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러 가는 좁고 한적한 이 시골길은 노르망디로 가는 드라이브 코스 기점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길이다. 시골 풍경은 '지금은 5월이야'하고 자태를 드러내듯 온통 주변이 초록이다.
La Roche_Guyon 가는 시골 풍경
이 길이 얼마나 아름다왔길래 모네와 르느와르는 이 길과 마을을 그림으로 남겼을까?
자동차로만 계속 달려도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길이다.
그림 르느와르의 land scape of La Roche_Guyon 풍경 과 모네의 La Roche_Guyon 가는 길
20여분 운전을 했을까?
발두아즈(Val-d'oise) 지역 마을의 일부인 일 드 프랑스의 끝 마을 '라 로쉬 기용(La Roche_Guyon)'을 잠시 둘러보기로 했다.
프랑스에서 선정한 가장 아름다운 소도시 중 하나이며 인구가 약 600여 명 남짓한 이곳은 그야말로 작은 시골 마을이다.
하지만 마을 한가운데는 중세에 세워진 역사 깊은 웅장한 성이 있고 성 주변에는 아름다운 과수원(수목원)(Potager-Fruitier)이 있어 파리인들이 근교의 휴가지로 자주 방문하는 곳이라고 한다.
길 옆 석회암 절벽을 파내고 만들어진 동굴은 아직도 교회나 와인 저장소로 이용되고 있어 독특한 인상을 풍긴다.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듯한 장소도 있다.
라 로쉬 기용 광장부근과 그림 피사로의 A Square at La Roche- Guyon
마을 중심가라고는 하지만 매우 한적한 곳이다.
잠시 차를 세우고 거리를 산책해보기로 했다.
오월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싱그러운 연둣빛 담쟁이덩굴이 따뜻한 햇살과 함께 나에게 상큼한 기운을 준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눈앞에 거대한 성이 보인다.
Château de La Roche-Guyon이다
성 La Roche- Guyon
조그마한 이 시골마을에 이렇게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성이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 고성은 화려하게 장식된 건축물이라기 보다는 예스러운 풍취가 합해져 우아하고 고고한 운치로 나에게 다가온다.
성 뒤편에는 높은 원형탑이 우뚝 솟아있는데 무척 신비로운 분위기를 뿜어내며 마치 웅장한 바위에 박혀있는 듯 하다. 많은 사연과 비밀이라도 갖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원형탑(Donjon)이 반쯤 잘려 보인다. 그 이유는 프랑스혁명 당시 반군이 이곳을 사용할 것을 우려해 감시탑이었던 이 원형탑을 프랑스 정부가 파괴했기 때문이란다.
절반이 파괴된 탑인데도 저렇게 거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원래의 모습은 무척이나 웅장하고 위엄을 풍겼을 듯하다.
이 성 역시 조금 전 오는 길에 보았던 동굴 형태의 저장소처럼 거대한 하얀 석회암 절별에 반쯤은 박혀 있다. 오히려 석회암 절벽에 기대어 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새하얀 석회석 절벽과 함께 있는 크고 웅장한 이 성(Château de La Roche-Guyon)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숨어 있을까?
무려 1000여 년 동안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여전히 지금의 우아하고 고상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이 새삼 위대해진다.
성 입구에 쓰여진 안내문을 읽어보았다.
이 성은 12~13세기경 지어졌으나 14세기에 재건되었고 17세기부터는 오랫동안 프랑스 작가로 활동한 라 로쉬푸코(La Rochefoucauld) 가문의 소유였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롬멜 장군(Erwin Rommel)'이 연합군을 방어하기 위해 이 성에 들어와 사용한 탓에 당시의 주인이던 라 로쉬푸코 가족들은 2층을 사용해야만 했다고 하는데 특히 롬멜은 폭격을 대비해 동굴을 파고 벙커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이렇듯 중세에는 요새와 감옥으로, 18세기에는 마구간으로도 그리고 20세기에는 전쟁을 위한 롬멜 장군의 본부로 사용된 이 성은 많은 사연과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흔적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성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성 안으로 들어가려니 성문이 굳게 닫혀있다.
