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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도 풍경이 되는 곳, 폐허가 된 체코의 보로틴

역사와 풍경이 만난 자리, 보로틴 마을

by 담소

우리는 체코의 보헤미아 남부에 머물고 있다.


숙소 근처 보로틴(Borotín) 마을에 폐허가 된 성이 있다고 해서 가보기로 했다.

14세기 중반 비텍(Vítek) 가문이 지었던 성이라고 한다.


보로틴 마을 가는 길.

길 양쪽으로 유채밭이 펼쳐졌는데 지금까지 보아 온 유채밭보다 더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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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차 드문 아름다운 시골길, 가로수 양쪽 길 옆 노랗게 핀 광활한 유채밭이 햇빛에 받아 더 눈이 부시고 띄엄띄엄 멋진 호수가 이어지니 폐허가 된 성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낭만적이어도 되나 싶다.

보로틴 마을에 주차를 하고 약 1.5km 거리에 있는 보로틴 성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봄 햇살이 넘실대는 좋은 날, 운동 겸 산책 삼아 걷기로 했는데 걷는 내내 초원 사이를 걷는 길이라 편안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체코의 보헤미아의 산책 길은 어딜 가도 완벽하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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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가까워 오니 멀리 우뚝 선 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커다랗고 두터운 벽이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성은 거대했다.

보로틴 성은 방어용 요새로 건설되었고 주변 습지와 연못에 둘러싸여 천연 요새 역할을 했던 성이었다.

하지만 1618~1648년에 있었던 30년 전쟁 중에 파괴되었는데 이후 재건을 하지 않고 전쟁 후 버려진 채 지금까지 그대로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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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양식의 궁이었던 이 성은 스타로자메츠키 연못(Starozámecký Pond)과 바비네츠키 연못(Babinec Pond)에 둘러싸여 있는데 주변 자연과 어우러져 아주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폐허가 된 성이라고 해서 거의 흔적만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커다란 원형 탑과 궁전의 일부가 남아있어 중세 성의 흔적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성이었다.

견고함과 웅장함마저 느껴지는 성이다.

성의 한쪽에는 여성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 동상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나 자료는 없었다.

마치 이 성을 보호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서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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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쪽으로 들어가자 잔디 광장에는 열댓 명의 어린 학생들이 있다.

잔디밭에 엎드려 책을 보는 아이, 공놀이를 하는 아이, 서로 몸을 부딪히며 노는 아이들...

저마다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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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터에서 야영을 하는 아이들

리더(leader)로 보이는 청년에게 물어보니 이곳에서 야영을 했는데 아이들은 스카우트 단원들이었고 어젯밤 성 내부의 땅바닥에서 잤다는 말에 무척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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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면 폐허가 된 궁엔 불을 밝힐 전기도 없을뿐더러 오월 초의 밤 날씨는 여전히 무척 춥고 어두웠을 텐데...

하지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도전하는 어린아이들의 모험심에 기특한 마음이 든다.

이어 리더는 학생들에게 종이 지도를 나눠주며 이 숲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보라고 한다.

이렇게 거친 자연에서 시간을 보내고 공부하며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는 이들의 교육방법이 우리의 교육 현장과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숙소에 처음 도착한 날, 숙소 주변을 돌아보는데 여기저기 사다리들이 놓여있어 의아해했다.

주인 아들 쿠빅(9세)이 사다리를 놀이 삼아 오르내리락 하고 있는 놀이기구였던 것이다.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서 놀기도 한다. 한마디로 놀이터다.


한국에서라면 위험하다며 사다리를 치울 법 한데 이곳에서는 오히려 사다리를 놓아주며 올라가라고 한다.

숙소 주인 예닉(Jenik)과 자녀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 본 적이 있다.

그는 여느 부모 못지않게 자녀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관심의 방향이 다른 것 같다.

자녀들에게 기본적인 생활 예의와 도리를 가르친 후에는 더 이상 부모가 자녀에 대해 계속 관심과 걱정을 쏟을 수는 없는 일이라며 아이들이 대부분의 행동을 독립적으로 하도록 교육한다고 한다.

반드시 예닉의 자녀 교육 방식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를 많이 되돌아보게 하는 대화였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책을 보며 공부를 하는 한국의 학생들의 현실이 떠올라 조금은 씁쓸했다.




보로틴 성을 둘러보는데 폐허가 된 성도 아름답지만 성에서 바라보는 보헤미아 시골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4월 말부터 5월 중순 사이의 기간이 보헤미아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기에는 최고의 시기인 것 같다.

