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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숙 Aug 29. 2024

       <위대한 개츠비>의 무대 뉴욕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의 시대 배경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가 1925년에 발표한 소설로 <모비 딕>과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고전 소설 중 하나다.

   

제1차 세계대전 승리 이후 미국 사회는 물질적으로는 엄청난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도덕적, 윤리적으로는 타락한 미국 사회의 치부를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었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에는 금주법이 있다.


미국의 금주법(Prohibition)은 1920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 전역에서 알코올의 제조, 판매, 운송을 금지한 법이다. 이 운동은 알코올이 가정 폭력, 범죄,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라는 믿음을 기반으로 시행되었는데 종교 단체와 여성 운동가들이 주도했다. 금주 운동가들은 알코올 소비를 완전히 근절하려 했고 이를 위해 국가적인 금주법 제정을 추진했다.

    

뉴욕 거리


금주법은 원래 알코올 소비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오히려 조직범죄와 밀수 활동을 촉진했다. 알 카포네(Al Capone)와 같은 갱스터들이 불법적으로 술을 밀수하고 판매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고, 이로 인해 범죄율이 급증했다.     


또한 금주법은 음주 문화를 은밀한 장소로 밀어 넣었다. ‘스피크이지(speakeasies)’라는 비밀 술집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였고 사람들은 비밀리에 모여 술을 즐겼다. 이는 기존의 공개적인 음주 문화를 지하로 숨게 만드는 한편 알코올 소비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알코올 산업에 종사하던 많은 사람이 실직했고, 정부는 알코올 판매로 인한 세수 손실을 겪었다. 그러자 금주법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결국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주도하에 21차 수정헌법이 통과되면서 금주법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 이 법의 폐지는 미국 전역에서 환영받았고 알코올 산업은 다시 합법화되었다.     


<위대한 개츠비>는 금주법이 시행되고 재즈가 유행하던 광란의 20년대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화려한 파티와 물질주의, 그 이면의 공허함을 표현하고 있는 소설의 화자는 닉 캐러웨이(Nick Carraway)다.


닉은 중서부 출신의 젊은이로 뉴욕에서 채권 중개업을 시작했다. 그는 롱아일랜드의 가상 마을인 이스트 에그에 사는 사촌 누이 데이지 부캐넌(Daisy Buchanan)과 그녀의 남편 톰 부캐넌(Tom Buchanan)을 방문하여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세상에 눈뜬다.


이 소설의 주요 배경인 웨스트 에그와 이스트 에그는 실제로 뉴욕 롱아일랜드의 북해안 지역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지역에는 지금도 대저택과 아름다운 해안선이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해변가에 있는 거대한 저택들


닉은 웨스트 에그에서 월세 80달러짜리 집에서 살고 있는데, 그의 옆집에는 개츠비(Gatsby)라는 남자의 대저택이 있었다. 닉의 이웃인 제이 개츠비(Jay Gatsby)는 자택으로 사람을 초대해 늘 화려한 파티를 열었다. 사실 개츠비는 과거 데이지와 사랑에 빠졌으나 가난한 신분 때문에 그녀와 결혼할 수 없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잊지 못해 부당한 방법으로 부와 명성을 쌓고 데이지와의 재회를 꿈꾸고 있었다.     


개츠비는 데이지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그녀가 남편의 정부 머틀 윌슨을 차로 친 것까지 자신이 했다고 말하며 모든 것을 희생하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머틀의 남편인 조지 윌슨의 총에 맞아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닉은 이 모든 사건을 목격한 후 부와 성공의 이면에 숨겨진 공허함과 허무함을 깨닫는다.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의 황금기라 불리는 1920년대의 화려함과 그 이면의 부패, 그리고 인간의 꿈과 욕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위대한 개츠비>가 주는 메시지

글은 읽는 사람에 따라 감동과 메시지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생각했다.     


아메리칸드림의 허구성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아메리칸드림의 추구와 그 허무함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제이 개츠비는 가난한 출신이지만, 부와 명성을 통해 과거의 사랑인 데이지를 되찾으려는 꿈을 꾼다.