아! 어쩌면 좋을까, 우리가 도착한 날은 하필 휴관이었던 것이다.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이 아름다운 성을 내부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저 밖에서 눈으로 보고만 가야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신 우리는 라 로쉬 기용 성에 딸린 수목원(Arboretum de la Roche-Guyon)을 들러 보기로 했다.
도시 삼림 및 생물 보호 구역을 관리하는 프랑스 정부기관(Office national des forêts, ONF)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이 수목원은 309 hectare(약 9만 평)에 이르는 규모의 수목원으로 1990년 경에 만들어졌으며 1800여 개의 나무가 있다고 한다.
규모가 적지 않은 수목원인데도 참 예쁘게도 가꾸어 놓았다. 정성을 쏟은 흔적이 느껴진다.
이 수목원의 설계는 일 드 프랑스(le-de-France)를 상징하는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에손 지방의 메이플 나무(maples for the Essonne), 오드센 지역의 참나무(limes and laurels for the Hauts-de-Seine) 등 프랑스 북부 지역을 상징하는 나무들을 심어 놓았다고 한다.
수목원을 걷다 보니 단풍나무, 월계수,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보이고 또 이름 모를 많은 나무들과 함께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심어져 있다.
서양식 정원답게 나무가 자로 잰 듯 반듯이 잘려있고 배열도 규칙적이다.
프랑스 시골 작은 마을에 딸린 이 거대한 수목원을 보호하고 관리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에서 많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열정을 쏟고 있음이 느껴져 흐뭇하고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프랑스 사람들이 콧대가 높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ㅎㅎ
수목원 뒤쪽 푸른 잔디밭 옆으로 센 강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이 센 강을 돌면 바로 노르망디 지역으로 들어서게 되고 모네의 정원이 있는 '지베르니 Giverny)에 도착한다.
파리 시내를 흐르던 센 강의 분위기와는 많이 다르다.
며칠 전 보았던 파리의 센 강이 도도한 자태로 파리 한가운데를 힘차게 가르는 활기찬 젖줄처럼 느껴졌다면 지금 라 로쉬 기용에 흐르고 있는 이 센 강은 라 로쉬 기용의 굴곡진 역사의 흔적들을 다 품은 채 성숙한 자태로 여유 있게 유유히 흘러가는 평화로운 여행을 하는 듯 보인다.
이 센 강도 우리처럼 루앙을 거쳐 영불해협까지 가는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변을 걷다 보니 잔디밭에 학생들과 교사들, 그리고 학부모들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 봄소풍을 나왔나 보다.
잔디밭 풍경을 보니 문득 수십 년 전 나의 초등학교 소풍 장면이 떠오른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나 외국이나 어린 학생들의 소풍엔 항상 부모님이 함께 따라오나 보다.
하지만 맞벌이를 하셨던 나의 부모님은 나와 함께 소풍을 간 적이 없었다. 그때 나는 엄마가 함께 따라온 친구를 많이 부러워했는데....
지금은 아스라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잔디밭에 앉아 여유롭게 즐기는 학부모들이 마냥 편안해 보이고 언제라도 어느 곳에서든 아름다운 자연과 쉽게 함께 할 수 있는 이곳의 아이들이 행복해 보인다.
우리는 이제 일 드 프랑스(Ile-de-France) 지방을 벗어나 프랑스 북서부를 향해 노르망디(Normandie) 지역으로 간다.
그 첫 번째 마을이 바로 지베르니(Giverny) 마을이다.
지베르니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외르 주 (Eure)에 속한 작은 마을로 지베르니 마을과 함께 따라다니는 대명사가 '모네의 정원'이다.
마을에 도착해보니 마을 전체가 하나의 식물원 처럼 느껴졌다. 골목마다 주택의 담장이며 길가가 온통 초록으로 덮여 있다.
모네는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지베르니라는 마을을 눈여겨보았고 결국 이 마을에 정착을 하기로 한다.
마을을 여기저기 걷다 보니 그럴만하기도 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프랑스의 많은 예술가들이 정착하고 싶어 하는 마을이라고도 했다던데 고개가 끄덕여진다.
머물고 싶은 마을, 저절로 걷고 싶은 길이다.
사색의 공간, 쉼의 공간...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골목길에는 살랑살랑 봄바람만이 내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다.
지베르니 마을길
이런 길을 걷다 보면 모네가 가꾼 정원과 집이 나온다.
