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작할 때는 '스페인어로 회화를 하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스페인에 1년 정도 살아보고 싶은 막연한 생각은 있었지만, 거기서 직장을 다닐 생각은 없었기에 높은 수준의 스페인어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살아보고 나서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만, 스페인에 몇 년 이상 장기로 살아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하니 어느 정도 일상 소통을 할 수 있을 회화 실력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으로 시작했으니, 스페인어를 정석대로 공부하지 않았다. 보통 학원에서 처음 배우면 동사 변화표 만들어서 외우고, 독해 지문들 밑줄과 필기해 가며 분석하며 읽는 것 같았다. 나는 동사 변화도 그냥 책에 나온 거 대충 몇 번 읽어본 게 다고, DELE 독해 지문 읽는 것도 안 했다. 기초 문법 교재로 인강을 한번 듣긴 했으나, 여전히 문법은 용어도 잘 모른다. 인강 들을 때 필기 하나도 안 하고 진짜 '듣기만'했다. 외국인이 한국어로 말했을 때 문법적으로 뭐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이상하게 들리는 것처럼 스페인어 문법도 자연스럽게 익히고 싶은 욕심이었다.
사실 연필 들고 공부하는 게 귀찮았다. 책을 봐도 눈으로만 보고 입으로 읽고 그랬다. 손으로 쓰는 것보다, 계속 반복해서 보면서 눈과 입과 귀에 '붙여두려고' 했다. 살면서 온갖 시험을 보며 느낀 거는 공부한답시고 손을 바쁘게 움직인다고 해서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게 아니라는 걸 내 나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공부는 복습, 반복, 꾸준함이 제일 중요하니까.
그리고 30대 초반까지도 온갖 시험에 이리저리 치인 나로서는 '시험'이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들었다. 토익 고득점 맞아도 영어로 말 못 했던 경험, 영어 시험과 문제집에 쓴 비용도 아까웠다. 시험이라는 게 몇 개월을 공부했든, 몇 년을 공부했든, 겨우 단 하루 단 몇 시간의 시험시간에서 쏟아낸 것만으로 내 실력이 평가당한다. '시험'을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고 스트레스받고, 그리고 시험에 돈 쓰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혼자 공부한 지 이제 거의 2년이 다 돼가는 지금, 생각이 바뀌었다.
계기는 화상 스페인어를 하면서였다. 선생님과 스페인어로 소통은 되긴 하는데, 수업이 진행되면 될수록 내가 말하는 스페인어가 나 스스로 마음에 안 들기 시작했다. 성인인 내가 유치원생 같은 스페인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문법이 너무 엉망이었다. 5~6 단어 넘어가는 문장은 거의 문법에 맞게 말하지를 못했다. 좀 더 고급스러운 스페인어를 구사하고 싶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문법적으로 정확한 문장을 말하는 연습으로는 DELE 준비를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DELE에서는 회화 시험(면접관과 대면하여 말하는 능력 평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자잘 자잘 한 이유들이 있다. 지금이야 매일 스페인어를 조금씩이라도 하고 있지만, 또 언젠가 현생에 치여 스페인어를 공부할 여건이 안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면 스페인어 실력이 급격히 떨어지겠지. 그런 시기에 나중에 뒤돌아봤을 때 '아, 나 예전에 스페인어 공부 열심히 했었는데..'라는 '증거'를 남겨놓고 싶기도 했다. 다른 사람 말고 그냥 미래의 나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그리고 일단은 또 돈을 써야 빡세게 공부할 거 같기도 하다. 생각해 보니, 처음에 시원스쿨 스페인어 인강을 결제했었을 때가 가장 열심히 했었다. 안 하면 돈 아까우니까. 지금도 화상 스페인어 수업 있는 날만 또 평소보다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한다. 아무 준비 안 하고 수업 들어가면 또 돈 아까우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DELE는 유효기간이 '평생'인 자격증이다. 언젠가 써먹을 데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시험 목표는 내년 4월, 레벨은 B2이다. 대략 4개월 정도 남았다. 평일에는 하던 대로 최대한 짬짬이 하고, 주말에 좀 몰아서 많이 해야 할 것 같다. 시험이라는 게 오랜만이라 벌써 긴장이 되기도 하고, 그리고 4개월 동안 빡세게 독해, 듣기, 작문, 회화 연습하다 보면 또 한 번 실력이 꽤 점프하지 않을까 싶어 기대되기도 한다. 물론 비싼 시험이니 꼭 한 번에 합격했으면 좋겠다. 이미 공부할 책은 다 구매했고, 내년 2월에 대략 30만 원 정도의 시험 접수를 하고 나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된다. 오랜만에 시험인 데다가 처음 보는 시험이라 계속 설레었다가 걱정되었다가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