그러나 개츠비의 꿈은 현실 속에서 허무하게 무너지고, 이는 아메리칸드림이 단순한 물질적 성공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미국 여권


과거에 대한 집착과 현재의 상실

개츠비는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현재의 삶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싶다. 그는 데이지와의 과거 사랑을 되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지만, 결국 그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는 과거에 대한 집착이 현재를 망칠 수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사회의 부조리와 계층 간의 차이

소설은 웨스트 에그와 이스트 에그, 그리고 밸리 오브 애쉬스와 같은 상징적인 장소를 통해 사회적 계층과 그 차이를 보여준다. 개츠비는 부를 쌓았지만, 그가 속한 사회적 지위는 톰과 데이지와 같은 ‘구 부자’들에게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는 계층 간의 간극과 그로 인한 사회적 부조리를 비판한다고 생각한다.     


호화로운 대저택과 베란다


사랑과 환상의 차이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했다고 믿지만, 사실 그는 데이지라는 인물보다 그녀를 통해 상징되는 부를 사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데이지는 현실 속에서 그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여인이 아니며, 이로 인해 그의 꿈은 환상이었음이 드러난다.


데이지는 자신이 낸 사고로 개츠비가 죽게 되었지만 여행을 떠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결과는 사랑과 환상이 어떻게 충돌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소설의 주 무대

엄밀히 말해 이 소설의 주요 무대는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가상 마을인 웨스트 에그(West Egg)와 이스트 에그(East Egg), 그리고 맨해튼이다.  

   

배에서 찍은 맨해튼


웨스트 에그는 닉 캐러웨이와 제이 개츠비가 사는 곳으로 ‘신흥 부자’들이 사는 지역이다. 개츠비의 화려한 저택과 그의 사치스러운 파티가 늘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스트 에그는 데이지와 톰 부부가 사는 곳으로 전통적인 부와 사회적 지위가 중요한 곳이다. 즉 웨스트 에그와 이스트 에그는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갈라놓는 역할을 한다.

   

맨해튼

이 소설의 여러 중요한 사건들은 맨해튼(Manhattan)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닉과 톰, 개츠비, 데이지 등이 맨해튼으로 나가 즐기는 시간과 중요한 갈등과 대립이 맨해튼의 플라자 호텔에서도 있었다.     


뉴욕 플라자 호텔

미국의 대표적인 고급 호텔 중 하나로, 많은 역사적 사건과 문화적 순간을 경험한 상징적인 장소다. <위대한 개츠비>뿐만 아니라 <나 홀로 집에 2> 영화도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1907년에 문을 연 플라자 호텔(The Plaza Hotel)은 맨해튼의 중심부인 센트럴파크 남쪽 끝에 있다. 주소는 768 Fifth Avenue, New York이다. 이 위치는 센트럴파크와 가깝고 미드타운의 번화한 상업 지구와의 접근성이 뛰어나다.

    

실제로 스콧은 플라자 호텔에서 장기투숙을 했다. 그는 커피숍이나 글을 쓸만한 호텔의 곳곳을 찾아 즐겨 글을 썼다고 한다. 1925년 호텔의 숙박료는 2.5달러였는데 지금은 625달러다. 당시 <위대한 개츠비> 책이 2달러였다.


플라자 호텔 커피숍과 정문


이 호텔에서 톰과 개츠비 사이의 갈등이 절정에 달하는 데 그 대목을 짚어본다. 개츠비는 데이지가 톰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만을 사랑했다고 주장한다. 톰은 이에 맞서 개츠비의 주장을 반박하고 그의 과거를 폭로한다. 이 장면은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 중 하나다.

    

여름 중 가장 무더웠던 7월 4일 전날, 플라자 호텔 2층 본관 2개 실은 숨이 막힐 정도였다.

     

“당신 아내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개츠비가 말했다.      


“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그녀는 나를 사랑해요.”


“미친 게 틀림없어!”      


톰이 자동으로 외쳤다. 개츠비는 흥분에 가득 차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내가 가난하고 나를 기다리는 데 지쳤기 때문에 당신과 결혼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끔찍한 실수였지만 그녀는 마음속으로 나 외에는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었습니다!”     


