계의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격동의 과거들이 잉태되어 현재를 탄생시킨 도시, 플로브디프(Plovdiv)!

이제부터 과거의 디딤돌이 다져저 매력 넘치는 플로브디프의 올드타운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구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숙소에 짐을 푼 우리는 바로 올드타운 탐험에 들어갔다.

반나절이면 돌아볼 수 있는 넓지않은 구도시지만 동화처럼 아름답고 역사와 유서가 깊은 도시인만큼 복잡하게 얽힌 역사의 흔적들과 사연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에 서둘렀다.


숙소에서 구도시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는데 다행히 선선한 초가을 날씨가 우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구도시에 도착하기 전 한(恨) 많은 마리차 강(Maritsa River)을 건너게 된다.

투르크 인들의 마리차강 유역으로의 진출을 막기 위해 오스만 튀르크와 세르비아 사이에 벌어진 전투에서 투르크 군대의 기습을 받고 세르비아군이 대부분 전사하거나 도망을 가다 이 강물에 빠져 죽어 훗날 마리차 강에서의 '세르비아인의 파멸'이라고도 불리는 강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전쟁 후에 불가리아는 투르크에게 속박을 받는 더욱 확실한 봉신 국가가 되고 말았으니 참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짙푸른 색의 마리차 강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유히 흐르고 있다.

우리가 건너는 이 다리는 나무나 시멘트로 지어진 일반적인 다리가 아니라 다리 양 옆으로 가게들이 들어서 있고 그 다리 아래로 마리차 강이 흐른다.

대부분의 가게들은 식료품이나 의류, 가방들을 팔고 있으며 현지인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올 때 오래 끌고 다니던 캐리어에 문제가 생겨 걱정하던 차 이 다리의 가게에 들러 저렴하고 좋아 보이는 캐리어를 샀다.




다리를 지나 약 10여분 걸었을까?

아름다운 골목 거리를 만났는데 레스토랑과 카페가 대부분인 마구라(Magura)거리는 깨끗하고 한가하며 조용했다.


멋지게 그려져 있는 그래피티와 벽화도 눈에 띈다.




드디어 역사의 뒤안길에 묵혀 과거의 흔적들이 모여있는 구도심(올드타운)에 도착했다.

따뜻하고 차분한 색들의 가옥들이 길 양 옆에 자리했고 길바닥엔 모두 돌들이 박혀있다.

그래서 그런지 골목 분위기가 참 편안하다.

돌이 박혀있는 길은 걷기에는 조금은 불편하지만 고풍스러운 운치를 더하는데 한 몫하고 있다.

아스팔트 길이 생활하기에는 편하지만 이들은 절대 바꾸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지금의 삶을 여전히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길의 좁은 오르막길을 걷고 있자니 마치 내가 그 시대의 여인이 되어 걷는 기분이다.


내가 걷는 길 양 옆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하우스 박물관들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 시대의 정신과 유산을 그들의 하우스 뮤지엄으로 거듭나게 하고 있었다.

고난의 세월을 피해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때론 고통스럽고 기억하기 싫은 순간도 존재하겠지만 그들의 집을 박물관으로 새롭게 탄생시키고 과거의 삶의 모습을 간직한 채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casa lamartine'이었다.

이 건물은 불가리아의 대표적인 주택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불가리아 상인이 1830년경에 지었으나 이곳에 머물렀던 프랑스 시인 알퐁스 드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의 이름을 그대로 붙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작가 라마르틴은 사흘 동안 이 집에 머물며 플로브디프에 관한 멋진 글을 쓰며 불가리아의 독립과 자유를 강력하게 지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옥의 구조가 독특한데 주택의 상부구조가 크고 목재 요소가 많으면 많을수록 주인의 부유함을 나타낸다고 한다.

내부에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무슨 일인지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방문하지 못해 무척 아쉽다.


그런데 올드 타운에 있는 가옥의 구조가 매우 독특하다.

 1층은 그저 윗층을 받쳐주고 있는 역할을 하는걸까?

 나무로 지탱되고 있는 2층과 3층의 돌출된 구조와 또 창이 많은 게 특징이다.

사방이 창으로 된 가옥들이 내 맘에 쏙 와닿는데 나는 사방이 창으로 된 집을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구조와 형태가 유니크한 데다가 아름답기까지 하다.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이런 주택의 구조(1층 보다 2층이 넓은 구조)는 오스만 튀르크가 이곳을 지배할 때 맨 아래층의 면적을 기준으로 하여 세금을 매긴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세금을 조금이라도 덜 내기 위해 1층을 좁게 지었다는데 정말 기발한 생각이다.

