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린 산맥 비렌봉의 호수에 가다.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을 보니 다행히 날씨는 우리 편이다.
햇살은 적당하고 하늘은 맑으며 바람도 없는 아침이다
날씨 때문에 오늘로 미룬 피린(Prin) 산맥의 비렌 산(Viren)을 등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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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피린 국립공원 중간 부분까지밖에 올라가지 못했지만 오늘은 가장 높은 마지막 주차장인 비렌 샬레(viren Chalet)에 있는 주차장까지 자동차로 올라가기로 했다.
이 산장까지는 굽이굽이 굴곡진 길을 운전해 35분 이상 올라와야 했지만 다행히 도로가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어 어렵지는 않았다.
비렌샬레 위치는 비렌 봉을 걸어 올라가기 위한 마지막 평지로 이곳에 있는 샬레의 높이가 1950m이며 제주의 한라산 높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높은 이곳에서도 멋진 레스토랑(샬레와 함께 운영)은 운영되고 있다.
등산 후 내려오는 길에 들러 맥주 한 잔 하면 좋을 것 같다.
다행히 아침 일찍 서두른 덕에 샬레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있었는데 성수기에는 비렌샬레까지 차로 올 수가 없다.
무엇보다 주차장이 많이 협소할뿐더러 올라오는 길도 굴곡이 심하고 좁고 위험해 많은 차들이 높은 곳까지 이동하기 또한 불편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요즘은 성수기 전이라 주차도 어렵지 않고 오가는 차들도 많지 않아 다행히 비렌 샬레까지 올 수 있다.
성수기에는 보통 케이블카를 타고 샬레 아래까지 올라오는데 가격을 보니 무려 개인당 34,000원이나 한다.
만약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걷는다면 무려 네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비렌 봉을 등반하길 원한다면 성수기를 피해 이용하는 걸 추천한다.
차에 내려 산의 풍광을 보니 그야말로 장관이다.
아직 눈이 덮여 있는 곳이 많이 있고 하얀 눈이 덮인 산 아래 초원과 꽃들 그리고 산에 쌓인 눈이 녹아내리는 거센 물줄기를 볼 수 있어 지금이 등반하기에는 가장 좋을 때인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이곳을 방문하며 피린산맥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잘 알지 못한 채 왔다. 그저 불가리아에서 아름답고 높은 산들 중 하나이며 빙하호수를 볼 수 있다는 사실만 알고 등반을 하기로 한 것이다.
등반이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호기심과 설렘, 긴장이 함께하는 이 기분을 느낄 때가 나는 가장 행복하다.
우리는 피린 산맥 중 최고 높은 산인 비렌봉에 있는 첫 번째 호수를 만날 때까지 가기로 했다.
비렌 봉은 릴라 산맥에서 가장 높은 무살라봉보다 10m 낮은 산으로 불가리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라고 한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주자창에 도착한 가족이 있다.
부모와 아들, 딸 그리고 손녀까지 등반을 하는데 할아버지가 손녀를 등에 업고 등반을 한다.
그들은 불가리아의 플로프디프(Plovdiv)에서 온 가족인데 이 비렌산 등반을 서너 차례 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낯선 산행을 우리 부부만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등반이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겠다 싶어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
그들이 앞서고 우리가 뒤를 따르기로 했다.
처음부터 시작이 만만치 않다.
평지가 아닌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길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평지가 나오는 좁은 길은 눈이 녹아 질퍽거렸고 미끄럽기도 간혹 물에 신발이 빠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트랙킹 코스가 쉽지 않다.
우리 앞에 가는 가족이 아니었더라면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었을 뿐 아니라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척 다행이었다.
우리의 기분을 더 상쾌하게 만드는 건 산을 오르는 내내 우리와 함께 했던 물줄기였다.
높은 산에 있던 눈이 녹아 내려오는 물줄기가 곳곳에 도랑을 만들어 졸졸 흐르고 있다. 그런데 그 양이 생각보다 많아 물줄기가 센 곳도 있다.
