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번의 말보다 더 의미 있는 것
백문이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요즘 아들이 자꾸 시를 쓴다.
처음엔 학교 국어시간에 있었던 해프닝이었다. 수업시간에 시화 만들기 활동을 하는데 쓸 말도 없고 생각도 안 나서 힘들었다는 아들. 그래서 시 쓰기 싫은 자기 마음을 시로 썼다고 한다. 그런데 친구들이랑 선생님이 은근히 잘 썼다고 칭찬해 줬다는 것. 기분이 좋았는지 며칠 동안 시 이야기를 하더니 학교에서 만든 시화작품을 가져와 거실에 떡 하니 올려두었다.
"엄마, 나도 할아버지처럼 시인할까?"
"응? 시 쓰는 일 하고 싶어?"
"시 쓰는 게 재밌어서. 뭐 나도 꽤 재능이 있는 것도 같고."
몇 년 전 퇴직하신 아빠는 취미활동으로 시를 쓰신다. 정확히 말하면 시문학을 배우러 다니신다. 어렸을 적 꿈이 선원이었다는 아빠. 배를 타고 넓은 바다를 항해하면서 시를 쓰는 것이 로망이었다고 가끔 말하시곤 하셨는데, 30년 넘게 일하시고 퇴직하고 나서야 그 꿈을 이루셨다. 시문학반 수업을 들으면서 과제로 써낸 시들을 모아서 지역 축제가 열릴 때면 전시회를 연다.
할아버지 전시회를 보러 몇 번 가봤던 아들은 할아버지의 직업이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시인에 대한 낯섦이나 거부감이 없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엊그제는 엄마를 닮은 인형이 있다며 그 인형을 주제로 시를 써왔다. 엄마 아빠 앞에서 시를 낭송하며 뿌듯해하는 아이를 보니 참 신기하기도 하고 보고 자라는 환경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들의 또 다른 취미활동 꽃 수집. 봄이라 지천에 깔린 꽃들을 보면 예뻐서 집에 가져가고 싶어 한다. 차마 꺾진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 꽃들을 매일 주워온다. 문제는 가져올 땐 나름 싱싱했던 꽃들도 하루 이틀만 지나면 부스스 말라 시들어버린다는 것.
"엄마, 나도 할머니처럼 꽃을 예쁘게 보관하고 싶어요."
"뭐 하려고?"
"꽃을 넣어서 편지지 만들려고요."
그렇게 시작된 할머니의 압화 원격수업. 꽃을 주워온 날이면 할머니께 전화를 걸어서 어떻게 말리는지 물어봤다. 우리 집엔 제대로 된 도구들이 없으니 간단히 휴지 여러 겹 위에 꽃잎을 잘 펴서 올린 다음 무거운 책으로 꾹 눌러놓았다. 꽃에서 진물이 나오는 경우에는 휴지를 매일 갈아줘야 한다는 할머니 말에 지극정성으로 꽃을 눌러 말리는 아들.
덕분에 내 책들은 다 꽃잎투성이가 되었다.
전화수업이었기에 압화는 30퍼센트의 성공. 할머니가 한 것처럼은 예쁘게 안되지만 그래도 오래 보관할 수 있다며 아들은 좋아했다. 그리고 이번에 할머니가 집에 방문하셔서 드디어 오프라인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라일락 꽃을 들고 하교한 손주를 데리고 작은 꽃 하나씩 따서 핀셋으로 예쁘게 올려두고 같이 눌렀다. 역시 수업은 오프라인!
"5월에 할머니집 오면 그땐 할머니 꽃 누름판으로 예쁜 압화 작품 많이 만들자."
"네~ 얼른 5월이 왔으면 좋겠어요."
떨어진 꽃을 주워 압화 작품을 만들고, 인상 깊은 것들을 시로 표현하는 아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즐겨하시는 취미생활을 시키지도 않았는 데 따라 한다.
'백문이불여일견'
새로운 것을 배울 때 귀로 여러 번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던 것들도 직접 한 번 해보면 머릿속에 오래 기억이 된다. 아이들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공부해라, 책 좀 봐라, 짜증 내지 마라, 수도 없이 잔소리를 해도 들은 채도 안 하는 것 같은데, 어느새 보면 부모가 하는 일을 따라 하고 있다. 엄마가 책을 보면 같이 책을 보고, 아빠가 운동을 하면 같이 운동을 하고 청소를 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들도 청소를 한다. 바로바로 따라 하지는 않아도, 부모가 하는 행동을 눈여겨본다.
오늘 밤에도 잠을 청하기 싫어하는 아들. 아무리 자라고 해도 꿈쩍도 안 한다. 잔소리는 그만하고 불 끄고 누워서 내가 먼저 자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 (따라서 자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