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도착하기 전, 중국에서 경유했을 때 온갖 중국어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중국어는 하나도 모르므로 나에겐 모두 그냥 시끄러운 소음일 뿐이었다. 마드리드공항 입국수속에서 "Hola, ¡Buenos días!"라고 스페인에서 첫 스페인어를 내뱉었다. 그 후 공항 밖으로 나갔을 때 여기저기서 수많은 스페인어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중국어를 들을 때와 달리, 스페인어는 귀에 아주 쏙쏙 들어왔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스페인어를 들으려고 일부러 이어폰도 안 끼고 걸어 다녔다. 다양한 억양과 목소리 톤의 스페인어가 다 들리는 것 같아 너무 신나고 신기했다. 외국에서 영어 외의 다른 외국어가 들린다는 건 난생처음 해 보는 경험이라 더욱 그랬다. 특히나 무슨 말인지 완벽히 알아들었을 때는 희열이 느껴지기도 했다. 유튜브나 넷플릭스에서 듣는 스페인어가 아닌, 현지에서 직접 듣는 싱싱한 스페인어라니!
이번 스페인 여행의 목적은 '최대한 많이 스페인어로 말하기'였으므로, 나는 어설프더라도 무조건 스페인어만 썼다. 유럽을 혼자 여행하는 동양인에게 스페인어로 말을 붙여줄 사람은 전무하므로, 무조건 내가 먼저 스페인어로 선수쳐야 했다. 스페인어를 연습하고 싶어 하는 나의 간절한 마음을 알 턱이 없는 현지인들이 나에게 말하는 방식은 크게 두부류로 나뉘었다.
첫째, 내가 계속 스페인어로 대답하고 스페인어로 질문하는데도, 계속 영어로 말하는 사람들.(관광객들이 많은 시내 중심가에서 주로 그랬다.) 아마 관광지에서는 여러 나라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이 있으니 주로 다 영어만 써서 그런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어설프나마 열심히 스페인어를 했는데 영어로 답해주니 오기가 생겨서 더 스페인어를 던졌다. 식당에서 내가 스페인어로 음식을 주문했는데도 영어로 "음료는? 더 필요한 건 없어?"라고 하길래, 나는 스페인어로 "¿Qué tipo de zumos hay?"(주스는 무슨 종류가 있어?), "Nada más."(더 필요한 건 없어.)라고 꿋꿋이 스페인어를 썼다. 마지막에 "¿Dónde está el baño?"(화장실은 어디야?) 했더니 그제야 "La segunda puerta."(저기 두 번째 문이야.) 한다.
두 번째는, 내가 스페인어로 질문하니까 스페인어로 대답을 하긴 하는 데, 엄청난(?) 속도로 얘기하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나에게만 빠르게 들릴 뿐, 그들이 일상 대화하는 수준의 속도였을 것이다. 현지인이 실생활에서 말하는 속도가 내가 공부하려고 듣는 콘텐츠들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또 막상 직접 들으니 더 처절하게 깨달았다. 언제쯤이면 현지인이 일상적인 속도로 얘기하는 것까지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한 번은 우버를 타고 가는 길에 앞에 사고가 나서 도로가 꽉 막혀 있었다. 그걸 보고 나는 기사한테 "Un accidente."(사고다.)라고 했다. 사실 "Hubo un accidente allí."(저기 사고가 났었네.)라고 완전한 문장으로 얘기했어야 했는데, 앞뒤 다 잘라먹고 '단어'로만 말한 것이다. (꼭 그 상황이 지나가고 나서야, '아, 그때 이렇게 얘기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물론 정황상 단어만으로도 소통이 되긴 하지만, 이때 이후로도 문장보다 단어 위주로 말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았다. 사실 단어만 말하는 건, 언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들이나 구사하는 수준인데.. 좀 더 어른스러운 스페인어를 구사하고 싶은 욕심만 커졌다.
게다가 내 스페인어는 너무너무너무 느렸다. 아무리 문법적으로 완벽한 스페인어 문장을 말한다고 해도 한참 생각하고 정확히 또박또박 뱉으려다 보니, 내가 말하는 속도의 한 2배속을 해야 현지인이 말하는 속도가 된다. 그것도 "에... 음... 아...."라는 말을 안 했을 경우에만. 말할 때 계속 '에.... 음... 아...."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긴 한데, 내 말을 듣는 상대방의 큰 인내심이 필요한 것 같았다. 새삼 나의 화상 스페인어 선생님이 대단해 보인다. 내 답답하고 느린 스페인어를 어떻게 그렇게 인내심을 갖고 들어주시다니...! 물론 내가 돈을 냈으니 하시는 거겠지만.
근데 좀 억울하기도 하다. 이 세상 어느 누가 봐도 나는 완벽한 동양인의 얼굴인데, 나 스페인어 할 줄 알긴 하는데... 나 외국인인데... 좀 천천히 말해주면 안 되겠니..? 분명 "Hablo español un poco." (나 스페인어 조금 할 줄 알아)라고 했지. 잘한다고 안 했는데 말이다. un poco (조금)이 아니라 un poquito (아주 조금)이라고 했어야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