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서북부 여행 6 : 시테섬에서 놀다.
우리 부부의 파리 방문은 낭만과 예술을 쫓는 감성의 여행이면서 또한 문화와 역사를 밟아가는 이성이 함께 하는 여행이길 바랬다.
세계 어느 나라 보다도 멋진 도시임을 자부하는 파리, 하지만 파리에서 단순히 멋과 낭만으로 소중한 시간을 채우기엔 다소 아쉬움이 남을 듯했다. 파리는 화려한 궁정문화와 귀족 문화가 번창한 곳이었지만 또한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스며 있는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파리의 곳곳을 방문하면서 과거의 흔적들을 조금이라도 느껴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파리의 근원지이며 파리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시테섬(IIe de la Cite)'으로 향했다. 즉 시테섬은 파리의 시발점이자 프랑스의 기원이 되는 장소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파리의 행정구역은 센 강의 오른쪽을 시작으로, 파리 시 중앙에서부터 바깥쪽으로 시계 방향의 달팽이 껍데기 모양으로 20개 구(區)가 배치되어 있는데 시테섬은 파리의 가장 중심(1구, 4구)에 위치한 섬으로 여전히 파리의 코어(core)이다.
노트르담 성당 관람을 마친 우리 부부는 파리 센 강에 둘러싸여 있는 '시테섬(IIe de la Cite)'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시테 섬이 도시로 틀을 잡게 된 과정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가 쓴 '갈리아 전쟁기(Commentarii de Bello Gallico)'에 나오는 내용, 즉 기원전, ‘시테섬’에 ‘파리시(Parisii)’족이 살았으며 이로 인해 '파리'란 이름도 탄생된 것이라는 설이 일반적 이론이다.
그러다가 6세기 초 파리가 프랑크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시테 지역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 왕들이 베르사유 궁으로 떠나면서 이 섬은 프랑스의 사법 중심지가 되었으며 프랑스혁명에서 귀족들의 재판 장소가 된 곳이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자 이 섬은 좁은 거리와 열악한 위생 시설, 그리고 모여든 많은 사람들로 살기에 과밀한 구역이 되었고 그 결과 전염병 콜레라가 번져 수천 명의 파리 사람들이 죽는 큰 타격을 받았다.
결국 나폴레옹 3세는 오래된 거리와 낡은 건물들을 철거하고 넓은 길을 조성하도록 했으며 광장을 개방하라는 명령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나폴레옹 3세에 의한 도시 재건과 복원이라는 새로운 노력으로 시테섬의 모습은 점점 사람답게 사는 섬으로 변해 갔던 것이다.
시테섬은 한국의 여의도 크기에 비해 매우 작은 섬이다. 하지만 'cite'라는 단어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시'라는 뜻을 가진 이 자그마한 섬의 내부에는 파리의 많은 상징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시테섬엔 아름다운 공원을 배경으로 노트르담 성당은 물론 생 샤펠 성당, 그리고 경찰청 청사, 콩시에르주리(la conciergerie), 법원 등의 공공기관이 있으니 말이다.
이렇듯 이젠 시테섬은 파리 관광의 중심지라고도 할 수 있는 장소가 되어 언제 어느 장소든 관광객으로 북적거리는 게 당연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잠시 북적거림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시테섬에서 가장 한적한 곳을 찾아가라면 바로 시테섬 끝자락에 있는 베르갈랑 공원(square du vert-galant)이다.
다행히 공원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센 강과 바로 맞닿을 듯한 끝자락까지 걸어가니 커다란 버드나무 한그루가 어서 오라며 푸른 잎들을 흔들어 댄다.
젊은 시절을 파리에서 머물렀던 헤밍웨이도 포도주와 빵, 그리고 소시지를 들고 자주 베르갈랑 공원을 찾아와 책을 읽으며 휴식을 취했겠지?
점심식사를 마친 우리 부부도 헤밍웨이가 했을 듯한 흉내를 내 본다.
결코 화려한 음식이 아닌 저렴한 와인과 샴페인 그리고 사과 몇 개를 펼친 보자기에 올려놓고 잠시 앉아 흘러가는 센강을 쳐다보며 꿀맛 같은 휴식을 갖는다.
왜 이 공원을 파리 시민들이 숨겨놓은 공원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섬 모퉁이 끝자락 조용한 곳에 앉아 부드러운 봄바람 햇살 그리고 흐르는 강물과 와인...