모네의 집 Maison de Claude Monet
모네는 1883년부터 43년간 지베르니(Giverny)에서 살면서 집을 개조했고 아울러 그가 원하던 정원을 만들었다.
사실 모네는 화가이기 전에 정원사로 식물을 직접 키우며 식물의 종류와 그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던 화가였다고 도 한다.
"나에게 그림 그리는 것과 정원 가꾸는 것을 빼고는 좋은 것이 없다."라는 말을 하고 다녔을 정도니 말이다.
심지어는 그가 오랫동안 외출을 할 때는 정원사에게 "300 화분의 양귀비꽃과 60 화분 정도의 스위트피 씨를 뿌리고 블루 세이지와 파란색 수련을 심어주세요, 달리아는 심은지 보름쯤 되었을 때 새잎이 올라오면 잘라서 온실에서 다시 재배시켜주세요." 이렇게 부탁을 했다고 하니 그가 정원에 얼마나 많은 지식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가 하필 왜 정원에 관심을 갖고 직접 만들기까지 했던 것일까?
아마 자연을 둘러싼 야외에서 주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화가 중에서 야외에서 그린 그림이 제일 많은 화가가 모네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모네의 친구였던 귀스타브 제프루아 (Gustave Geffroy)의 말에 따르면 모네는 정원을 그림의 소재로 쓰려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빛'!
심지어 '빛이 곧 색이다.'라고도 주장했던 모네는 순간순간 변하는 찰나의 색을 표현하는데 정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스스로 정원을 만들기로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정원은 모네가 자신의 그림을 구현하기 위한 필요로 조성된 계획된 작품이었구나...!
이 정원은 모네가 죽고 난 후 부인에게 남겨져 관리되었고 그녀의 사후에는 한참 동안 방치된 집과 정원이 베르사유 궁전의 큐레이터였던 Gérald Van der Kem에 의해 복원되었다고 한다.
이후 다행히 모네 재단 (Fondation Claude Monet)이 설립되고 이를 매우 잘한 일이라고 파리인들이 칭송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지베르니에서 모네의 정원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담쟁이덩굴이 모네의 집 담을 덮어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이 정원과 잘 어울릴 뿐 아니라 정원을 더 풍성하게도 해주는 느낌이다.
드디어 모네의 정원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아~~!!
5월의 꽃 향기가 물씬 풍겨오고 눈이 부신 색들로 뒤덮인 정원은 그야말로 자연의 화려한 사치로 느껴질 정도였다.
정원을 들어서자마자 나의 오감이 벌써 들썩인다.
봄 계절에 맞추어 심어놓은 수많은 화려한 꽃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거리니 마치 천국에 들어온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새초롬하지만 포근한 색상의 분홍색의 튤립, 수줍은 듯 피어있는 보라색 라벤더, 시골 마을의 색시 같기만 한 연분홍의 라일락, 강인함을 자랑하고 뽐내는 듯 강렬한 색상의 주황과 노란색들의 이름 모를 꽃들까지 헤아 릴 수도 명명할 수도 없는 많은 다채로운 꽃들이 뒤섞여 우리를 환영하고 있다.
자연의 빛이 무한정 비춰주는 정원의 수많은 나무와 꽃들로부터 모네는 원하는 색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믿었을까?
아마도 그는 작품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빛'을 표현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색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렇게 다양하고 화려한 색들로부터 색채에 대한 많은 경험과 지식을 얻었나 보다.
결국 그는 색채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정원을 꾸며 꽃들로부터 얻었던 것이다.
정말 모네는 화가이자 뛰어난 정원사였음에 틀림없다.
지베르니의 정원을 감상하다 보니 이 공간 안에 동양의 정원과 함께 서양식 정원의 분위기가 한 공간에 녹아 있음을 느필 수 있었다.
과하게 손이 가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표현한 동양식 정원의 느낌이 한편에 존재하고 있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식물들을 줄 세운 듯한 정확하고 계산된 서양식 정원의 느낌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정원이란 자연을 그대로 옮긴 규모가 작은 자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베르니의 정원을 막상 마주하고 나니 상당히 계획적으로 꾸며진 인위적인 느낌이 강한 공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모네가 정원을 만든 이유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도 같다. 우리가 미술시간에 그리는 정물화도 꽃병과 과일의 위치와 꽃의 모양 등 정확한 구도를 맞추어 놓은 후 그리기 시작하는데 하물며 모네 역시 그가 정원을 만들 때에도 그의 그림을 위해 치밀한 계획과 계산이 포함되는 건 당연한 게 아니었을까?