푸른 숲의 파도를 지나면 다양한 색으로 물들여진 초원이 나타나고 초원 사이에는 아름다운 호수 그리고 호수를 중심으로 붉은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보로틴(Borotín)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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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유명한 시인 '카렐 하이네크 마하(Karel Hynek Mácha)'도 이곳을 방문한 후 작품에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풍경을 보고 있으니 동감이다.

저절로 시(詩)가 떠오를 멋진 풍경이 앞에 있으니 그 누군들 시인이 되지 않을까.

혹시나 그 시인의 시를 찾아보니 'Máj(5월)'은 성 주변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고 지은 시였다.


Máj(5월)

Byl pozdní večer – první máj –
Večerní máj – byl lásky čas.
Hrdliččin zval ku lásce hlas,
Kde borový zaváněl háj

늦은 저녁, 첫 번째 5월 –
저녁의 5월 – 사랑의 시간.
비둘기의 소리가 사랑을 부르며,
소나무 숲에서 향기가 퍼져 나갔다.

...


벤치에 앉아 한참을 내려다보는데 봐도 봐도 감동이다.

걸을 때나 차를 운전하며 다닐 때나 항상 보헤미아 지방의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하며 다녔는데 지금 이 풍경은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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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어보지만 눈에 보이는 지금의 풍경을 그대로 담을 수 없어 무척 속상하다.

그저 한참 동안 앉아 눈과 마음에 이 풍경을 담아두기로 했다.




보로틴 성에서 내려와 마을에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유일하게 문을 열고 있는 레스토랑을 찾았다.

보로틴광장.png 보로틴 마을 광장

시골에 머물다 보니 큰 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외식을 할 수 있는 곳이 아주 드물었고 문을 연다고 해도 운영을 하는 시간이 무척 불규칙해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전 8시부터 12시 30분까지만 한다든지, 오후시간에만 잠깐 연다든가 또는 요일에 따라 시간을 다르게 운영한다든지...

매우 유동적인(?) 그들의 운영에 우리 같은 관광객은 자주 허탕을 쳐야 했다.

사실 우리가 묵고 있는 이스테브니체 마을도 작은 마을이라 두 곳의 레스토랑이 있는데 한 곳은 주말만, 그리고 한 곳은 평일 오후에만 여는 곳이라 몇 차례 헛수고를 했던 적이 있었다. ㅎㅎㅎ

그 이유로 보로틴 마을에 있는 이 레스토랑은 몇 번 확인을 하고 왔기에 오픈 시간(11:30~14:00)에 맞춰 방문했다.

마을에 하나뿐인 그것도 두어 시간 잠깐 오픈하는 레스토랑이라 그런지 내부에는 주민들이 꽤 많다.

대부분의 테이블에 맥주 한 잔씩을 놓고 대화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낯선 사람들이 들어오니 눈길이 모두 우리에게 향한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분위기를 살피니 이들은 맥주 한 잔 씩을 미리 주문한 후 메인 요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체코의 레스토랑에 오면 항상 마실 것을 먼저 주문을 받는다.

그리고는 음료를 가져다주면서 애피타이저나 메인 요리를 주문을 받는 게 이들의 식당 문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메인 요리를 먹기 전에 맥주를 마신 다는 게 우리에겐 조금은 낯설게 다가오지만 맥주 강국의 체코에서만 이럴 수 있겠다 싶다.

우리도 이들과 같이 맥주를 주문하고 이어 소고기 수프 그리고 메인요리(닭다리 구이와 돼지고기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짭짤하고 조금 매콤한 소고기 수프는 먹을수록 당기는 맛이었다.

제법 양이 많았는데도 남기지 않고 다 먹고 나니 메인 요리를 먹기도 전에 배가 벌써 불러온다. 하지만 메인요리도 남기지 않고 모두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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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와서 참 잘 먹는 우리 부부다. ㅎㅎㅎ




오늘 우리가 방문했던 마을, 보로틴은 성벽 너머의 평온함과 중세의 고즈넉함을 느낄 수 있는 마을이었고 폐허가 된 보로틴 성은 무너진 돌무더기를 넘어 시간의 흔적, 역사의 침묵,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쓸쓸함(?)마저도 느끼게 하는 장소였다.

성의 폐허와 주변 자연이 만들어내는 아름답고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존재의 무상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크고 화려한 성은 아니지만, 오히려 조용하고 깊이 있는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울림을 주는 멋진 장소라는 생각을 해본다.


'보헤미아 시골 마을에 숨어있는 진주'라고 불러주고 싶은 마을이다.

자그맣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눈과 마음, 그리고 배가 충만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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