톰이 소리쳤다.      


“개츠비, 당신은 뭔가를 감추고 있어. 나는 당신의 과거를 파헤쳤어. 당신의 진짜 이름은 제임스 개츠비, 당신은 노스다코타 출신이지. 그리고 1917년에 대학을 2주 만에 그만둔 것도 알아냈어.”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개츠비가 반박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당신은 ‘옥스퍼드 맨’이 아니라, 그저 단지 당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그런 척한 것뿐이야. 그리고 당신이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알고 있소. 당신은 부정한 일을 통해 돈을 벌었어. 그것도 굉장히 비열한 방법으로 말이지.”     


개츠비는 말없이 톰을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혼란스러워하며 개츠비와 톰을 번갈아 보았다.     


“당신은 부유한 사람들을 속이고, 그들의 돈을 빼앗았어. 그리고 이제 당신이 데이지를 빼앗으려고 하는군. 하지만 당신은 결코 데이지를 사랑하지 않았어. 당신은 단지 그녀를 통해 당신의 지위를 높이려는 것뿐이었어.”


톰의 말은 데이지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더는 개츠비를 믿을 수 없었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의 얼굴은 절망으로 가득 찼다.     


이 장면은 톰이 개츠비의 정체와 그의 부의 출처를 폭로하며, 데이지와 개츠비의 관계를 압박하고 있다. 톰은 개츠비를 궁지에 몰아넣고, 데이지의 신뢰를 얻으려 한다.  


밸리 오비 애쉬스

뉴욕의 밸리 오브 애쉬스(Valley of Ashes)는 퀸즈와 맨해튼 사이에 있는 음산한 산업 지역이다. 이곳은 톰 부캐넌의 애인인 머틀 윌슨과 그녀의 남편 조지 윌슨이 사는 곳이다. 이 지역은 빈부격차와 절망을 상징하고 있다.  

  

자동차 정비소


<위대한 개츠비>는 뉴욕의 다양한 지역을 배경으로 하여 인물들의 삶과 갈등, 그리고 꿈과 좌절을 그려내고 있다. 각 지역은 인물들의 성격과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하고 있으며 소설의 주제를 더욱 깊이 있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생애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는 20세기 미국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으로 현재 그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학생들의 필독서로 읽히고 있다. 피츠제럴드의 생애와 그의 가족 그리고 에피소드를 정리해 보았다.


F. 스콧 피츠제럴드(출처 네이버)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는 1896년 9월 24일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태어났다. 그는 뉴저지의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학업은 뒤로하고 문학과 연극에 열중하는 바람에 3학년 때 자퇴했다.


첫사랑 지네브라 킹(Ginevra King)을 만난 것은 1915년이었다. 당시 피츠제럴드는 프린스턴 대학에 재학 중이었고, 지네브라는 시카고의 부유한 가정 출신의 사회적으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피츠제럴드는 그녀에게 깊이 매료되었으나 곧 입대했고 두 사람은 약 2년간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나갔다.

    

피츠제럴드는 지네브라에게 진심으로 사랑을 느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계급 차이로 인해 끝을 맺게 된다. 지네브라의 아버지는 피츠제럴드가 가난하다고 판단하여 그들의 관계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피츠제럴드는 큰 상처를 받았고, 그 상실감은 <위대한 개츠비>에 잘 녹아있다.

     

지네브라는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 부캐넌의 모델로 여겨진다. 소설에서 데이지는 개츠비의 첫사랑이자 개츠비가 평생을 바쳐 쫓는 이상적인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지네브라는 피츠제럴드와 헤어진 후 1918년에 윌리엄 미첼(W. H. Mitchell)과 결혼했다. 미첼은 시카고의 금융가로, 두 사람은 안정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네브라 역시 피츠제럴드와의 관계를 평생 잊지 못했으며, 그와의 사랑은 그녀에게도 중요한 기억으로 남았다.     


