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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현 Dec 12. 2022

벽화마을의 끝판왕, 스타로 젤레자레

거리 미술 마을 staro zhelezare를 방문하다.

역사도시 플로브디프(Plovdiv)를 떠나 카잔루크(kazanlak)로 가는 날이다.

카잔루크를 향해 가는 길에 플로브디프에서 멀지않은 불가리아의 벽화마을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벽화 마을을 방문해 본 적이 있는데 불가리아에서의 벽화 마을은 나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벽화 마을 이름은 스타로 젤레자레(staro zhelezare), 도대체 어디쯤에 있는지 좁은 시골길을 한참 달려서야 이정표를 만났다.




다른 마을과는 거리를 두고 동떨어져 있는 마을 입구가 무척 깨끗하고 조용하다. 아니 마을에 살고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지 적막하다.

스타로 젤레자레 마을 입구

하지만 마을 여기저기 널린 사과나무는 탐스런 사과를 잔뜩 품고 있다. 손이닿을 만큼 축 늘어져 있는 사과는 금방이라도 따서 먹을 수 있다.

언뜻 봐서는 여느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운전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주택의 벽마다 그려진 다양한 그림들이다.

이렇게 많은 그림들은 누가 그린걸까? 

어떻게 이토록 정교하게 그렸을까?

아무리 불가리아가 그래티피에 관심이 많은 나라라고 하지만 이건 그래피티가 아니다.

같은 벽에 그린 그림이라 하더라도 스프레이로 뿌려가며 작품을 완성하는 그래피티와는 명백히 다른 세밀하고 정밀한 그림들이다.

이럴 수가...

그러고 보니 마을 전체가 갤러리였다.

도로변뿐만 아니라 모퉁이를 돌 때마다 놀라운 그림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 마을을 차 안에서 보며 지나칠 예정이었으나 우리는 그 마음을 접고 차에서 내려야 했다.

아니 한나절이 걸리더라도 우리는 이 그림들을 하나하나 보며 카메라와 마음에 저장해 두어야 했다.




이 마을의 중심 광장이라고 할 수나 있을까?

조그마한 원형 광장, 커다란 고목 아래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시던 할아버지들뿐이다.

역시 불가리아도 한국의 시골처럼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나갔나 보다.

동양인들을 처음 보시는 지 고개를 돌려 차에서 내리는 우리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본다.

그러더니 우리가 온 목적을 알고 계신다는 듯 우리를 향해 뭐라 말씀하시며 손으로 방향을 가리킨다

그쪽에도 그림이 있다는 의미인가 보다.

미소와 함께 감사의 인사를 보내며 우리는 흥분된 마음으로 동네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방문한 마을 스타로 젤레자레(staro zhelezare)는 불가리아 중부에 위치한 마을로 '거리 예술 마을'로 불려지고 있는 마을이다. 

과거 불가리아에서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을 떠나 대도시나 해외로 이주하면서 이 마을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는데 2015년에 이 마을은 새롭게 태어났다.

폴란드에 거주하는 Katarzyna와 Ventsislav Piryankov 부부가 고향에 있는 할아버지를 방문하기 위해 그들이 가르치는 미술 학생들과 함께 스타로 젤레자레에 왔다가 생기가 없는 이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 부활시키기 위해 해마다 방문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예술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사람들(출처 TRT WORLD)

이들은 해마다 7월과 8월, 아침과 저녁시간을 이용해 마을의 Piriankov Art Center에서 그림 작업을 하며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

이것이 바로 스타로 젤레자레 마을을 살리기 위한 '예술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이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고 반대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마을의 벽화에 대해 소문이 나고 이 그림을 보러 관광객들이 방문하자 서서히 주민들은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심지어 벽화를 부탁하기 위해 기다리는 상황까지도 벌어졌다고 한다.


그들이 사랑하는 영웅들과 그들이 좋아하는 가수, 영화배우, 코미디언 그리고 각 나라의 왕자와 왕비, 그리고 정치가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벽화에 그려져 있다.

어떤 주택의 벽에는 집주인의 초상화는 물론 가족도 그려져 있고 그가 직접 키우고 있는 개와 소들도 벽화의 주인공이 되고 있었다. 


한집 한집 지나며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웃음도 나오고 감탄도 나오고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을 그린 벽화도 보인다.

고호, 고갱, 클림트, 칸딘스키, 뭉크, 샤갈, 달리 등의 대표작들을 마을 벽화에서 볼 수 있다니 갤러리에 와있는 듯 한 느낌도 들게 한다.

명화는 유명한 갤러리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며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도 같다.

요즘 인기 있는 미국의 예술가 키스 해링의 그림도 벽에 그려놓았다.


심지어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젤렌스키와 푸틴이 서로 노려보며 싸울듯한 그림도 있다. 하지만 그림을 보는 내 마음은 무겁다. 


아래 사진의 벽화는 아마도 축구를 좋아하는 가족인가 보다. 


아래의 벽화는 가축을 이끌고 농지로 나가는 남편과 꽃을 들고 있는 부인(?) 그리고 화려한 목걸이를 하고 있는 중년 여인...

무슨 내용일까? 

아무리 멋진 여인이 남편의 옆을 걸어도 우리 남편은 곁눈질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일까?

재밌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마을 전체가 무척 낭만적이고 포근하고 재밌는 마을, 주민들이 유머까지 지니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심지어는 영국 여왕과 함께 앉아있는 마을 할머니의 그림과 유명한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가 주민 할머니의 옷매무새를 만지고 있는 그림들을 보니 세계적인 유명 인사와 저명한 예술가들이 작은 마을의 현지인들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 이 마을에서 느껴졌다.