덕분에 물소리는 끝까지 계속 우리와 함께 해 청량함을 더 안겨준 것 같다.
산을 오르다가 중간중간 멈춰 뒤를 쳐다보면 절경이 따로 없다.
우리가 힘들게 걸어온 길의 풍경이 정말 장관이다.
비록 한발 한발 힘들게 걷는 트랙킹이지만 눈앞과 뒤 모두 절경이라 멈추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이 있나 싶다.
높은 산 위에 넓게 펼쳐진 초원이 나올 때마다 그곳에는 보라색 꽃이 만발하게 피어있다.
꽃의 이름을 그 가족에게 물어보니 불가리아어로 '민주하르(minzuhar)'라고 한다.
사전에 찾아보니 '크로커스 crocus'라고 하는 붓꽃과의 식물로 얼음이 녹자마자 눈을 뚫고 피어나는 꽃이라고 되어있다.
이렇게 험하고 높은 곳에서 역경을 이겨내고 자라는 아름다운 꽃이 있다니 삭막하고 황량한 풍경이 될 뻔한 이곳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니 귀한 보석이 따로 없다.
하지만 주변에 만발한 이 꽃들을 밟고 지나가야 하니 마음이 아팠다.
좁은 숲길을 걸어야 했음은 물론 눈이 녹아 질퍽한 길도 걸어야 했고 또 마치 캐녀닝(cayoning)처럼 물이 흐르는 돌길을 헤쳐 걸어야 하는 구간도 있었다.
더 위험한 것은 가파른 돌무덤길을 헤쳐 가야 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눈 위를 걸어야 하기도 했는데 발이 푹푹 빠져 내 무릎까지 다리가 눈에 잠긴 채 깊은 눈 속에서 걸어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광경은 점점 더 경이로워졌고 그야말로 장관의 연속이었다.
마치 걸으면 걸을수록 더 멋진 풍경을 보여줄 테니 어서 오라고 손 짓 하는 느낌도 들었다.
힘들고 어려운 트랙킹을 했지만 나에게는 최고의 트랙킹이었다.
산행을 하며 주변이 이토록 아름답고 황홀하도록 나를 만들어 준 산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다.
두 시간에 걸친 힘든 트랙킹은 결국 우리를 빙하 호수까지 안내했다.
높은 산에 이렇게 아름다운 호수가 숨어 있었다니...
우리가 만난 호수의 이름은 하트 모양의 'Muratobo lake'이다.
호수를 만나는 순간 숨이 멎을 정도의 아름다운 장관에 그대로 황홀감에 빠져버렸다.
잔잔한 호수는 너무 맑아 주변의 눈 덮인 산이 호수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고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호수에 그대로 빠져 있었다.
또 하나의 장관이 호수에도 떠 있는 모습이다.
볼 수록 아름다운 모습이다. 내내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자연의 선물이다.
고개를 돌리면 내 눈앞의 눈 덮인 산 높은 곳으로부터 물줄기가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연의 경이로움이란 게 바로 이런 건가 보다.
무릉도원이 바로 여기다.
우리는 호숫가에 앉아 돗자리와 간식을 꺼내 펼쳐놓고 잠시 쉬기로 했다.
우리 주변에서 내내 들리던 새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도 사라진 그야말로 무음상태다.
비렌 산 Muratobo lake에 흠뻑 빠져보기로 했다.
이런 멋진 풍경을 보기 위해 두 시간 내내 힘든 산행을 했는지 모르겠다.
험하고 때로는 위험했지만 그만큼 자연 그대로의 경이로움이 우리에게 전달된 시간이었다.
눈앞의 이런 장관을 만나니 올라오는 힘들었던 모든 과정들이 기억에서 지워져 버린다.
지금은 내 앞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 눈 덮인 멋진 산 그리고 놀랄 만큼 경이로운 자연에 온전히 나 자신을 맡겨본다.
오늘 내가 걸었던 길은 정말 가치 있는 길이었다.
내디뎠던 걸음걸음과 매 순간들이 내 마음속에 영원히 못 잊을 진한 발자국으로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