내가 바라는 휴식에 뭐가 더 필요할까?
헤밍웨이도 이곳에서 이런 휴식을 가졌을까?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우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소장하고 있는 생 샤펠 성당(Saint Chapelle)을 방문하기로 했다.
긴 줄이 있는 사람 뒤에 서서 입장을 기다렸는데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어보니 우리가 서 있는 줄은 생트 샤펠 성당 입구가 아니라고 한다.
아차! 이곳이 성당의 입구로 착각하고 줄을 서서 기다렸던 것이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법원에 볼 일이 있었던 파리 시민이었던 것이다.
법원 단지는 시테섬의 1/5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프랑스 최고 법원이 포함된 대규모의 법원 단지로 워낙 규모가 크다 보니 생 샤펠 성당의 입구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생 샤펠 성당 입구는 법원 옆쪽에 입구가 따로 있었다.
잠시 커다란 법원 단지를 둘러보니 '콩시에르주리(la conciergerie)'가 눈에 들어온다.
가슴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있는 콩시에르주리(la conciergerie)!
궁전으로서의 역할이 바뀌어 감옥으로 변해 프랑스혁명 기간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한 2,780명의 죄수들이 수감되어 형을 선고받은 후 단두대에 의해 처형되기 전 머물렀던 장소였다. 문득 그 당시의 온갖 악취와 함께 절망의 울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백발마녀'가 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같은 건물 지하 감옥에 있는 그녀의 자식들이 공포에 떨고 우는 소리를 매일 밤 들어 머리가 하얗게 되어 버렸다고 한다. 엄마로서의 고통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녀는 사십여 일 동안 이곳에 머물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10대의 어린 소녀시절부터 낯선 이국땅에서 멸시와 조롱을 참으며 왕비로 지내야 했던 그녀.
프랑스의 재정이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도 나라의 왕비로서 책임을 질 줄 몰랐던 그녀,
발을 밟힌 사형수에게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단두대에서 사라졌던 그녀.....
왜 그렇게 비운의 왕비로 비참한 생을 마감하게 되었을까? 시대를 잘 못 태어난 걸까?
오늘따라 웅장한 건물이 무척 고독하고 어둡게 다가온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생 샤펠 성당(Sainte Chapelle)을 방문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을 때 이마에 둘려 있던 가시관을 보관하기 위해 루이 9세가 특별히 지은 성당이다. 특이한 것은 신분에 따라 1층과 2층으로 나뉘어 1층은 평민들이, 2층은 왕과 귀족들이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럴까? 2층으로 올라가서 마주한 스테인드 글라스는 확연히 눈부시게 화려했다.
2층으로 들어오는 순간 앞이 탁 트인 느낌이 든다.
실내가 다소 어둡지만 이 역시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의 매력을 더 누리게 해 주려는 의도인 듯싶다.
2층 내부에 들어서면 먼저 정면에서 S자 모양 곡선으로 불꽃무늬를 이루고 있는 화려한 플랑브아 양식의 장미의 창이 날 매혹시킨다. 더불어 스테인드글라스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장미의 창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하지만 노트르담 성당에서 마주한 장미의 창과는 전해져 오는 감동이 다르다.
아마도 생 샤펠은 화려하고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실내 전체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있는 장미의 창은 상대적으로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도 든다.
빛이 들어오는 양에 따라 스테인드글라스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한다. 정말 그런 걸까?
어둠에 익숙했던 중세인들은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면서 햇빛과 함께 찬란히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성스러운 상들을 보며 황홀감에 빠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행히 우리가 방문했던 날은 햇살이 많은 맑은 날이었고 따라서 그 말대로 빛의 정도에 따라 분위기의 차이를 느껴보려 노력했다.
아니나 다를까, 햇살에 비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이곳이 '파리의 보물'로 불리는 이유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무려 천여 개가 넘는 성경의 내용이 섬세하게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되어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종교인이라면 내용과 그림들을 연관 지어 감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렇게 화려해도 되나 싶다.
과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으로 장식된 성당이라는 말이 실감이 간다.
이어서 시테 섬에서 다리 하나 건너면 바리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관공서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파리 시청(Hôtel de Ville)으로 향했다.
