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밤길도 함께 걸으면 따스하다.
매년 5월 초, 어린이날 즈음이 되면 고향집에 방문합니다. 설에 가득 채워뒀던 부모님의 사랑이 바닥이 날 즈음, 때마침 찾아오는 휴일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연락 없이도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곳, 새벽이나 한밤중에도 버선발로 나와 나를 반겨주는 곳. 고향집이 있어서, 나를 반겨주는 부모님이 계셔서 마음 한구석이 항상 든든합니다.
"엄마 나 지금 출발해~"
"조심히 와."
엄마와의 이 짧은 통화가 얼마나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지 모릅니다. 어린이날 연휴를 기다리는 마음은 어쩌면 아이들보다 내가 더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빨리 우리 집에 가고 싶다. 엄마가 해준 따신 밥 먹고 싶다. 그동안 속상했던 일, 힘들었던 일 엄마한테 다 이야기하고 싶다.'
내 안에 꽁꽁 숨겨뒀던 어린아이가 집이 가까워질수록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5월에 고향집을 방문하면 꼭 먹는 음식이 있습니다. 바로 꽃게. 5월 초쯤이 되면 꽃게에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알도 가득 찹니다. 이때는 부르는 게 값이라 아주 비싸지만 1년 중에 꽃게가 가장 맛있는 철이기도 합니다. 가격을 보면 손이 덜덜 떨리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엄마표 꽃게요리를 먹어보겠나 싶어서 큰맘 먹고 꽃게를 삽니다. 엄마는 꽃게로 항상 꽃게탕을 끓여주십니다. 된장 조금과 고춧가루를 넣은 개운한 꽃게탕은 개운하고 감칠맛이 납니다. 엄마표 꽃게탕을 먹은 남편은 이제 식당에서 꽃게 요리는 느끼해서 먹기 힘들 것 같다고 합니다.
아이들도 할머니표 꽃게탕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바로 제일 마지막에 먹는 꽃게 라면 때문이죠. 할머니표 꽃게탕을 맛있게 즐기는 방법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꽃게를 건져 살을 발라 먹습니다. 다음으로 시원한 꽃게국물에 밥을 곁들여서 먹죠. 마지막으로 라면사리를 넣고 끓이면 환상적인 꽃게라면이 완성됩니다. 매년 5월이면 생각나는 구수한 꽃게탕 덕분에 고향집이 더 생각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꽃게탕에 라면까지 가득 채우고 나면 배가 너무 불러 앉아 있기가 힘듭니다. 이렇게 배가 부를 땐 움직여야죠. 어린 조카들부터 엄마, 아빠까지 온 가족이 집을 나섭니다. 고향집 단골 걷기 코스는 논두렁길. 주변에 건물 하나 없이 깜깜한 논두렁을 드문 드문 있는 가로등에 의지해서 온 가족이 걸어갑니다. 어두컴컴한 길을 어떻게 건너 싶지만 하늘에 둥근달이 훤히 비춰주기도 하고, 수많은 별들이 논두렁을 수놓기도 합니다.
"저 달은 무슨 달이야? 저기 저 별 좀 봐!"
가족이 함께 하늘을 보면서 이야기하는 이 시간이 참으로 정겹습니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일들도, 지치고 울적했던 마음도 어느새 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반짝입니다.
5월의 논두렁엔 특별한 소리도 있습니다. 개굴개굴개굴, 물을 대놓은 논에서 개구리들이 부지런히 울음소리를 냅니다.
"할아버지~ 여기 개구리 사나 봐요. 청개구리 보시면 저 꼭 잡아주세요."
아들이 올 때마다 청개구리 타령을 해서 아빠가 몇 번 잡아 주신 적이 있습니다.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를 얼마나 사랑스럽게 관찰하던지. 혹시나 개구리가 죽을까 봐 염려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풀어줍니다.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을 못 떼는 아들에게 가족의 따스한 위로가 이어집니다.
"오늘 풀어준 개구리가 알 많이 낳아서 내년에도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개구리가 별이한테 고맙다고 개굴개굴 인사하네."
별도 달도 보고, 개구리울음소리도 듣고 진한 풀내음도 함께 맡다 보면 어느새 논두렁 걷기가 끝나갑니다.
"아~ 봄밤 참 좋다."
나도 모르게 절로 나오는 감탄사. 혼자 걸으면 어둡고 휑했을 논두렁이 여럿이 함께 걸으니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가족들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모여 논두렁을 눈부시게 수놓습니다. 나에게도 우리 아이들에게도 봄밤은 잊지 못할 시간입니다. 엄마 아빠의 사랑, 할머니 할아버지의 다정함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곧 5월입니다. 아이들은 벌써부터 할머니댁 갈 생각에 신이 났습니다. 사실 말은 안 했지만 나도 들떠있습니다. 오랜만에 엄마 아빠 얼굴 보며 이야기 나누고, 아프신 곳은 없는지 살뜰히 살펴봐야겠습니다. 꽃게탕과 논두렁 걷기도 빠질 순 없겠죠? ^^
고향집에 천년만년 머물고 싶지만 시댁에도 들러 혼자 계신 어머님에게도 따스한 사람의 온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에게 우리 엄마 아빠가 소중하듯이, 남편에게도 어머님이 그런 존재임을 알기에 시댁에서도 봄밤을 즐겨보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