결국 우리는 위아래 높고 낮음이 없는 평등한 관계라는 걸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래 사진은 집주인인 여인이 사랑하는 강아지와 기르는 커다란 개를 표현했는데 빨간 두건이 유독 눈에 띈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메달을 목에 걸로 있는 그림으로 보아선 아들의 수상을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저마다 마을 주민들의 가정 이야기와 분위기를 상상케 만드는 그림을 보고 다니느라 시간이 얼마나 흐른지도 모르겠다.


마을 할아버지가 이끄는 트랙터의 뒤에 앉아 풀이 죽은 채 불가리아 국기를 손에 들고 견인되어 가는 트럼프의 그림도 있다.

우리 가족이 오래전 미국에서 살 당시 큰 아들이 '스쿠비 두(Scooby-Doo)'만화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하루 종일 이 만화만 보고 지냈던 적도 있는데 스쿠비 두 만화가 이곳에도 있다.

만화를 그려 넣은 벽화들을 만나니 이 가정은 유머가 많은 분위기일 것 같다.


불가리아 전통의상을 입고 예쁜 두건을 쓴 아름답고 화려한 여인의 그림을 보자 나도 저절로 벽화의 자세가 취해진다.

이 집 주인 아가씨일까? 참 밝고 예쁘다.


마을을 거닐던 중 정원에서 세차를 하고 있는 주민을 만났다. 

한국에서 만든 '현대 소나타'를 열심히 닦고 계신다.

우리가 웃으며 이 차를 만든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한국 자동차가 최고라며 엄지를 치켜세워주신다.

기분이 좋고 어깨가 으쓱해진다. 

이름이 '알렉산더'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 분은 무척 상냥하고 친절하게 우리를 대해 주셔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집 외벽에 있는 그림의 내용에 대해 여쭤보니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신다. 

벽에 있는 남자가 자신이며 비틀스는 본인이 좋아하는 그룹이라 벽화에 특별히 그려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나도 비틀즈를 좋아하는 그룹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들이 부른 유명한 노래들과 멤버 한 명 한 명 이름을 대니 신이 나시나 보다. 

한참 얘기를 나눴다.

무척 낭만적이고 재밌는 분을 만났다. 

스타로 젤레자레 주민, 알레산더와 함께


알렉산더와 헤어진 후 마을 벽화를 계속 보다가 안타깝게도 망가진 벽화를 만나게 되었다.

마을 주민 할머니 (sabka)와 독일 메르(Angela Merkel)켈 총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벽화였는데 메르켈 총리의 얼굴이 붉은 페인트로 지워져 있다. 아마도 독일 메르켈 총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훼손을 했나 보다.

벽화를 훼손한 건 명백히 옳지 않은 일인데 한편으로 난 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문득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의 벽화마을이 떠오른다.

부산의 감천 벽화마을, 통영의 벽화마을 그리고 전주의 벽화마을...

많은 벽화마을들을 방문해 본 것은 아니지만 오늘 본 스타로 젤레자레의 벽화마을과 비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많이 다르다.

물론 나는 벽화마을의 수준을 논하는 것이 아니고 벽화에 대한 정의와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건 더욱 아니다.

하지만 오늘 경험한 스타로 젤레자레의 벽화들은 예전과 다르게 나의 마음에 무언가들을 깊이 심어놓았다.

아마도 그 무언가들은 내 기억속에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을을 돌아보니 아직은 주택의 벽을 하얀색 공란으로 비워놓은 집도 간혹 보인다.

마음에 안 들어 흰색으로 덮어 버린 걸까? 아니면 무엇을 그려 넣을지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걸까?

슬프고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림, 주인이 그림을 보며 행복해 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려 넣었으면 좋겠다.

벽화를 보러 오는 이는 우리 부부밖에 없었던 조용한 마을 스타로 젤레자레...

긴 시간동안 아무리 걸어도 지루하지 않고 피곤하지 않은 평화로운 갤러리 마을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나니 행복하다.




이제 스타로 젤레자레를 떠난다.

널따란 광장과 높고 멋진 건물, 그리고 현대적인 편리함을 추구하는 마을은 아니었지만 스타로 젤레자레의 구석구석은 그 이상의 매력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 

특히 순수 예술의 걸작들과 유명인사 그리고 마을 주민들과의 공생은 스타로 젤레자레 마을의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충분했다

우리와는 다른 세계와 먼 문화 사이의 접촉도 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된 장소였다.

오히려 유명 인사, 정치인들이 벽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지역 주민들 옆에 서서 그들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이러한 만남을 통해 이 마을 주민들은 물론 나는 무엇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반성의 기회를 갖게 하며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길을 활짝 열어준 놀라운 경험이었다.

진정성을 찾고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본질까지 고민하게 한 시간이었다.


어떤 이는 이 마을에서 유토피아(Utopia)의 주제에 관한 예술 활동이 이루어진다고 보면서 이 마을을 '태양의 마을'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태양에 가까이 갈 수 없는 현실, 그리고 이상으로 그리는 가장 완벽하고 평화로운 사회, 유토피아 ... 

과연 이루어지지 않을 허상인가? 

하지만 나는 이 마을 스타로 젤레자레는 허상에 그친 마을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고 떠난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은 열린 예술 공간을 산책했던 우리를 여전히 상냥함과 친절한 미소를 보이며 진심으로 배웅하고 있었다.

 






※  참고로 스타로 젤레자레 마을의 그림을 더 보고 싶으시다면 아래 동영상을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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