안타깝게도 모네는 백내장 판단을 받은 후 그는 분홍색이 흐리고 생기 없게 보이며 중간색이나 옅은 색은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한눈에 보아도 이쪽 정원은 서로 대조적인 색상의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있음을 알 수 있었다.
노랑과 주황, 빨강과 노랑, 흰 색과 빨강, 노랑과 검정 등 모네가 이렇게 색의 대비가 강한 꽃들을 배치한 이유는 화가에게 치명적인 백내장이 생긴 그에게 흐릿하게 보이는 색감을 좀 더 확실하고 선명한 색상에서 찾으려는 그 나름의 처절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백내장으로 고통을 겪으며 모네는 다양한 색상의 꽃들을 계획적으로 피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했을까?
'색은 하루 종일 나를 집착하게 하고, 즐겁게 하지만,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라고 호소한 모네!
백내장으로 인해 완성된 정원을 그리는 일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텐데 정원을 직접 가꾸며 작품을 탄생시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지베르니 정원을 통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모네가 백내장을 앓고 있기 전 그림들과 백내장 투병 중 그린 그림
지하 차도를 건너면 정원 안에 또 다른 작은 도랑이 있다.
모네는 지베르니에 흐르는 강 물길을 자신의 땅으로 가져와 만들었다고 한다.
도랑 옆에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리 키가 크지 않은 대나무이다. 아마도 아담한 정원을 꾸미기 위해 작은 것을 골라 심었나 보다.
은밀하면서도 신비감마저 느끼게 하는 이곳에서는 일본풍의 정원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큰 나무가 있으면 바로 옆에 작고 풍성한 나무가 있으며 또 그 아래에는 화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정원 한쪽에 이렇게 도랑이 흐르니 정원의 또 다른 매력이 있다.
특히 모네는 정원에 연못을 만들었고 그 위에 초록색 다리를 띄웠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일본 다리'이다.
지베르니 정원의 초록색 다리와 모네 그림 Water Lily Pond (The Japanese Bridge)
19세기 당시 프랑스에 일본 문화가 도입되었고 모네가 일본의 화풍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다고 하니 그는 이 정원을 동양적으로 꾸밀 생각이었나 보다.
대나무와 개울, 그리고 연못과 다리.
참선을 중요시해서 차(茶)와 정원 문화가 발달했다던 일본. 문득 오래전 일본 여행 시 방문했던 아다치 정원이 떠오른다.
일본의 아다치 정원(좌측)과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
잠시 앉아 연못 위에 떠있는 수련을 보니 수련의 둥근 원형과 치렁치렁 아래로 길게 뻗은 버드나무의 기다란 모양이 함께 모여있어 마치 가로와 세로가 한 곳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듯 보인다.
모네의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벽과 바닥, 그리고 가구들이 파스텔 색들로 단장되어 여전히 정원의 꽃들과 함께 있는 기분이다.
창을 통해 정원을 내려다보니 모네의 정원은 한눈에 전체를 내려다보는 정원이 아니라 직접 꽃들에게 다가가 하나하나 꽃들을 만나봐야 할 것 같은 정원이라는 느낌이다.
비록 몸은 힘들수 있어도 꽃들을 보는 마음과 눈은 힐링일 테니까 말이다.
이런 게 바로 모네의 정원에서 느끼는 나의 소소한 행복이기도 하다.
모네의 집(Maison de Claude Monet)내부
내부에서 본 정원
오늘 만난 모네의 정원은 단순히 그의 예술 표현을 위한 소재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그저 평범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흔한 꽃밭이 아니었다.
그의 혼이 담긴 '살아 움직이는 수채화'였으며 정원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작품이었다.
그의 그림들은 물론 집과 정원까지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선물을 남기고 모네는 떠난 것이다.
"정원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이다."
모네의 이 말이 종일 내 마음에서 맴돈 하루였다.
문득 아파트 베란다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 집 화초에 모네의 정성만큼은 아니더라도 사랑을 듬뿍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