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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끄적끄적

래시가드가 지겨워졌다.

by 승연


가족과 제주도로 2박 3일간 여행을 다녀왔다.

다 좋았지만 특 좋았던 순간은 야외 수영을 할 때였다. 제주 날씨가 온화한 덕분에 11월 초임에도 불구하고 수영하기 괜찮았다. 다음 제주에는 유유자적한 물놀이의 비중을 좀 더 늘려보기로 다짐했다.




으로 다짐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예쁜 수영복을 구입해야겠다는 다짐이었다.


제주에서 수영을 하는 내내 생각했다. 수영장에서 우리 가족 넷은 모두 래시가드 차림이었다. 아이들은 알록달록한 캐릭터가 그려진 래시가드, 남편은 사각의 반바지 위에 남색의 래시가드를 받쳐 입었다. 그리고 조신한 아줌마인 나는 위 아래로 까만 래시가드를 입었다. 둘째를 출산한 이후 몸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수영복이 왠지 부담스러워 부랴부랴 사입은 래시가드였다.


그런데 마침 우리가 있는 곳이 제주여서 그런가, 내게서 자꾸 물질하는 제주 해녀의 느낌이 났다. 갑자기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햇빛이 쨍하지도 않고, 수영장에 피부가 긁힐만한 위험요소도 없는데, 나는 뭘 위해 이렇게 온몸을 꽁꽁 싸매고 은폐하는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사한 수영복을 입은 몇몇 여인들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다들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특히 너무 멋져서 자꾸 힐끔거리며 쳐다 본 여인이 한 명 있었는데, 연세가 팔십쯤 되어보이는 여사님이셨다. 여사님이 몸을 감싼 흰 타올을 벗자 화려한 자주와 보라빛의 꽃무늬 원피스 수영복이 드러났는데, 순간 어찌나 화사하고 곱던지. 수영복을 입은 여사님은 퉁퉁한 몸매에 주름진 살갗이었는데, 그게 왜, 뭐가 어때서. 아무렇지도 않고 잘만 어울리더라.


여사님은 사랑스러운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스트레칭을 하다가 이내 물에 몸을 담그더니 자연스럽게 자유형과 배형의 동작으로 물살을 갈랐다. 자연스러운 태도 덕분인지 꽤 멋스럽게 보였다. 아니, 사실은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반면에, 이 시꺼먼 래시가드는 나를 자꾸 옥죄고 소극적으로 굴게 했다. 고작 남들 시선이 신경쓰여 몸을 가리기에 급급하여 취향에도 없는 검은색 래시가드를 사 입은 내 자신이 너무 촌스럽고 멋없게 느껴졌다. 속에서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고, 뭐 하러 이렇게 피곤하게 사냐, 내 자신아. 아무도 나 안 본다. 남들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살자.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다음부턴 래시가드 안 입을거야.





딱 한 번이지만 비키니를 입었던 적이 있다. 그것도 황금색 비키니.


그해 12월, 이제 막 허니문을 떠난 새 신부는 과감하게 비키니를 챙겨갔다. 쇼핑하다가 잠깐 뭐에 씌었던 건지 수영복이라기보다는 조그만 천 쪼가리에 불과한 황금 비키니였는데, 수영복만 놓고 보면 참 예뻤다.


약간 빛이 바랜 듯한 황금색의 비키니는 마치 향수 광고 속의 샤를리즈 테론이나 사슴 가죽 비키니를 입고 세계적인 섹시스타로 발돋움했던 라켈 웰치를 연상하게 했다. 물론 그 수영복을 입을 건 그들이 아닌 나였지만.

평소엔 세상 부끄럼쟁이에 유교걸의 정석인 내가 굳이 비키니를 구입한 건 먼 이국의 섬에서 하루쯤은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던 생각에서였을까.


그 해변은 백인들이 점령하다시피 많이도 보였다. 인형같은 몸매의 여자들도 몇몇 보였지만 그보다 평범한 여성들이 훨씬 더 많았다. 뱃살이 튜브처럼 몇 겹씩 겹친 여성도, 살갗이 쪼글쪼글 주름진 할머니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기 몸에 딱 맞는 수영복을 입었다.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알록달록 색색의 수영복을 입고 자유롭게 해수욕을 즐겼다. 그때도 그 해변에서 남의 이목을 의식하고 쭈뼛대며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오렌지빛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이국의 해변에서 용기를 냈다. 겉옷을 벗어던지고 황금빛 수영복만 입고 물놀이를 즐겼다. 그건 내겐 정말 큰 용기였다. 그래, 그 비키니는 자유였고.


그래서 그 후에 어떻게 됐는데? 당연하게도,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입고 싶은 수영복을 입고 지칠 때까지 실컷 수영을 했다. 자유형, 배영, 자맥질, 그냥 물 위에 누워 둥둥 떠있기... 완전한 해방감, 그게 끝이었다.


아, 물론 약간의 이목을 끌긴 했다. 한 남자가 남편에게 다가와 "유 아 럭키 맨. 유어 와이프 이즈 쏘 뷰티풀."이라 했던 것 같기도. 환청이었나... 10년 전의 진실 혹은 거짓.




제주에서 돌아온 후, 래시가드는 옷장 가장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대신에 원래 래시가드를 넣어두었던 수영 가방은 깨끗하게 비워두었다.

곧, 내 몸에 딱 맞는 예쁜 새 수영복이 들어갈 자리이므로.


괜히 남편에게 10년 전 그날의 일을 물었다. 그날 황금색 비키니 입었을 때 나 좀 예쁘지 않았어? 남편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언제? 언제 예뻤다고? 그는 오늘도 만만치 않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절대 들려주지 않겠다는 의지. 그래도 나 역시 이번만큼은 집요하게 물어보기로 한다. 왜 그때 신혼여행 갔을 때 있잖아. 나 그 때 약간 여신 느낌 아니었나? 그러자 그가 빠르게 답했다. 여신...? 그리스... 신전 기둥같긴 했다.


그리고 네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때 다들 너 예뻐서 쳐다본 거 아니야. 하필 황금색을 입어서 정말 아무것도 안입은 줄 알고 본 거지. 그때 내가 앞에서 너 안가려줬으면 풍기문란죄로 신고 당할 뻔 했어 진짜.


아... 유어 와이프 이즈 쏘 뷰티풀이 아닌 쏘 크레이지였을 수도.

10년 전의 진실 혹은 거짓 2라운드.




'비키니는 기세다.'

제주의 한 수영장에서 자연스레 깨달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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