시청 건물의 외관이 무척 화려하며 광장의 풍경은 매우 여유롭고 아름답다.
무시무시한 기요틴을 설치하고 교수형과 화형을 집행했던 장소라는게 믿어지지 않는다.
파리 시청은 1535년부터 시작해서 1551년에 일부가 완성되었고 나머지(북쪽)는 1605년에 짓기 시작해서 1628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프랑스혁명 당시 Hotel de Ville은 프랑스혁명의 본부였고, 이후 파리 코뮌의 본부이기도 했다. 프랑스 정부의 패배가 점점 임박하고 프랑스 군대가 건물에 접근했을 때, 프로이센에 항복을 원하지 않았던 코뮌 지지자들은 Hotel de Ville에 불을 지르고 건물과 거의 모든 도시 기록 보관소를 파괴했다.
그 후 베르사유에 피해있던 정부는 다시 이곳에 와서 재건을 하게 된다.
파리 시청 외관에는 수백 명의 파리 유명인사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내가 아는 몰리에르와 볼테르가 있었다. '계몽주의를 이끌었던 이들이 파리 시청을 장식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라는 생각도 해본다.
갑자기 먼 곳에서 울리는 성당 종소리가 이곳까지 들린다.
한마디로 매력적인 건물이다.
관공서도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싶은 마음에 파리 시민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영화였던가?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됨을 알리는 음성이 들리자 거리와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얼싸안으며 키스를 하는 장면이 스쳐간다.
그리고 갑자기 로베르 두아노의 사진 "시청 앞 광장에서의 키스"가 스친다.
혹시 그는 그 상황을 떠올리며 이 사진을 찍은 건 아닐까?
누군가는 그 사진이 철저하게 의도된 사진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매력적이다.
그의 이 흑백 사진 한장으로 로베르 두아노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까지 만들어지게 된다니 그가 찍은 사진의 영향력이 정말 놀랍다.
사진의 영향일까?
시청 광장엔 짝을 지어 다니는 연인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가 파리 시청 광장을 방문한 건 이곳에서 로베로 두아노의 사진처럼 키스를 하려고 방문한 건 물론 아니다.
시청 광장의 가로등을 가운데 두고 사진을 찍는 걸로 충분히 만족했다. ㅎㅎㅎ
소설가 헤밍웨이는 청년시절 23세부터 7년 동안을 파리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쿠바에서 머물며 젊은 시절 파리에서 지냈던 추억을 회고록으로 집필했다.
파리에서 무명으로 춥고 힘들게 살았던 7년 동안의 삶을 그는 이 회고록에서 '파리에서의 축제'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을 파리에서 보낼 수 있는 행운이 그대에게 있다면, 당신이 어느 곳에서 살던 파리는 이동하는 축제가 되어 평생 당신 곁에 축제하듯 머물 것이다.(If you are lucky enough to have lived in Paris as a young man, then wherever you go for the rest of your life it stays with you, for Paris is a moveable feast.)"
어렵고 힘든 파리에서의 젊은 시절을 왜 ‘축제’(feast)'라고 표현했을까?
파리에서의 어떤 삶들이 헤밍웨이에게 축제로 여겨졌을까?
아마도 조금 전 우리가 방문했던 베르갈랑 공원에서의 한가로운 휴식, 그리고 자주 들러 책을 읽고 사갔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도 파리에서의 축제 중 하나였으리라.
이해 못 했던 그의 책 내용이 이제야 서서히 마음속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가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젠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 Shakespeare & Co.)'를 방문하려 한다.
그렇다고 우리 부부가 파리에 머물며 헤밍웨이의 자취를 쫓으려는 건 아니다. 다행히도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다리만 건너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 파리에서의 추억을 '축제'라고 말한 것처럼 오늘 나는 '시테섬에서의 축제'를 경험했다.
예술과 성스러움이 조화된 건축물을 마주할 수 있어서...
마리 앙투아네트와 로베르 두아노 그리고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어서...
그리고 무엇보다 센 강을 보며 아름다운 공원에서 멋진 쉼을 갖게 해줘서 행복했다.
이렇게 시테섬은 내 생애의 화양연화 한 컷이 되어 주었다.
헤밍웨이가 '파리는 언제나 이동하는 축제'라고 했듯 남은 생 동안 나의 곁에서 파리는 영원히 아름다운 축제로 머물게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