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맑은 새벽이다.
인도에서는 멀어졌는지 뿌옇던 공기가 깨끗해졌다.
오늘도 옥상에 올라가 조깅을 했다. 해가 뜨기 전에 하는 새벽 조깅은 나의 온몸을 상쾌하게 만들고 최고의 기분을 가져다준다. 사람도 몇 없고 주위 소음도 없는 이 넓은 공간에서 바다와 함께 걷고 뛰는 이 느낌은 기억하고싶은 순간이다. 조깅 후 수영을 하니 파도가 센 탓인지 수영장 물이 다른 날 보다 많이 출렁인다. 하는 수 없이 실내에 들어와 수영을 하고 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늘은 Sea day이다.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도 크루즈에선 다양한 이벤트가 있지만 며칠동안 도시를 여행한 탓인지 내 몸에서는 오늘 하루는 편히 쉬라는 신호를 보낸다.
아침 식사를 하고 오니 여전히 방은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다. 우리가 방을 비울 때마다 들어와 청소를 해주고 사라지는 직원들! 그들을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크루즈의 우렁각시라고나 할까!
하지만 2층으로 된 침대가 가득히 채워진 비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크루즈 직원들의 숙소를 보게 된 후로는 고마운 마음과 함께 불편한 마음이 함께 온다.
그들은 우리를 볼 때마다 항상 웃으며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네고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봉사를 하고 있지만 열악한 환경에서 고되고 힘든 생활을 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도 드는 건 사실이다.
기분좋은 불편함일까?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큰 아들에게서 문자가 왔다. 한동안 연락을 안 했더니 궁금했는지 먼저 소식을 묻는다. 노는 사람이 더 바쁘다는 말이 맞긴 맞나 보다. 두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많이 보고 싶다. 한국엔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한다. 매서운 추위도 함께 왔다니 생활하는데 불편은 없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둘째아들은 며칠 전 부모 배웅없이 논산 훈련소 입대를 했다. 아들 군입대가 마음에 걸려 여행을 미룰까 많이 망설였지만 괜찮다는 작은 아들의 이해와 배려에 결국 우리 부부는 크루즈에 올랐던 것이다. 두 아들에게 많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다.
가슴 한 켠에 무거운 마음을 품은 채 며칠 동안 못 읽고 있던 책을 들고 데크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 그리고 파도소리와 어울려 읽는 책 읽는 시간이 답답했던 나에겐 힐링 그 자체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라는 일본 작가의 책을 며칠 째 읽으면서 진정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를 깊게 생각한다. 내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게 무언지. 정말 나에게 소중한 건 무언지... 이 것들을 위해 나머지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저자의 글 들이 많은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 들과 얽혀 살고 있다. 사람들과의 관계, 놓을 수 없는 업무 그리고 소장하고 있는 물건들과의 애착 등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에 파묻혀 살아가면서 정작 나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나는 어디에 있는지, 심지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 매 시간 남들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과감해질 필요가 있고 끊어야 할 관계들, 버려야 할 많은 것들이 있다.
나도 이 여행이 끝나면 정리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그러면 정작 나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이며 타인과의 비교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바람이 차갑게 느껴져 시계를 보니 어느 새 저녁시간이 다 되어간다. 몸을 덥히려 카페에 들러 레몬이 들어간 진저 티를 마시니 금세 훈훈해진다.
저녁식사 메뉴로 랍스터를 주문했다. 한국에선 가격이 비싼 탓에 자주 먹지 못하는 음식을 이곳에서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입맛이 다셔진다. 게다가 먹기 편하도록 웨이터가 와서 살만 발라서 꺼내 준다. 나에게 어찌 이런 호사가 있단 말인가!
메인 식사가 끝나자 웨이터는 내가 디저트로 케이크와 화이트초콜렛모카를 부탁하는 걸 기억하고는 항상 미리 준비해준다.
여행이 끝나고 나서도 이런 대접을 기대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도 된다.
식사가 끝나고 룸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방 청소를 맡고 있는 직원이 웃으며 묻기를 랍스터 맛은 어땠냐고 묻는다.
아! 우리 저녁식사 메뉴까지 이들은 알고 있는 건가?
승객들을 위한 이들의 친절의 끝은 어디일까?
콘서트 홀에선 "The Rat Pack Dolls"라는 여성 트리오 보컬의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부르는 곡이 내 취향이 아니라 중간에 나오고 말았다.
바람을 쏘이고 싶어 야외극장이 마련된 옥상으로 영화를 보러 올라갔다.
푹신하고 널찍한 소파에 앉아 달콤한 칵테일을 곁들이며 본 영화는 단숨에 끝이 났고 춥지만 않다면 동이 트는 새벽까지 앉아 있는 이 자리에서 그대로 잠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별 총총한 밤하늘과 바람 그리고 영화!
갑자기 윤동주 시인의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생뚱맞게 떠오른다. ㅎㅎ
내일은 다시 중동으로 간다. 두바이다.
두바이는 내게 어떤 도시로 다가올지 궁금함과 기대가 나를 설레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