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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현 Dec 17. 2022

카잔루크에 숨겨진 보석들을 만나다.

카잔루크 다운타운, Shipka church, shipka peak 

스타로 젤레자레 마을을 떠나 오후에 카잔루크(Kazanlak)로 향했다.

차창 밖 드넓게 펼쳐진 초원이 그림이다.

넓디넓은 평원에서 방해받지 않고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검은 소들이 왠지 부럽기만 한데 한편 좁은 우리에 갇혀 사육되는 우리나라 소들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진다.



오늘  방문할 도시 '카잔루크(Kazanlak)'는 불가리아 장미 오일 생산의 중심지이며 흔히 "장미의 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페르시아, 시리아, 터키를 거쳐 중앙아시아에서 카잔루크로 수입된 장미는 적절한 온도, 높은 습기와 빛, 모래, 숲 토양을 번성시키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이 도시에서 화려하게 결실을 맺을 수 있었고 그 결과 카잔루크의 장미 오일은 파리, 런던, 밀라노 등에서 개최된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또한 이 도시는 1979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트라키아인 무덤(Thracian Tomb of Kazanlak)이 있어 "트라키아 왕들의 도시"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카잔루크는 1985년까지는 도시의 인구가 6만 명이 넘는 최고치에 도달했다가 이후 1990년대 불가리아의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수도인 소피아와 해외로 이주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카잔루크의 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문화와 견고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도시답게 불가리아 예술가들과 공연가들이 이곳에 머물며 그들의 예술 활동을 펼쳤고 그 결과 공연장, 극장 등이 세워졌고 도서관을 비롯해 여러 개의 박물관들도 들어서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카잔루크 방문 목적과 시기는 장미축제를 즐기기 위해 오월과 유월이다. 

카잔루크의 1년 중 가장 화려한 시절은 오월과 유월이고 그때가 되면 이 도시는 장미꽃들과 장미향으로 뒤덮이기 때문이다.

장미축제에는 대통령도 참석해서 함께 즐기고 '장미의 여왕'을 뽑은 후에는 온 거리에 장미 꽃잎을 뿌리며 아름다운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카잔루크의 장미축제(출처 : travel Bike )

특히 장미 오일 만드는 시범은 행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로 무려 수십만 장의 장미꽃잎을 사용해 1kg의 오일을 추출하는 과정을 관광객들에게 공개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도시를 방문한 오늘은 9월 말이다. 이러한 화려한 축제와 특별한 경험을 하진 못하겠지만 장미는 우리를 반겨주리라...



숙소에 짐을 푼 후 장미공원(Rosario Rose Garden)에 가기로 했는데 도심 근처엔 주차할 장소가 마땅치 않을 것 같아서 차를 호텔에 둔 채 택시로 이동을 했다. 

비록 봄에 화려하게 자태를 뽐내는 장미라지만 이름대로 우리가 방문한 9월에도 조금은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우리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희망은 무참히 산산조각이 났다.

장미 공원을 방문했지만 이미 장미는 시들거나 아주 조금만 남아있을 뿐 공원 전체가 삭막하다.

주민들 몇 명이 산책을 하거나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을 뿐 장미를 보러 온 사람은 우리 부부뿐이다. 

이럴 수가....

장미는 종류에 따라 다양한 시기에 피기도 하던데...

장미 공원(Rosario Rose Garden)

더구나 장미로 유명한 도시라고 한다면 1년 내내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장미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을 테고 그 결과 이 도시를 언제 방문하더라도 관광객들은 사시사철 때에 맞춰 피는 장미를 보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단지 5,6월 짧은 화려한 기간을 끝으로 이렇게 초라해도 되는 건가?

작년 이맘때쯤 한국의 남쪽 지방을 여행했을 때에는 초가을에 장미 축제를 하던데...

많은 장미가 피었더라면 정말 아름다웠을 이 공원이 지금은 띄엄띄엄 눈에 띄는 몇 송이들만 시들어가며 남아있어 공원이 산만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카잔루크 도심에 위치한 이 장미 공원은 규모가 크진 않지만 넓게 뻗은 길들이 조성이 되어 있어 산책하기엔 좋은 곳이었다.

장미공원 내 산책길

장미의 도시라 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기대를 했었는데 장미보다는 거리에 마로니에와 아카시아 나무 그리고 이름 모를 화려한 꽃들이 피어있다.


공원 근처에 있는 장미 박물관이라도 방문을 하려고 했지만 규모가 작은 박물관일 뿐 실제 장미는 피어있지도 않다.

장미가 피는 계절이 아니라고 해서 도시의 대부분이 이렇게 삭막할 줄은 몰랐다. 

노래 제목처럼 '백만 송이의 장미'는 아니더라도 자그마한 정원에 오밀조밀 핀 장미라도 기대했건만...