피츠제럴드와 지네브라는 1937년에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서로의 삶이 달라진 상태였다. 두 사람은 그 만남에서 과거를 회상했으나 다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만남은 피츠제럴드의 말년에 그가 젊은 시절을 돌아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피츠제럴드는 1920년에 발표된 첫 작품 <낙원의 이쪽>이 큰 성공을 거두며 문학계에 이름을 알렸다. 이 소설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자, 불투명한 미래로 파혼당했던 젤다 세이어와 결혼한다. 이후 미국 동부와 유럽을 오가며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동안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에스콰이어> 등의 신문과 잡지에 160여 편에 달하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말괄량이들과 철학자들>(1920)과 <재즈 시대 이야기들>(1922)로 묶여 출판되었다. 1922년에는 두 번째 장편소설 <아름답고도 저주받은 사람들>을 발표했다. 그리고 1925년에 발표된 <위대한 개츠비>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각 출판사에서 출간한 <위대한 개츠비> 책


사실 개츠비의 모델은 작가 자신과 상당히 유사했다. 돈이 없어서 여자한테 차였던 경험은 위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실제 피츠제럴드가 겪었던 일이다. 특히 헤어짐을 강요하던 그녀의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가난한 소년들은 부잣집 소녀들과 절대 결혼할 생각을 해선 안 된다.”     


이 말은 피츠제럴드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래서 후일 피츠제럴드는 사치스러운 생활에 집착했다는 후문이 있다. 물론 모든 소설이 그렇듯이 피츠제럴드 자신만을 모델로 삼은 것은 아니다. 개츠비는 당시 1920년대에 뉴욕에서 실제로 밀주를 팔아 부호가 된 남자 조지 리무스 이야기가 들어 있기도 하다.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를 호기롭게 출판했다. 그러나 출간 당시에는 책이 팔리지 않았다. 초판을 2만 부나 찍었으나  인세로 받은 돈은 100달러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30년 대가 되어 간신히 초판을 소화하고 2쇄를 찍었는데 2쇄는 더욱 팔리지 않아서 그가 사망할 때까지 창고에 쌓여있었다.     


책이 팔리기 시작한 것은 피츠제럴드가 1940년에 사망하면서 전기가 발행되고 그때부터 <위대한 개츠비>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위대한 개츠비>를 15만 부 사들여 군인들에게 나누어준 것도 한몫했다. 전쟁이 끝나자 전장에서 읽은 책은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작가 피츠제럴드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기에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들과 정서적으로 비슷했던 것도 이 책이 공감대를 형성한 계기가 되었다.


결국 <위대한 개츠비>는 그의 사후에 엄청나게 팔렸고 현재에도 1년에 30만 부씩 팔려나가는 미국의 고전이 되었다.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는 1920년대 중반부터 유럽, 특히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시기는 <재즈 시대>의 화려함과 그 이면의 공허함을 체험한 시기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피츠제럴드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그리고 아내 젤다의 정신병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된다.


1934년 9년 만에 장편소설 <밤은 부드러워>를 출간했다. 이 작품은 훗날 걸작으로 평가받지만, 발표 당시 세간의 평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그는 1937년 할리우드로 이주하여 영화 대본 작가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 시기에 여러 편의 대본을 작성했지만, 영화 산업과의 갈등으로 인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의 할리우드 경험은 미완성 소설 <라스트 타이쿤>에 반영되어 있다.

피츠제럴드의 서명과 묘비(자료 네이버)


피츠제럴드는 1940년 12월 21일 할리우드 영화계의 이야기를 담은 <마지막 거물의 사랑>을 집필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현재 <위대한 개츠비>는 ‘타임 선정 20세기 영문학 100선’에 선정된 불멸의 걸작으로 사랑받고 있다.   

  

피츠제럴드의 가족

아내 - 젤다 피츠제럴드

젤다 세이어는 1900년 7월 24일,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지역의 저명한 판사였던 아버지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가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젤다는 어린 시절부터 활달하고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으며 춤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젤다는 1918년에 장교로 복무 중이던 피츠제럴드를 처음 만났다. 피츠제럴드는 젤다에게 깊이 매료되었고, 젤다 역시 피츠제럴드의 매력에 빠졌다. 두 사람은 짧은 연애 끝에 약혼했으나, 피츠제럴드의 경제적 불안정 때문에 결혼을 연기했다.     


