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그거 해서 뭐해?' 하는 걸 주로 하는 게 내 특기인 것 같다. 스페인어 공부도 마찬가지다. 어디 써먹을 데도 없는 스페인어를 피 같은 내 돈 주고(화상 스페인어 수업료, 책 구입, 챗 GPT 구독료) 소중한 내 시간 써가며 공부하고 있다.
게다가 올해는 스페인 여행 갔다 오느라 2주 동안 평소 생활비의 수십 배를 쓰고 왔다. 그렇다고 많은 인생 샷을 남겨왔다거나, 맛있고 신기한 음식을 많이 먹고 왔다거나, 엄청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온 것도 아니다. 여행이란 대부분 고생이긴 하지만, 쓴 돈과 시간에 비해 그렇게 즐겁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많이 걸어 다녔고, 음식값은 비싼데 맛은 그저 그랬고, 무거운 짐 질질 끌고 계속 이동하고 다녀야 했다. 실제 환경에서 스페인어로 말은 좀 하긴 했지만 제대로 된 대화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하니 '내가 왜! 내 돈 주고 내 시간 쓰고 이 고생이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쓴 돈과 시간에 비해 더 가치 있는 무언갈 얻어 가야 한다는 압박, 뽕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된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이것저것 재게 된다.
이제 거의 2년이 다 되어가는 독학 스페인어 공부는 당장 써먹을 데가 없다. 게다가 실력이 느는 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지금 당장 공부를 멈추면 이 보잘것없는 실력조차 빠르게 수직낙하할 게 뻔하다. 정말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는 쓸데없는 취미다. 지금 그만두더라도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마 당분간은 그만둘 수 없을 것 같다.
스페인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결국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하게 되었다'는 것 말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직접 느끼고 깨닫게 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외국어 공부를 한다고 해서, 그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는 것만이 그 열매가 아니었다.
먼저, 외국어를 공부하면 그 해당 국가의 문화, 정치, 사회, 역사 등에 대해서도 같이 공부하게 된다. 스페인어를 공부하면서 그전에는 몰랐던 스페인 뿐 아니라 남미 문화 등에 대해서도 관심이 가고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이제는 넷플릭스에서도 미국 영화보다 스페인, 멕시코 영화나 드라마를 더 많이 본다. 느리지만 스페인 신문 기사도 조금씩 읽기 시작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소득은 '외국어 공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다. 처음에는 나조차도 '영어도 유창하게 못하면서 무슨 제2외국어를 공부한다고??!'라고 생각했었다. 꼭 유창하게 하지 못하더라도, 문자를 읽을 줄 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메리트가 있다는 걸 스페인 여행을 통해 알았다. 그리고 어차피 어떤 외국어든 원어민처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실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도 계속 노력이 필요하다. 즉, 유창성과 상관없이 배워보고 싶은 새로운 외국어는 무엇이든지 언제든지 시작해도 된다. 그리고 스페인어 공부를 하면서, 오랜만에 성취감도 느껴보고 새로운 외국어에 대한 신기한 설렘도 느꼈다. 이런 감정들은 돈이라는 숫자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거였다.
내가 투입한 시간과 노력에 대한 결과가 왜 꼭 당장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당장 안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 점점 자라고 커져서 아주 나중에 생각지도 못한 선물로 올 수도 있는 것을. 나의 취미인 책 읽고 글 쓰는 것도 그렇다. 이걸로 자잘 자잘하게 돈 번 거야 있지만, 딱히 큰 이득을 본 건 없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읽고 쓴 것들은 모두 내 안에 보이지 않게 차곡차곡 쌓여있을 것이다. 나중에는 진짜 읽고 쓰는 작가의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사서 고생하는 스타일이어야 배우는 게 있고, 숫자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성장을 할 수 있다. 원래 비싼 게 비싼 값을 하는 법이니까. 이미 이 치명적인 성취감과 설렘에 매료된 나는, 아마 계속 이렇게 사서 고생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