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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렌터카로 소도시 여행하기

by 하르딘

외국에서 운전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초보운전은 아니지만 평소에 운전할 일이 거의 없어 그렇게 능숙하진 않아 렌트할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외국에서 드라이브하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으니, 안 하면 왠지 후회할 것 같았다. 아마 운전석이 반대였으면 시도해 볼 엄두도 못 냈겠지만, 한국과 운전석 방향이 동일하니 용기를 내어보았다.


Hertz라고 한국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렌터카 업체에 몇 달 전에 미리 예약해 두었다. 세비야 산타후스타 역 근처에 있는 렌터카 업체 창구로 갔다. Tengo una reservación. (예약했는데요) Aquí mi pasaporte y permiso de conducir. (여기 여권이랑 운전면허증이요). 직원이 내 예약 내역을 확인한 후 영어로 다다다다 빠르게 설명을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빠른 영어에 놀라 한껏 귀를 세우고 초집중해서 들었다. 아마 맨날 고객들에게 똑같은 설명을 하니 빠르게 얘기하는 거겠지. 어쨌든 덕분에 나는 절반 정도밖에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또 내 짧은 스페인어로 꾸역꾸역 질문을 해야 했다.


내가 스페인어를 못 알아듣는 거 같으면 영어로 얘기해 주셨다. 그런데 사실 나는 스페인어로도 영어로도 못 알아들었다. 근 1년 반을 스페인어 공부만 했더니 그나마 있던 영어능력도 퇴화해 버린 것이다. 슬프게도 영어도 스페인어도 어정쩡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렌트하는데 어려운 건 없었다. 예약할 때 보험이랑 차종이랑 반납일자랑 이런 거 다 미리 선택해 놨으니까. 차 키를 받고 지하주차장에 갔다. 트렁크에 캐리어를 넣어놓고 일단 운전석에 앉았다. 사이드미러와 백미러, 좌석 조정은 했는데 그다음이 문제였다. 차알못이 나에게 벤츠를 주었는데, 오른쪽 아래에 있어야 할 기어 변속기가 없었다. 그냥 오른쪽 아래에 아무것도 없었다. 멘붕이 왔지만 일단 폭풍 검색으로 알아내고 어찌어찌 출발했다.


구글맵 네비를 핸드폰으로 틀어서 갔다. 한국에서 쓰는 카카오 네비와 같이 속도제한구역을 알려주는 게 없어서 속도제한을 잘 지켰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속도위반 딱지가 한국의 집으로 날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아직까지도 '혹시...?' 하면서 덜덜 떨고 있는 중이다.


스페인에는 선팅 돼있는 차가 하나도 없다. 단 한 대도 못 봤다. 그래서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빠 차 타고 다닐 때 봤던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운전자들끼리 차 안에서 서로 표정과 손짓으로 소통하는 장면!! 아무튼 선팅이 안 되어 있으니 긴팔에 선글라스 끼고 에어컨 틀어도 햇빛 때문에 너무 뜨거웠다. 이른 오전이나 밤에 운전하지 않는 이상, 대낮에 장시간 운전하는 건 덥고 힘들 것 같다. 그리고 운전해서 가는 길이 굉장히 예쁠 거라고 드라이브하는 맛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세비야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거의 다 허허벌판이었다.


렌터카 비용은 매우 비쌌다. 2일 딱 24시간 빌리는데 49만 원이었다. (보험료 포함). 여기에 주유비 한 5만 원 정도 들었다. 주유비도 비싸다고 들었는데, 나는 너무 멀리까지 운전 안 해서 이 정도였던 것 같다. 혼자 타는 거라 가성비가 떨어지는 선택지지만 그래도 해보길 잘했다. '외국에서 렌터카로 혼자 운전해 보기'라는 로망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뿌듯함도 있고, 안 해봤으면 계속 무서워하기만 했을 것 같다.


최대한 유명하지 않은, 한국인들이 없을 것 같은 소도시에 가보고 싶었다. 챗 GPT 선생님께 조언을 구해서 처음 간 곳은 Zahara de la Sierra였다. 호숫가에 있는 언덕 마을이었다. 사진으로 봤을 때 예쁜 것 같아서 가보았다. 챗 GPT에 속았다. 그곳에서 렌터카로 놀러 온 한국인 일행을 여러 번 마주쳤기 때문이다. 숲이 무성할 줄 알았는데 나무들은 별로 없고 바람만 엄청 불었다. 식당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모든 식당이 거의 만석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한 군데 찾아 점심을 먹었다. 지쳐서 얼른 다른 데로 갔다.


Grazalema라고 그 근처에 있는 산 중턱에 있는 여기도 작은 마을이다. 일단 오긴 왔는데 할 게 없어서 일단 카페 가서 커피 한 잔 시켰다. 스페인 사람들은 대부분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마드리드에선 카페 선택지가 매우 넓었지만, 이곳에서는 작은 동네 카페들 밖에 없기 때문에 에스프레소 아니면 Café con leche (카페라테 ) 둘 중 하나만 마실 수 있다. Un café, por favor.(커피 한잔 주세요) Café solo? sin leche?(커피만요? 우유 안 넣고?) Sí, con hielo. (네, 얼음이랑 같이 주세요) 에스프레소와 얼음컵 하나가 나온다. 얼음컵에 에스프레소를 넣고, 가지고 있던 물을 조금 섞어서 마셨다. 평소에 투 샷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필요한 나에겐 너무 적었다. 카페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Uno más. (한 잔 더 주세요.)


그다음 간 곳은 El Bosque라고 차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냥 구글맵 보다가 아무 곳이나 고른 데었다. 여기에서는 호텔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여기는 유명한 거 하나도 없는 그냥 작은 동네였다. 자연경관도 막 엄청 이쁘지는 않고 그냥 평범한 현지인들이 사는 곳, 외국인 관광객보다는 그냥 현지인들이 주말에 잠깐 놀러 오는 곳인 것 같았다. 조식을 포함한 넓은 더블룸이 9만 원밖에 안 했다. 조식도 좋았고, 방도 넓었고 화장실도 넓었다. 무엇보다 제일 좋은 건 뷰가 뻥 뚫린 테라스! 아침저녁으로 커피 마시면서 테라스에서 멍 때리는 게 너무 좋았다. 그전 숙소들은 다 호스트가 사는 에어비앤비였는데, 침대가 너무 작고 매트리스가 너무 안 좋았었다. 여기는 그래도 호텔이라고 침대가 적당히 푹신하고 넓고 이불이 깨끗했다. 그 덕분에 스페인 여행한 지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여기서 완전 꿀잠을 잤다. 여기서 하루 쉬면서 아, '여기서 하루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지역의 숙소를 미리 예약해 놓은 상태. 이럴 땐 파워 J인 내가 싫어진다.


다음날 아침 호텔 조식을 먹는데, 아이와 셋이 가족여행 온 스페인 부부가 있었다. 네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그 아이는 땡글땡글한 눈으로 나를 신기하게 쳐다본다. 아마 본인의 4~5년 인생에서 동양인을 실제로 처음 보나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수줍은 목소리로 나에게 'Hola'한다. 나도 'Hola'하고 대답해 주니 배시시 웃는다. 마드리드와 세비야 같은 관광객 많은 대도시에만 있다가 영어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작은 마을에 오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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