피츠제럴드의 첫 소설 ‘낙원의 이쪽’이 성공을 거둔 후, 두 사람은 1920년 4월 3일에 결혼했다. 그들은 곧 뉴욕으로 이주하여 화려한 사교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 시기는 피츠제럴드와 젤다가 ‘재즈 시대’의 상징적인 커플로 자리 잡은 시기였다. 그들은 화려한 파티, 유럽 여행, 화려한 생활을 즐기며 1920년대를 보냈다.

 

이 화려한 삶은 피츠제럴드의 알코올 중독과 젤다의 정신적 불안정으로 인해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주 다투었고, 젤다는 피츠제럴드가 자신의 창작 아이디어를 도용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젤다는 피츠제럴드와의 결혼 생활 중에 글쓰기를 지속했다. 그녀는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여러 편 발표했으며, 1932년에는 자전적 소설 <세이브 미 더 월츠(Save Me the Waltz)>를 출간했다.


이 소설은 젤다의 삶과 결혼 생활을 반영한 내용으로, 그녀의 예술적 야망과 피츠제럴드의 복잡한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세이브 미 더 월츠>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이 자신의 작품 <밤은 부드러워>의 소재를 훼손했다고 생각하여 젤다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젤다 피츠제럴드(출처 나무위키)


젤다는 화가로도 활동했다. 그녀는 유화와 수채화를 즐겨 그렸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열었다. 젤다의 작품들은 그녀의 내면세계를 반영하여 밝고 환상적인 색채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녀의 예술적 성취는 남편의 명성에 가려져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젤다는 1930년대 초반에 정신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녀는 신경쇠약과 조울증 증상을 보였으며, 여러 차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젤다는 정신병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지만, 그녀의 상태는 점차 악화하였다.

    

그녀의 정신적 문제는 피츠제럴드 부부의 관계에 큰 부담이 되었고, 피츠제럴드는 젤다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할리우드에서 영화 대본 작업을 하기도 했다.     


젤다는 1948년 3월 10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의 하이랜드 병원에서 화재로 사망했다.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에 비극적인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죽음은 당시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녀의 삶과 예술에 관한 관심은 사후에 더욱 커졌다.

    

젤다 피츠제럴드는 사후에 그녀의 예술과 문학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과 그림은 여성 예술가로서의 독립성과 자기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한 작품으로 인식되었다.

     

딸 - 프랜시스 스코티 피츠제럴드

피츠제럴드 부부는 딸 스코티를 두었다. 스코티는 1921년 10월 26일에 태어났으며, 그녀 역시 작가로 활동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컸으며, 부모의 영향으로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스코티는 베일리 스쿨과 배서 대학교를 졸업했고 졸업 후 워싱턴 포스트에서 언론 기자로 활동했다.     


스코티는 아버지 피츠제럴드와는 달리 소설보다는 에세이와 비평을 주로 썼다. 그녀는 다양한 잡지와 신문에 글을 기고했으며, 특히 사회 문제와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스코티의 글은 그녀의 지적 호기심과 사회적 책임감이 반영된 내용이 많다.


가족사진, 1928년 프랑스 해변(출처 네이버)


아버지 피츠제럴드가 1940년에 사망한 후, 그의 작품들은 점차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스코티 역시 아버지의 명성을 통해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스코티는 1943년에 사무엘 잭슨 래너한과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이혼했다. 이후 스코티는 주로 메릴랜드에서 생활하며, 사회활동과 글쓰기를 이어갔다.


그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아버지의 작품과 관련된 여러 기획에 참여했으며, 피츠제럴드의 유산을 보존하고 알리는 데 힘썼다. 그녀는 1986년 6월 16일, 워싱턴 D.C. 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영화로 상영된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1926년 버전

감독: 허버트 브레논(Herbert Brenon)

주요 배우: 워너 백스터(Jay Gatsby), 로이스 윌슨(Daisy Buchanan)     


이 버전은 최초로 영화화된 <위대한 개츠비>로 무성 영화 시대에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현재 유실된 상태로 단편적인 스틸 사진과 몇 가지 기록만 남아 있다. 당시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특징: 무성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원작의 복잡한 서사와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한 도전이 컸다.     


