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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끄적끄적

복도 끝에 선 아이

by 승연


그날도 선도위원회가 열렸다. 교내 흡연 문제로 두 여학생이 불려왔다. 올해만 벌써 세 번째 선도위원회다. 학부모님들은 늘 그렇듯 생업에 바빠 이번에도 참석하지 못하셨다.


세 번째.

선도위원인 교사들 사이에서도 한숨이 흘렀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이 반복되지 않을지. 모두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말 없이 앉아있던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미안해서일까, 민망해서일까, 생각보다 더 무거운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이놈들, 그러게 좀 잘하지…. 눈물 고인 얼굴을 보니 마냥 탓할 수만은 없는 복잡한 마음이 밀려왔다.


잠시 후 짧은 회의를 거쳐 징계 절차가 마무리됐다. 교내흡연 건은 보통 교내 봉사 3일이지만 둘 중에 민지(가명) 같은 경우는 이미 다른 건까지 징계가 여러 번 누적된 상황이라 사회봉사로 처리했다.


민지는 북한에서 온 새터민 가정의 아이였다. 아이가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해서 주변 친구들은 전혀 몰랐다. 민지는 누구보다도 강해 보이고 싶어했다. 귀엽고 여린 외모는 진한 화장으로 감추었고 친한 친구들 외에는 항상 뚱한 표정으로 차갑게 굴었다. 수업 시간에는 대부분 엎드려 자거나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기 일쑤였다. 마치 아기 고슴도치 같았다.


학교에서 사회봉사 기관까지는 거리가 제법 멀었다. 걸어가긴 어렵고, 대중교통도 마땅치 않아 내가 퇴근길에 민지를 직접 태워다 주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민지를 기관에 데려다주고 돌아서는 길. 기분이 영 개운치 않았다. 기관 봉사활동 담당자의 태도가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사전에 연락드린 대로 ㅇㅇ중에서 사회봉사를 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마자 달라진 눈빛 그 하나 만으로도, 나는 그가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좀 초조해졌다. 아이도 같은 걸 느꼈을까 봐, 그리고 그 싸늘함을 모르고 지나갔으면 싶어서였다. 그러나 결국 담당자는 다시 한 번 티를 내고 말았다. 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결국 퉁명스럽게 잔소리를 내뱉었다.


봉사활동 하러 왔다면서요. 앞으로는 학생 복장 좀 신경 써주세요.


네에, 주의하겠습니다. 마음과 달리 비굴한 미소가 나왔다. 애써 웃으면서 황급히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좀 멀찍이 선 민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의 말을 들었을 터인데 못 들은 척 하는 것이리라. 아이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 끝에는 방과후에 자원봉사를 하러 온 옆 학교의 여학생들 한 무리가 있었다. 소녀들은 교복을 입고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연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하기사, 또래 아이들과 비교하면 민소매에 짧은 반바지, 진한 화장을 한 민지의 모습이 확실히 눈에 띄기는 했다.


민지는 평소에도 늘 눈에 띄었다. 3월 신학기부터 지각과 결석이 밥 먹듯이 잦았고 아이 주변에는 늘 크고 작은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아이의 젊은 담임 선생님은 처음부터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어느 새 교무실에서 민지의 이름이 나오면 여기저기에서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민지의 부모님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쉽지 않았다. 부모님은 생계를 위해 새벽에 나가 늦은 밤에야 집에 돌아오셨다. 그분들에게는 아이의 학교생활 적응이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북한에서 힘들게 자유를 찾아 내려오신 분들이니 아마 나로서는 감히 짐작도 못할 험난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오셨을 것이다. 다만 그분들께 아이가 학교에 늦게 온다거나 담배를 핀다고 말을 해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는 사실이 참 답답하게 느껴졌다.


민지 역시 지금의 삶이 만족스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아직 열다섯, 너무 어린 나이인데도 아이의 얼굴에는 이미 모든 걸 다 놓아버린 체념 같은 것이 보였다. 혼란스러운 걸까. 아이에게는 방과후 함께할 가족도, 친구들과 즐길 만한 건강한 공간도 없다. 집 근처에는 청소년들이 건전하게 활동할 만한 시설이나 환경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민지가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유흥가 뒷골목이나 노래방을 전전해도 그들을 뭐라 하거나 잡아주는 어른이 아무도 없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어느 날 퇴근길에 민지가 아직 집에 가지 않고 학교 복도 저 끝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친구들과 함께 댄스 영상을 찍는 중이었다. 틱톡인지 인스타인지 영상을 어디에 올리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잠깐 보는 사이에도 춤을 꽤 잘 추는 게 느껴졌다. 아이는 가끔 생글생글 웃었는데 그게 참 예뻤다. 그 예쁜 얼굴에 춤까지 잘 추니, 예고 준비라든지 가수 오디션을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 못해 교내 댄스 동아리라도 한 번 도전해보는 건 어떤지. 그러나 내가 말을 꺼내니 민지는 그저 입을 가리고 웃을 뿐이었다.


에이, 제가 어떻게 그런 걸 해요.


예의 그 포기에 익숙한 모습. 아이는 '감히', '제가요?', '못해요'와 같은 단어들을 나열했고 결국 나도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후 민지만 생각하면 항상 한결같다. 괜히 마음이 쓰이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오늘 나는 또다시 그날 복도에서 아이를 봤을 때에 느꼈던 감정이 들었다. 작고 여린 어깨에는 무력감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또다시 민지에게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고.


민지야, 선생님 갈게. 봉사활동 성실히 잘 하고.


아이는 배시시 웃었지만 그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돌아서던 내 등 뒤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죄송해요.


나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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