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는 꽤 고단했다.
도시는 시간이 갈수록 나를 조금씩 닳게 하는 것 같았다.
언젠가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는데 주인공 혜원(김태리)의 삶이 예전의 나와 겹치던 순간이 있었다. 서울의 편의점에서 일하던 혜원이 임용시험 불합격과 남자친구의 합격 소식을 듣고, 지친 기색으로 고향에 돌아가는 장면이었다. 누가 내 모습을 몰래 엿본 게 아니냐면서, 나는 한동안 그 장면에 머물러 있었다.
서울에서 지냈던 동네는 모두 네 곳이었다.
영등포에서 시작해 신촌과 홍대를 거쳐, 마지막은 노량진이었다.
처음 영등포 친척집에서 지낼 때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한강, 63빌딩, 인파로 붐비는 거리, 복잡한 지하철 환승... 낯선 풍경 속에서 보내는 매일이 새로웠다. 그 당시 사촌 동생들은 나와 같은 방을 쓰는 게 불편했을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선뜻 방 한 켠을 내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더부살이가 불편하다는 핑계로 밤 늦게 서울의 거리를 쏘다녔다. 이십대 초반, 처음 맛보는 자유로운 느낌을 왠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 마음을 잘 붙이지 못했다. 반면, 동기들은 처음부터 착실하게 캠퍼스 생활에 적응했다. 1학년부터 임용 시험에 몰두하는 모습들이 이미 완성된 선생님 같았다. 그 분위기에 어찌나 숨이 막히던지. 교사를 꿈꾸던 나였지만, 정작 진로가 확정되니 오히려 정체성에 때늦은 혼란이 찾아왔다. 시험 공부보다는 강의실 바깥의 세상에 더 눈길이 갔다.
그렇다고 해서 예쁜 카페와 맛집을 순례하고 일상을 SNS에 보기좋게 전시하는, 방학이면 해외 여행을 다니던 친구들과 결이 같다는 건 아니었다. 그럴 형편도 못되었지만, 그런 게 부러운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곧,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려 신촌과 홍대, 강남역 일대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학교 신문사에 들어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다. 틈틈이 카페나 식당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일도 했다. 어설픈 연애도 몇 번 했다.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고 영화를 보고 밥을 먹었다. 풋풋하고 서툴렀지만 그래도 좋았다. 처음하는 경험들에 가슴이 뛰고 설렜다.
그때 학교에서는 이런 말들이 바람결처럼 들려왔다.
-임고 경쟁률이 50대1을 찍었다더라.
-누구 아버지는 유명 사립학교 교장이라, 대학 졸업만 하면 바로 채용된다더라.
그때는 그랬다. 수년 전부터 안정적인 직장에의 경쟁률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래도 미리 걱정을 하기는 싫었다. 그런 말들도 일부러 웃으며 흘려들었다.
조금씩 서울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친척집을 나와 친오빠와 함께 작은 전셋집을 얻었다.
방 하나에 작은 거실이 전부인 작은 집이었다. 내가 방을 차지하고 오빠는 거실을 방처럼 썼다. 남매가 함께 사는 게 불편할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오빠가 곁에 있다는 게 참 든든했다. 그 무렵 서울의 밤이 생각보다 안전하지 않다는 걸 실감하던 중이었다.
그즈음 지하철에서 낯선 남자가 뒤를 따라오거나, 얼굴만 알던 사람이 집 앞을 서성이는 일들이 일어났다. 너무 무서웠지만 엄마가 알면 걱정하실까 봐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안그래도 엄마는 통화를 할 때마다, 서울은 고향 같지 않으니 일찍 좀 다니라며 신신당부를 해왔으므로. 만약 오빠가 옆에 없었다면 얼마나 무섭고 불안했을까. 여자 혼자 사는 것의 두려움을 더욱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쯤부터 서울에서 보고 겪는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설레지 않았다. 거주하던 전셋집, 대학가 술집, 클럽, 가벼운 인연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 그 모두가 안정적이지 않았다. 한때 자유를 만끽하던 마음은 어느새 불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저 서울 어딘가를 떠도는, 꿈도 희망도 없는 수많은 청춘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착실한 동기들이 하나둘 임용시험에 합격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거리의 불빛과 소음이 창문으로 스며드는 방 안에서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뒤늦은 사춘기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다시 집을 나와 노량진으로 향했다.
노량진 고시원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 방은 그저, 잠을 자기위한 용도에 지나지 않았다.
임용 경쟁률은 여전히 30대 1, 40대 1을 웃돌았다. 나는 연거푸 임용시험에 떨어졌다. 1차 시험에는 겨우 합격을 했지만, 2차와 3차 관문에서 번갈아 고배를 마셨다. 공부에만 전념하면 생활이 막막했고, 그렇다고 해서 돈을 벌면 공부 시간이 부족해서 마음이 불안했다. 과외와 학원 아르바이트를 최소한으로 줄여가며 버텼지만 자신감은 점점 무너졌다.
어느 날은 고시원 근처에 구급차가 멈춰선 걸 보았다. 한 수험생이 처지를 비관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말이 들렸다. 무슨 시험을 준비하던 이였을까. 경찰? 소방? 혹시 나와 같은 교원 임용 준비생?
뭐가 됐든 그도, 나도, 어차피 이 노량진이라는 섬에서는 매일 고단한 하루들을 버티는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다. 스치듯 현장을 목격한 내 안에서 무언가가 푹 꺼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깔끔하게 정리된 거리를 보며 다시 한 번 푹...
이유 모를 폭식과 단식이 시작됐다. 어떤 날은 빵과 과자를 잔뜩 사서 꾸역꾸역 다 먹어치웠지만, 또 어떤 날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스스로가 너무 형편없게 느껴졌다. 책을 들여다봐도 활자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때로는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그때였다.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그만 고생하고 집으로 내려오라 했다.
"엄마 밥 먹으면서 마음 편히 공부해."
엄마의 목소리가 물기 묻은 듯 축축했다. 그동안 힘들다 말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엄마는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듯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문득 고향의 풍경이 떠올랐다. 구수한 고향 사투리, 한때는 지루하다 불평하던 한적한 동네 풍경, 매일 느릿느릿 흘러가던 하루들... 더 이상 이 도시에서 방황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날로 서둘러 짐을 쌌다.
그렇게 6년 간의 서울살이를 접었다. 임용 공부 실패로 인한 도피라기보다는, 어떻게든 상한 마음을 회복하고 치유하기 위한 안간힘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