플로브디프 구도심의 건물들 대부분은 이런 주택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심지어는 자동차도 사람도 지나기 어려울 정도의 좁은 골목을 상부 쪽이 튀어나와 하늘을 가릴 정도다.ㅎㅎ



골목길가 재밌는 소품들이 많은 골동품 가게가 눈에 띈다.

주인은 밖으로 나와 한국말을 섞어가며 우리를 안으로 끌어들인다.

가게 내부엔 정말 오래된 것들부터 처음 보는 신기한 것들 까지 다양하게 전시해 놓고 있었다. 어떤 것들은 오래전 사용하던 그들의 일상 생활 용품과 소품, 전통 악기들도 간혹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은 없다.


골목길의 골동품 가게


이어서 우린 '플로브디프 지역 민속 박물관(Plovdiv Regional Ethnographic Museum)'을 방문했다.

금세공을 하던 부유한 상인이 1847년에 지은 이 집이 지금은 과거에 살았던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훌륭한 민속 박물관으로 태어났다.

구도심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집들 중 하나라고 알려진 이 가옥은 건축양식이 특이하지만 주변과 잘 어울려 오히려 세련된 느낌을 갖게 하고 있었다.

박물관을 들어서자 가장 먼저 멋진 정원이 눈에 들어왔는데 깔끔하게 잘 관리된 정원이다.

주택의 구조 역시 하층보다는 상층이 더 넓은 독특한 구조에 많은 창문이 있는 화려한 저택이다.

민속박물관 정원

박물관 안에 전시된 유물들이 불가리아인들의 삶에 대한 지혜와 통찰력을 느끼게 했다.

주로 소수민족의 전통 의상과 생활에 사용되던 물건과 농기구들을 포함해 여인들이 사용하던 장신구들,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큼지막한 허리 벨트 등 다양한 전시품들이 소개되고 있었다.

특히 손으로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아 만든 전통의상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뛰어난 솜씨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간 기분이 들 정도로 과거 그들 삶의 방식을 알 수 있는 흥미로운 방문 시간이었다


특히 이들은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 불가리아의 민족해방 투쟁 등으로 그들의 삶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지만 기억이라는 문화자산을 현명하게 활용하면서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미래를 위해 새롭게 길을 내어주고 있었다.

고통스럽고 쓰린 기억이라고 그것을 잊고 산다면 결코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래된 저택을 지역의 문화 박물관으로, 고풍스러운 가옥들을 역사의 현장으로, 식민지 시대의 고통을 문화 자산으로 삶고 있는 이들이 대단하게 여겨지는 시간이었다.




이제 ‘히사르 카피아(Hissar Kapia)’를 통해 올드 타운을 빠져나간다.

중세에 만들어진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요새의 입구라니... 견고하게도 지었다.

하나하나 돌을 쌓은 그들의 노고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돌로 된 바닥을 보니 빗물이 흐를 수 있도록 홈을 파 놓았고 양 옆은 마차의 크기에 맞춰 높이를 맞추어 설계했으니 얼마나 공들여 만든 길인가!

필리포스 2세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통치자들이 자주 변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여전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 돌길과 돌담에 서려있는 수천 년의 세월이 위대해 보인다.

히사르 카피아



Hissar Kapia를 지나 스트룸나 거리(Strumna Street)에 자리하고 있는 공예거리(crafts)에 들어섰다.

여러 채의 집이 있는 이 거리는 지역 장인들이 공간을 빌려 전통적인 불가리아 공예품을 직접 만들기도 하는 곳으로 우리는 직접 가옥에 들어가 물건을 고를 수도 있고 소품을 만드는 체험을 할 수도 있다.

불가리아의 부흥 시대의 생활 소품의 양식과 숙련된 장인들의 솜씨를 보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조금 더 걸어  언덕 중턱에 오르니 로마시대의 대표 유적지인 ‘고대 원형극장(Ancient theater of Philippopolic)’이 나온다.

로마 원형 극장

트리아누스가 재위(98-117년)하던 시기에 지어졌다니 대략 1900년이 된 셈이다.

오래된 유적인데도 많이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 놀랍다.