<위대한 개츠비> 1949년 버전

감독: 엘리엇 누겐트(Elliott Nugent)

주요 배우: 앨런 래드(Jay Gatsby), 베티 필드(Daisy Buchanan)     


이 버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제작되었는데 어두운 분위기와 필름 누아르적인 스타일이 특징이다. 앨런 래드가 주연을 맡아 개츠비의 쓸쓸하고 고독한 면모를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징: 영화가 미국의 검열 기준에 맞추어 원작에서 일부 내용을 수정했으며,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했다.

    

<위대한 개츠비> 1974년 버전

감독: 잭 클레이튼(Jack Clayton)

주요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Jay Gatsby), 미아 패로우(Daisy Buchanan)     


이 버전은 <대부>의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각본을 맡았는데 원작에 충실한 각색으로 유명하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기한 개츠비는 고전적이고 우아한 매력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미아 패로우는 섬세한 데이지를 연기했다.     


특징: 화려한 의상과 세트 디자인이 돋보였고 당시 복고풍 유행을 반영했다. 이 버전은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했다.     


<위대한 개츠비> 영화 포스터


<위대한 개츠비> 2013년 버전

감독: 바즈 루어만(Baz Luhrmann)

주요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Jay Gatsby), 캐리 멀리건(Daisy Buchanan)     


이 버전은 화려한 시각적 스타일과 현대적인 음악 사용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바즈 루어만 감독은 1920년대의 분위기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였으며, 영화는 3D로 제작되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개츠비는 강렬하고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특징: 1920년대 재즈 시대의 화려함을 강조하는 동시에 현대적 요소를 접목한 독특한 스타일이 돋보였다.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의상상과 미술상을 받았다.     


그렇다면 <위대한 개츠비>를 가장 잘 만든 영화는 어떤 버전일까?


많은 평론가와 관객들이 1974년 버전과 2013년 버전 중 하나를 최고의 영화로 꼽는다. 1974년 버전은 원작에 충실한 각색과 로버트 레드포드의 인상적인 연기로 인해 오랫동안 <위대한 개츠비>의 대표적인 영화로 여겨졌다.


이 영화는 원작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캐릭터의 심리를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3년 버전은 바즈 루어만의 독특한 스타일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강렬한 연기로 인해 큰 인기를 끌었다. 또 현대적 감각을 더해 원작을 재해석하려는 시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시각적 효과와 화려한 연출로 주목받았다.

    

결국 어떤 버전이 가장 잘 만들어졌는지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원작의 충실함과 서정적인 분위기를 선호한다면 1974년 버전이, 현대적이고 화려한 스타일을 선호한다면 2013년 버전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나는 1974년 버전과 2013년 버전 영화를 보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로버트 레드포드의 원숙한 연기를 좋아하는지라 1974년 버전이 더 감동적이었다.

   

소설의 결말

이 소설의 말미는 개츠비의 화려한 생활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개츠비가 죽자 닉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할 사람들을 열심히 물색했다. 하지만 개츠비의 밀수업 동업자이자 조직 폭력계 두목인 마이어 울프심(Meyer Wolfsheim)조차 개츠비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에 함께하기를 거절한다. 데이지는 톰과 여행을 떠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개츠비의 아버지인 헨리 개츠(Henry Gatz)가 아들의 장례식에 왔고 그는 여전히 과거를 추억하고 있었다. 그는 닉에게 개츠비의 집이 찍힌 닳아빠진 사진과 개츠비가 어렸을 적 쓴 계획표를 보여준다.

     

살아생전 개츠비를 찾아 열광하던 그 많던 인맥은 온데간데없고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닉, 헨리 개츠, ‘부엉이 눈’, 몇 명의 개츠비 집사가 전부였다.


장례식을 치른 후 닉은 톰, 데이지와 연락을 끊은 뒤 실망과 환멸에 빠져 뉴욕을 떠나고 중서부로 돌아간다.