허탈한 마음으로 공원을 산책하고 나니 배가 허기가 진다. 허기진 마음이라도 달래려 길거리 피자집에 들러 마음과 배를 채우기로 했다.

피자의 종류가 다양하고 새롭다. 

이름이 독특한 피자를 주문했는데 다양한 야채와 하몽(Jamón)에 치즈를 올린 피자는 처음 보는 색다른 맛이었지만 먹을수록 당기는 맛이다. 느끼하지 않고 오히려 담백했는데 피자 위에 올려진 야채 때문인 것 같다.

날 좋은 오후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아이란과 함께 먹는 피자는 다행스럽게 허기진 마음과 배를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역시 난 마음이 우울하고 화가 날 땐 먹어야 풀리나 보다.ㅠㅠ



햇살 좋은 오후... 도심의 거리를 걸어본다. 

기념품을 파는 가게에는 장미를 재료로 한 비누와 향수, 그리고 장미 오일과 화장품들이 전시되어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거리의 카페에선  초가을 햇살 좋은 날씨를 즐기려는 듯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와 맥주를 마시는 사람이 많고, 우리처럼 시내를 걸으며 거리 풍경을 구경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도 거리를 걷다가 카페를 방문해 야외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카잔루크의 다운타운의 분위기를 느껴본다. 

아름다운 장미를 기대하고 방문했던 도시 카잔루크...

카잔루크 도심 광장과 다운타운 거리

우리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어 버렸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화려한 장미의 도시가 아닌 카잔루크 수수한 도시의 속살을 보게 되는 듯하다.

연극이 끝나고 관객이 빠져버린  텅 빈 객석을 보는 것처럼...



다운타운에서 숙소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비록 먼 거리였지만 이렇게라도 카잔루크를 직접 걸으며 도시 분위기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가는 길에 재래시장을 만났다.

그야말로 시골 마을의 조그마한 장터이다. 

물건은 다양하지 않지만 신선한 과일과 채소가 눈길을 끈다. 한쪽 코너에 차려진 의류와 가방, 액세서리 등은 우리나라의 화려한 패션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오히려 지나친 세련미보다 소박하고 수수한 그들의 생활모습에 편안하고 정이 간다. 

카잔루크의 재래시장
카잔루크의 재래시장


숙소 가까이 오니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어있는 트라키아인의 무덤이 있어 잠시 들르기로 했다.

그런데 방문객들 대신 개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다. 

비발디 현악합주 '사계'에서 개들이 컹컹 거리며 한낮의 적막함과 한가함을 표현했던 선율과 딱 어울리는 풍경이다.

트라키안 무덤




숙소까지 걸어오는 길이 이렇게나 멀었던가 싶다. 

카잔루크의 방문이 기대했던 것만큼 만족스럽지 못해 속상했던 마음과 지친 다리를 달래주러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수영장으로 직행...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서 기분이 풀릴 때까지 수영을 했다.

오랫동안 물놀이를 한 후 야외 정원으로 나가 벤치에 앉아 맥주 한 모금 들이켜니 맑고 서늘한 바람과 함께 올라오는 취기에 바로 이 순간이 행복이다 싶다.

호텔 수영장과 수영장 외부 정원




다음날 아침...

호텔 뒤쪽의 공원 (Gledkata park)을 산책하기로 했다.

한적한 공원의 산책길이 평화롭다.

키가 큰 삼나무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빼곡히 곧게 뻗어있다.

개를 데리고 아침 산책을 하는 부부의 뒷모습이 참 정다워 보인다.


공원 높은 곳에 올라 카잔루크의 전경을 보니 가슴이 뻥 뚫린다.

어제 오후 카잔루크의 도심을 걸으며 조금은 답답하고 불편하게 여겨졌던 마음이 넓은 평원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카잔루크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새 기분이 전환된다. 

'내 욕심이었나 봐. 만족 못해도 어쩔 수 없는 거지...'라고 말이다.


공원에서 내려다 본 평원과 카잔루크 전경

마음을 좀 더 여유롭게 갖기로 했다.




카잔루크를 떠나 벨리코 터르노보(Veliko Tarnovo)로 향하는 길에 앞에 보이는 산에서 번쩍거리는 무언가에 눈길이 자꾸 간다.

마치 나뭇잎 커튼 사이를 들락날락하며 반짝이는 황금 양파 돔이 우리를 유혹한다.

구글 지도를 보니 Shipka 마을의 Shipka memorial church라고 되어있고 국가 기념물로 지정된 교회이다.

초록이 짙은 숲 한가운데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탑!

우리는 유혹을 못 이기고 어느새 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Shipka마을에 들어섰는데 가옥이 몇 채 안 되는 마을로 무척 조용하고 아름답다. 