말발굽 모양을 하고 있는 관람석은 플로브디프의 시내를 조망하는 선물도 주고 있었다.

5천 명에서 7천 명을 수용할 정도의 거대한 극장은 현재도 오페라, 콘서트 등의 다양한 공연들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특히 해마다 6월 말이 되면 이탈리아 작곡가인 '베르디 페스티벌(Verdi Festival)'이 여기서 공연된다고 하니 음향 좋은 이곳에 앉아 관람할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싶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구도심을 나와야 했다.




플로브디프에서 가장 생기 있고 활기찬 장소, 카파나(kapana)거리에 들어섰다.  

카파나는 과거 이곳이 실크로드가 되면서 진기하고 값비싼 물건들을 팔았던 장소라고 한다.

'카파나'라는 단어는 불가리아어로 '덫'이라는 뜻인데 정말 덫에라도 걸린 듯 주변을 둘러보느라 이 거리를 서성거리게 된다. 카파나 중심부를 거닐다 보면 오래된 건축물과 가치 있는 고대 유적지들이 여기저기 산재해있어 발걸음을 빨리 뗄 수가 없을 뿐더러 거리에서 야외 공연을 하는 사람과 예술 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보느라 쉽게 눈을 떼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나무 그늘에서 한가롭게 책을 읽는 사람도 보인다.

아름다운 정원과 노래하는 분수가 있는 공원은 물론 넓은 광장에는 힘차게 물을 뿜는 분수는 거리를 더 화려하게 만든다.

 

조금 더 걸으니 재밌는 동상을 발견하게 된다.

'미요의 상(Statue of Milyo)'이라고 불리는 동상인데 '미요'라는 인물은 정신적으로 불안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 인물이라고 한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았던 미요인데 그에게 귓속말을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고 해 나도 그에게 다가가 소원을 말해본다.




미요의 상을 뒤로하고 플로브디프 도시의 모든 곳을 조망할 수 있는 언덕 '사하트 테페(Sahat Tepe)'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Sahat Tepe라는 말은 터키어인데 플로브디프의 6개 언덕 중 하나다.

아마 오스만 튀르크 시대에 붙인 이름일까?

'Sahat'라는 의미는 '시계 '를 의미하고 있는데 이름 그대로 언덕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시계탑이 있다.

언덕에 오르니 사진을 찍기 위해 올라온 외국 관광객 한 명이 열심히 멋진 장면들을 찍고 있다.  

언덕 바위들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그래피티들과 읽기 어려운 낙서들도 많다.

불가리아인들의 그래피티 사랑을 이곳에서도 알 수 있었다.

높은 바위에 오르자 내 눈앞을 가로막는 게 전혀 없다.

360도 사방 플로브디프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더불어 내 가슴도 뻥 뚫린다.

한참동안 앉아 멋진 플로브디프의 전경을 감상하고 내려왔다.

사하트 언덕과 시계탑


언덕에서 조금 내려오니 시계탑(clock Tower)이 보인다.

이 시계는 1623년에 처음 만들어졌지만 파괴되고 다시 복구되어 1812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언덕은 또한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의 라디오 송신기가 있기 때문에 현지인들에게는 '텔레비전 탑의 언덕'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알랙산드로 거리의 끝에 있는 스테판 스탐볼로프 광장(Stefan Stambolov Square)’에 도착했.

이곳은 플로브디프(Plovdiv)의 중심 광장으로 시청이 있는 곳이며 free walking tour 출발지이자 되돌아오는 종착지이기도 하다.

광장에는 분수가 시원하게 물을 뿜고 있고 시민들이 쉴 수 있는 벤치와 공간이 만들어져 사람들이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주변에는 레스토랑과 카페 그리고 기념품 가게가 들어서 있어 젊은이들과 관광객들로 많이 분주하다. 하지만 건물들이 새롭게 단장을 한 것처럼 말끔해서 그런지 거리도 무척 깔끔하다.

우리도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레스토랑을 찾던 중 불가리아의 유명한 체인 레스토랑인 Happy Grill에서 맛난 식사를 했다.



점심 식사 후 산책 겸 공원을 찾았다.

도시 한가운데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공원(Tsar Simeon Garden)이 있는 이 도시의 사람들이 부럽다.


공원 벤치에 한참 앉아 있으니 힐링이 따로 없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햇살 좋은 오후와 서늘한 바람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마저 정겹다.

