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스페인어를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어학연수처럼 장기로 살러 온 게 아니니 당연하긴 했다. 여행자가 외국어를 쓸 일은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외향적인 사람이라면 어디서든 먼저 말 붙이고 할 수 있겠지만, 내향적인 나는 그것도 어렵다. 한국에서도 웬만하면 모르는 사람에게 도와달라거나,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스페인어를 말하기 위해' 왔다! 그래서 (한국에서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부러라도 더 스페인어를 말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마드리드에서 처음 지하철을 타러 역에 들어갔을 때, 교통카드 발권 기계 앞에 잠깐 서있다가 옆 사람에게 "¿Puedes ayudarme, por favor?" (저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먼저 말을 붙였다. 그분은 흔쾌히 내 대신 화면을 클릭하며 교통카드 발권을 도와주었다. "¿Puedo recargar esto?"이거 또 충전해서 쓸 수 있나요?(사실 알고 있지만 그냥 물어봐 봄.) Sí.(네) 설명해 주는 거 들으면서 "Entiendo, gracias." (이해했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마지막 인사말도 잊지 않고 써먹었다. "Qué tengas un buen día!" (좋은 하루 보내요!)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세탁기를 쓸 수 없어서 근처 코인세탁소에 갔다. 생긴 거는 한국의 코인세탁소랑 거의 흡사하게 생기긴 했는데, 그래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좀 난감했다. 그때 빨래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Disculpe. Puedes ayudarme, por favor?" 하고 일부러 물어봤다. "Claro que sí. ¿Cómo puedo ayudarte?" (물론이죠. 뭘 도와드릴까요?) "Es la primera vez que vengo aquí. No sé cómo funciona." (여기 처음 왔는데, 이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세탁 코스 선택하고 결제하는 기계 앞에서 하나하나 내 대신 친절하게 해 주신다. 세탁 코스 선택하고, 결제하는 방법, 그리고 세탁 걸리는 시간, 다 하면 저기 건조기에서 똑같이 하면 된다며 가르쳐 주신다. "Muchas gracias, muy amable!"(너무 고마워요. 정말 친절하시네요.) 했더니, "De nada. Pero también es la primera vez que vengo aquí."(천만에. 근데 사실 나도 여기 처음 왔어.) 하면서 웃어주시는 할아버지. "Verdad?"(정말요?) 하면서 나도 같이 웃었다.
10월 초 마드리드 날씨는 일교차가 매우 심했다. 낮에는 26~28도 늦여름 날씨인데 밤과 오전은 14~16도 정도로 추웠다. 그러하니 2일째 되던 날 목이 간질간질하더니 밤새 기침을 했다. 따뜻한 차만 마시고 따뜻하게 푹 잤는데도 안 좋아서 약국에 가기로 했다. 하필 일요일이라 연 약국 찾기가 힘들었다. 목을 한번 가다듬고 당당하게 들어갔다. 젊은 여자 약사 한 분이 있었다. "Me duele la garganta y tengo tos y un poco de mocos." (목이 아프고 기침이랑 콧물이 조금 나요.) 초급회화 때 약국에서 하는 대화편에서 외웠던 문장을 그대로 써먹었다! "이 약을 한번 드셔보세요. 삼키는 게 아니고, 사탕처럼 빨아먹는 거예요. 목이 아픈 거랑 기침 완화에 도움이 될 거예요."(스페인어로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Cuántas veces al dia?(하루에 몇 번 먹으면 되나요?) Cinco veces. (5번이요.) "Gracias. Cuánto es?" (감사합니다. 얼마예요?)
약사는 친절했지만 가격은 안 친절했다. 생긴 것도 맛도 약간 목캔디 같았는데 가격은 거의 1만 3천 원...!! 목캔디처럼 먹을 수 있어서 먹기는 간편하긴 했다. 효과가 있을까 했는데 효과가 있었다!!! 드라마틱하게 확 좋아지진 않고 기침은 간간이 계속되었지만 다행히 차츰 잦아들었다.
이런 대화들은 정말 별거 아닌 짧은 대화지만, 스페인어로 대화를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뿌듯했다. 그리고 내 두려움과 달리 대체로 다들 친절하게 도와주고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스페인어로 이렇게 대화했었지'하고 계속 복기하게 되어서, 실제로 직접 써먹어본 스페인어는 잘 안 까먹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