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공부하는 데 있어 초급 딱지를 떼고 나면 슬슬 '원서 책 읽기'에 욕심이 생기는 것 같다. 나는 뭔가 관심 있는 분야가 생기면 먼저 그 분야의 책을 찾아 읽어보는 습관이 있어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스페인어 원서 책을 사려고 찾아봤다. 하지만 한국에서 스페인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는 대부분 스페인어 회화책이라던가 DELE 시험 준비 책밖에 없었다. 대형서점을 가도 온라인 서점을 다 둘러보아도 스페인어 원서 책의 선택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영어보다 스페인어의 수요는 훨씬 적으니 어쩔 수 없는 것 같긴 했다.
그래서 이번 스페인 여행을 가서 원서 책을 잔뜩 사 오기로 했다. 마드리드 일정 중에 하루는 '서점 투어 날'로 일정을 잡았다. 헌 책방 거리와 대형서점, 우리나라 독립서점 같은 작은 서점들을 돌아다녔다. 가장 처음 간 곳은 헌책방 거리였다. 저렴한 가격으로 더 많은 책을 살 수 있으면 좋으니까. Cuesta de moyano라고 레티로공원 옆에 헌책방 거리가 있는데, 일렬로 있는 여러 가판대에서 말 그대로 '헌 책'들만 파는 곳이라 정말 오래돼 보이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대신에 가격은 정말 싸다. 한 권에 1~3유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권쯤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봤는데, 초급자인 내가 볼 수 있을 만한 책은 아쉽게도 없었다.
헌책방 거리를 둘러보고 난 후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형서점에 갔다. 우리나라로 치면 교보문고 같은 곳이었던 것 같다. 중심가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에 치여 정신없다가 서점에 들어오니 뭔가 포근한 분위기가 나를 감싸는 듯했다. 역시 깨끗한 책들이 분야에 따라 보기 좋게 잘 진열되어 있었다. 한강 소설이나 한병철의 피로사회 등 유명한 한국인 작가들의 책도 몇 권 보았다. 그리고 경제 분야에서는 내가 이미 영어원서나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었던 익숙한 책들도 보였다. 레이달리오의 원칙이나 총균쇠 등 한국에서 유명한 책들은 그곳에도 베스트셀러로 보기 쉬운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조금 신기했다.
스페인의 서점들은 당연히 거의 다 스페인어 책들이고, 외국어 책들은 보통 우리나라처럼 영어 책이 가장 많았다. 다른 점은 프랑스어나 독일어 원서 책 코너가 있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한국도 영어 외에는 유럽어보다는 중국어나 일본어 책이 많은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어디 여행 가면 꼭 사야 할 쇼핑 리스트 이런 거에 관심이 없는 내가 딱 하나 쇼핑하면 눈 돌아가는 게 있으니 그건 바로 '책'이다. 나는 호기롭게 스페인 원서 책을 잔뜩 사 올 의도로 캐리어를 챙길 때 최대한 짐을 많이 줄였었다. 얇은 책이라면 10권도 넘게 캐리어에 들어갈 자리가 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책값이 비쌌고, 맘에 드는 책의 안의 내용도 조금 읽어보다 보니, 아마 이 얇은 책 한 권 읽는데도 굉장히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단순히 그냥 책 욕심으로 열댓 권을 산다면 아마 읽지도 못하고 우리 집 책장의 진열만 돼있을 것 같다는 현실 자각 타임이 왔다.
내가 찾는 책은 대략 200페이지 내외의 얇으면서 글자가 너무 작지 않아야 하고, 짧은 단편 소설이나 에세이나 자기 계발 분야의 책이었다. 평소에는 경제, 경영, 인문학 등을 주로 읽지만, 그걸 스페인어로 읽기에는 아쉽게도 내 수준이 한참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내가 고른 책은 단 두 권. 소설책 한 권이랑, 에세이 같은 자기 계발 책 한 권이었다.
에어비앤비 숙소로 돌아왔는데, 호스트가 집에 있었다. 내가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매일 스페인어로, "여기 가봤어? 저기 가봤어? 내일은 뭐 하려고? 저기 맛집 있는데 한 번 가봐!" 하는 식으로 스페인어로 나에게 말을 많이 걸어주었다. 그날은 내가 스페인어 더 공부하려고 책을 샀다며 자랑을 했다. 그랬더니 내가 퇴실하는 날, 본인의 집에 있던 책 한 권을 선물이라며 나에게 줬다. '2권은 좀 적지 않나.. 다른 서점 한 번 더 가서 한 두 권만 더 살까..?'고민하던 차에 책 한 권을 선물 받아서 너무 기뻤다.
여러 권이나 두꺼운 책을 낑낑대며 읽는 것보다, 차라리 한두 권을 여러 번 읽어보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아직 소설책 10페이지도 못 읽었지만, 천천히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