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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Nov 09. 2023

래시가드가 지겨워졌다.


가족과 제주도로 2박 3일간 여행을 다녀왔다.  


머무른 기간에 비해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건 많아서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고 뻔한 음식들을 먹었으며 마지막 날에는 공항내 기념품 숍에서 흔한 기념품들을 한아름 구입하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했다. 그야말로 단기 제주 관광객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뻔하든 아니든 그래도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것만으로도 참 즐겁고 좋지 아니한가!  좋았다, 감상 한 적어본다.


특히 좋았던 순간은 야외 수영을 할 때였다. 제주 날씨가 온화한 덕분에 11월 초임에도 불구하고 수영하기 괜찮았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수영장에 갔는데 고요한 아침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따뜻한 물 속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가히 감동적이었다. 여행 중 최고의 순간이었다.


다음 제주에는 유유자적한 물놀이의 비중을 좀 더 늘려보기로 다짐했다.




속으로 다짐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예쁜 수영복을 구입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제주에서 수영을 하는 내내 생각했다. 수영장에서 우리 가족 넷은 모두 래시가드 차림이었다. 아이들은 알록달록한 캐릭터가 그려진 래시가드를, 남편은 사각의 반바지 위에 남색의 래시가드를 받쳐 입었다. 그리고 조신한 아줌마인 나는 위 아래로 까만 긴팔과 긴바지의 래시가드를 입었다. 둘째를 출산한 이후 몸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수영복이 왠지 부담스러워 부랴부랴 사입은 래시가드였다.


그런데 마침 우리가 있는 곳이 제주여서 그런가, 내게서 자꾸 물질하는 제주 해녀의 느낌이 났다. 햇빛이 쨍하지도 않았고 피부를 긁힐만한 위험요소도 없는데, 나는 무얼 위해 이다지도 꽁꽁 싸매고 온몸을 은폐하려 하는가?


자유롭고 편안한 분위기의 제주와 화사한 수영복을 입은 다른 여인들은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다들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특히 멋져서 자꾸 힐끔거리며 쳐다 본 여인이 한 명 있었는데, 연세가 팔십쯤 돼보이는 할머니였다.


그가 몸을 감싼 흰 타올을 벗자 드러나는 화려한 자주와 보라색의 꽃무늬 원피스 수영복이 어찌나 화사하던지. 퉁퉁한 몸매에 주름진 살갗이었지만 그게 왜, 뭐가 어때서.


할머니는 사랑스러운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당당하게 스트레칭도 하고 천천히 물에 몸을 담그더니 이내 멋지게 수영을 했다. 자연스러운 그의 태도 덕분인지 아무렇지 않고 괜찮았다. 아니,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반면에 이 시꺼먼 래시가드는 나를 자꾸 옥죄고 소극적으로 굴게 했다. 고작 수영 하나 하는데도 남들 시선이 신경쓰여 몸을 가리기에 급급했다. 취향에도 없는 검은색 래시가드를 사 입은 내 자신이 너무 촌스럽고 갑갑했다.  속에서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고, 뭐 하러 이렇게 피곤하게 사냐, 내 자신아. 아무도 나 안 본다. 남들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살자.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다음부턴 래시가드 안 입을거야.





딱 한 번이지만 비키니를 입었던 적이 있다. 그것도 황금색 비키니.


그해 12월, 이제 막 허니문을 떠난 새 신부는 과감하게 비키니를 챙겨갔다. 쇼핑하다가 잠깐 뭐에 씌었던 건지 수영복이라기보다는 조그만 천 쪼가리에 불과한 황금 비키니였는데, 수영복만 놓고 보면 참 예뻤다.


약간 빛이 바랜 듯한 황금색의 비키니는 마치 향수 광고 속의 샤를리즈 테론이나 사슴 가죽 비키니를 입고 세계적인 섹시스타로 발돋움했던 라켈 웰치를 연상하게 했다. 물론 그 수영복을 입을 건 그들이 아닌 나였지만.

평소엔 세상 부끄럼쟁이에 유교걸의 정석인 내가 굳이 비키니를 구입한 건 먼 이국의 섬에서 하루쯤은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던 생각에서였을까.


그 해변에는 백인들이 많이 있었다. 인형같은 몸매의 여자들도 몇몇 보였지만 평범한 여성들이 훨씬 더 많았다. 뱃살이 튜브처럼 몇 겹씩 겹친 여성이나 살갗이 쪼글쪼글 주름진 할머니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 몸에 딱 맞는 수영복을 입었다.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 해변에서 남의 이목을 의식하고 쭈뼛대며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오렌지빛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이국의 해변에서 용기를 냈다. 겉옷을 벗어던지고 수영복만 입고 물놀이를 즐겼다. 그건 내겐 정말 큰 용기였다. 그래, 그 비키니는 자유였고. 그 후에 어떻게 됐을까? 당연하게도, 아무 일도 없었다. 그냥 입고 싶은 수영복을 입고 수영했다. 완전한 해방감, 그게 끝이다.


아, 물론 약간의 이목을 끌긴 했다. 한 남자가 남편에게 다가와 "유 아 럭키 맨. 유어 와이프 이즈 쏘 뷰리풀."이라 하기도 했다.(?)10년 전의 진실 혹은 거짓.(여긴 내 글을 적는 공간이니까 내 맘대로 씨불일 권리가 있습니다만. 크크)




제주에돌아와 여행에서 입었던 옷들을 모두 세탁했다. 건조된 옷들을 다시 차곡차곡 개어 서랍에 넣어두었다. 래시가드는 가장 아랫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대신에 원래 래시가드를 넣어두었던 수영 가방은 비워두었다. 곧 내 몸에 딱 맞는 예쁜 수영복이 들어갈 자리.  


괜히 남편에게 10년 전 그날의 일을 물었다. 그날 황금색 비키니 입었을 때 나 좀 자연스럽게 예쁘지 않았어? 남편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언제? 언제 예뻤다고? 그는 오늘도 만만치 않다. 절대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겠다는 의지. 그래도 집요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왜 그때 신혼여행 갔을 때, 나 그 때 약간 그리스 여신 느낌 아니었나?자유의 여신 막 그런 거? 그가 빠르게 답했다. 그리스 여신...? 그리스... 신전 기둥같이 보이긴 했는데.


그때 너 풍기문란죄로 신고 당할까봐 내가 자꾸 가려준거야. 자연스럽게 예쁜 게 아니라 황금색이니까 정말 아무것도 안입은 줄 알고 쳐다 본거라고. 다들 불쾌한 눈빛으로 쳐다본 건데 몰랐구나. 그때 내가 다른 사람들 눈 보호 안해줬으면 너 어글리 코리안이라고 소문날 뻔 했다 진짜...(10년 전의 진실 혹은 거짓 2탄.)




'비키니는 기세다.'  

제주의 한 수영장에서 자연스레 깨달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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