맑고 깨끗한 물 주변에 하얀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도 이 한가로운 오후와 어쩜 이렇게 잘 어울리는지...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앉아있고 싶다.

하지만...

우리는 갈 곳이 더 남아 있다.

바로 Ancient stadium theater of Philippopolic(로마 고대 경기장)이다.


지상에서 한참을 내려다봐야 하는 이 경기장은 지표면보다 한참 아래에 있었는데 비잔틴 시대에는 더 이상 경기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경기장의 위를 덮어버렸다고 한다.

이후, 그 일부를 발굴해 놓은 것이 지금의 로마 고대 경기장인데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인 2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델피(Delphi)에 있는 경기장을 본떠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경기장의 나머지 부분 중 일부가 알렉산드르 거리 쇼핑몰 지하에도 묻혀있는데 우리는 잠시 후 그곳을 방문할 예정이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고대 로마 경기장은 끝 일부만 발굴된 상태인데도 이렇게 웅장한데 도대체 경기장 전체의 규모는 어떠했을까?

무려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이라니 도대체 그 당시 얼마나 큰 규모의 경기장을 만들었던 건가?

최고의 전성시대를 누렸던 플로브디프의 과거를 보는 듯했다.

비록 여기저기 구석에 파괴된 돌기둥들과 대리석들이 방치되어 누워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과거의 로마 제국의 위엄을 풍기며 우리에게 그 시대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관에서 보여주는 3D 다큐멘터리는 그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그 시대로 돌아가 경기장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감동이 몰려오기도 했다.

감동을 이어가기 위해 우리는  알렉산드르 거리 'H&M가게' 내 지하에 있는 나머지 경기장을 보러 갔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지하로 내려가면 고대의 로마 경기장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정말 신기하고 놀랍다.

이곳에 있는 유적들은 고대 로마 경기장의 중간 부분이라고 한다.

조금 전에 보았던 경기장과 연결된 부분이라고 생각하니 어마어마한 경기장의 규모가 이제야 실감이 난다.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해놓고 발굴된 경기장의 흔적들이 보존되고 있었다. 

고대 로마의 유적과 유물들을 눈앞에서 직접 보고 있으니 벅차오르는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지하에서 올라와 번화가를 조금 걸으니 고대 로마 경기장 주변에 오스만 튀르크 시대의 종교를 상징하는 '드쥬마야(Djumaya) 모스크'가 보인다.

오스만 군대가 플로브디프를 정복한 후 Sveta Petka Tarnovska 대성당 교회 부지(1363 ~ 1364)에 세운 것이다.

이 사원은 플로브디프가 다양한 국가의 침략을 받으며 '그리스 사원'에서 '가톨릭 교회'로 다시 '모스크'로 바뀐 사연 많은 건물인데 지금은 1층이 고급스러운 카페로 이용되어 야외 테라스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가을 오후를 만끽하고 있다.


마음 같아선 우리도 카페를 방문해 아름답고 고급진 여유를 누리고 싶었지만 내 몸이 이젠 숙소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아침부터 일찍 서둘러 돌아다녔더니 서서히 몸이 지쳐간다.



오늘은 하루 종일 하나의 도시가 시대가 다른 또 하나의 도시와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하루였다.

아니, 타임머신을 타고 몇 번씩 왕복한 하루로 느껴지기도 했다.

현재와 과거, 불가리아와 로마, 그리고 오스만 튀르크까지...

예스러운 구도시의 고풍스러운 느낌과 활기차고 현대적인 느낌의 젊음의 거리...

이 모두가 환상적인 조화로 다시 태어난 도시, 바로 플로브디프였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전설이 떠오른다.

플로브디프의 사람들이 취해있는 걸 좋아하지 않던 왕이 와인 재배를 금지시킨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어긴 채 한 여인이 와인을 재배해서 그녀의 아들 '마브러드(Mavrud)'에게 먹였고 그 와인을 마시고 자란 아들 마브러드는 튼튼하게 성장, 성인이 되어 불가리아를 괴롭혔던 괴물 용과 맞서 싸워 괴물을 물리쳤다고 한다.

그래서 불가리아 인들은 용감한 사람들을 일컬어 '마브러드'라고 하며 또한 와인의 한 품종으로 판매되고 있다고 한다.

참 재밌는 전설이다.

우리도 오늘은 숙소로 가는 길에 저녁식사와 함께 할 '마브러드'와인을 사 가지고 들어갈까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