이런 작은 마을의 산 중턱에 화려하고 멋진 교회라니....

이 교회는 1877년 러시아 연합국과 터키 전쟁에서 러시아 연합국이 승리하면서 불가리아와 러시아의 우정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성당으로 불가리아에서 아름다운 교회로 손꼽히는 교회들 중 하나라고 한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Shipka memorial church
Shipka memorial church

100년 이상된 우거진 나무들과 잘 가꾸어진 정원이 무척 아름답다.

교회의 종탑은 높이가 53m에 달하며 가장 무거운 종은 전투 후 수집된 탄약통으로 주조되었고 무게가 무려 12톤에 이른다고 한다.


천천히 교회 외부를 둘러보았다.

'Opalchentsi'라고 불리는 불가리아 민병대들의 이름들이 34개의 대리석 판에 새겨져 있었다.

이름들 하나하나를 읽어가다 보니 마음이 숙연해진다. 

전쟁 없는 세상은 불가능한 걸까? 

죽은 자들의 유해는 교회 지하 석관실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민병대들의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 

교회 내부에 들어가 보니 무척 화려하지만 못지않게 엄숙한 우아함도 곁들여 있다.

프레스코화가 매우 다채롭다.

인가가 많지 않은 외딴 시골마을인데 이렇게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있다는 사실에 의아스럽기도 했지만 

울창한 숲 속에 숨겨져 있는 교회는 아름다움 뿐 아니라 아름다움 이상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교회였다.



교회를 출발해 Stara Planira 산맥에 있는 Shipka peak를 방문하기로 했다.

1326m 높이의 Shipka peak에 있는 기념탑(Freedom Monument)은 불가리아 해방을 위해 사망한 러시아 및 불가리아 군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원진 탑이다.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shipka pass를 한참이나 지나야 한다. 그런데 shipka pass는 바로 러시아-터키 전쟁(1877~78년) 당시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다.

이 shipka pass를 지키기 위해 불가리아 민병대를 비롯해 많은 군인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갔던 장소이다. 

가슴 아픈 길을 이십여분 운전했을까? 

슬픈 길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목적지는 여전히 드러낼 생각이 없는지 좁고 구불거리는 길은 계속 우리를 숲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마음 한편에선 이렇게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곳을 과연 계획대로 이곳을 방문을 해야 하는지 슬며시 의심이 든 것도 사실이다.

드디어 도착...

초입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올라왔다면 기념탑까지 무려 890 계단을 걸어 올라와야 했는데 다행히 우리는 자동차로 정상까지 올라왔다. 

물론 산 정상을 향해 올라오는 길은 가파르고 위험했지만 돌아갈 수도 없는 외길이라 계속 전진을 해야 했다.

정상에는 다행히도 자동차 몇 대 정도 주차를 할 수 있는 자그마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주차를 하고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를 격렬하게 맞이하는 건 바람이다. 그 세기와 강도가 장난이 아니다.

가장 높은 곳... 몰려오는 거친 바람을 막을 그 무엇도 없다.

오는 바람 그대로 맞을 수밖에...

자칫하면 날아갈 뻔했다. ㅎㅎ



정상에 있는 기념탑은 자유 기념탑(Freedom Monument)이다. 

파란 하늘 아래 우뚝 서있는 기념탑의 위용이 대단하다. 

불가리아의 문장을 상징하는 강인한 인상의 청동 사자가 기념탑 입구를 지키고 있고 정면을 제외한 기념탑의 다른 세 벽에는 주요 전투 지역인 Shipka, Sheynovo 및 Stara Zahora마을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사실 이 기념탑은 터키-러시아 전쟁 당시 터키에 대항한 불가리아의 애국자를 기리는 곳으로 전국에서 자발적인 모금 활동을 벌여 1934년에 완성된 의미 있는 기념물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던 shipka pass를 거쳐 올라왔지만 참혹한 전쟁터였던 pass주변의 사방을 둘러보니 산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대하다.

파란 하늘에 낮게 깔린 구름들 그리고 그 아래 수많은 구릉들과 평원... 이렇게 멋있어도 되나 싶다. 장관이다.

참혹한 전쟁터였던 shipka pass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이 후세에게 남긴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살면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 중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친 이들은 반드시 기억을 해야 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인한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국민들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높은 산 정상에까지 기념탑과 박물관 그리고 교회를 건립한 불가리아인들의 애국심에 존경이 느껴진다.

 

우리나라 역시 전쟁으로 희생한 전사자들이 수없이 많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까맣게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여전히 지금도 불가리아 가까운 나라에선 전쟁을 하고 있고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언제라도 전쟁의 위험에 처해있는 나라이다.

탱크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더 무겁다.

모든 전쟁의 결말은 비극! 

적대적 행위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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