 

고향으로 돌아간 닉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되는데, 주치의에게서 치료 과정의 하나로 추억을 회고해 볼 것을 권유받는다.


개츠비에 대한 회고문을 작성한 닉은 고민 끝에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을 써넣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개츠비는 과연 위대한가?

이 소설의 신드롬으로 인해 개츠비스크(Gatsbyesque)란 말도 유행했다. 뭔가 요란하면서 과장된 스타일을 가리키거나 환상적인 힘으로 인생을 긍정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인데 대체로는 전자의 의미로 쓰인다.     


개츠비의 이름을 딴 일본의 남성 화장품 브랜드 개츠비가 있다.     


또 역사상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소설 원고 <위대한 개츠비>는 2013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 작가의 손으로 쓴 노트와 수정본 원고가 나왔다. 낙찰가는 340만 달러, 한화로 약 44억 2천만 원에 달한다.

    

얼핏 이 소설은 톨스토이가 쓴 <인간에게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를 떠올리게 했다. 목숨을 걸고 욕심껏 땅을 차지해도 결국 인간이 차지하는 땅은 자신이 누울 정도의 땅이면 족하다.


개츠비가 그 많은 사람과 파티를 열고 인맥을 쌓았지만 결국 그의 장례식은 초라할 정도였다. 아마 그런 맥락에서 문득 톨스토이의 소설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책은 <위대한 개츠비>에서 ‘위대한’이 왜 붙었는지 갑론을박이 많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개츠비는 과연 위대했나? 과연 ‘위대한’이 붙는 게 맞는가? 하는 질문을 나도 던져본다.


이 질문에 관한 답을 댓글에 적어주는 것도 좋을 듯하다.

  

메가 버스를 타고 뉴욕으로

워싱턴에서 뉴욕을 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교통수단이 있다. 비행기, 기차, 승용차, 버스 등이다. 그중에서 우리는 메가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주 오래전 뉴욕을 갈 때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탄 적이 있었는데 그리 오랜 시간 걸리지 않은 생각이 나서였다.


나는 즉시 메가 버스 사이트로 들어가 티켓을 끊으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결제단계에서 에러가 났다. 현지인 주소를 넣으면 되나 싶어 오빠 주소를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몇 번인가 실패를 거듭하다가 티켓 사기를 포기했다.

 

이제 방법은 터미널에서 직접 표를 끊는 것밖에 없었다. 혹여라도 표가 없으면 빈자리가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했다. 조금 위험성이 있었지만, 숙박을 예약했기 때문에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서라도 내일은 출발해야 했다.

    

잠을 자려고 막 누웠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아들이었다.

    

“엄마, 메가 버스 예약이 됐어.”     

“어떻게 했어?”     

“그냥 다른 사람이 올려놓은 계정으로 들어가서 했어. 대신 수수료를 물었어.”     


표를 구했다는 말에 안심하고 잠을 청했다. 메가 버스 요금은 고무줄 요금이었다. 방금 전의 가격과 5분 후 결제 가격이 달랐다. 조금이라도 먼저 끊으면 싸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처음 검색 보다 나중 요금이 더 싸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새벽 우리는 워싱턴 DC로 향했다. 새벽인데도 고속도로는 차가 붐볐다. 오빠는 여러 명이 타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하이웨이를 이용해 우리를 유니언 스테이션에 내려주었다.

    

“잘 찾아갈 수 있겠지? 들어가면 중앙에 에스컬레이터가 있는데 그걸 타고 올라가.”     

“걱정하지 마, 잘 다녀올게요.”     

“그래, 도착하면 연락해. 올 때도 출발하면서 연락하면 데리러 나올게.”   

  

오빠는 마치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이제 아들과 딸, 그리고 내가 3박 4일 뉴욕 여행을 책임져야 했다.     


메가 버스 타는 곳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짐을 부치기에 나도 짐을 부치려고 했는데 짐을 받아 넣는 손길이 거칠었다. 가방을 받아 짐칸에 넣을 때 그냥 슬며시 밀어도 될 것을 던지다시피 하기에 왠지 나까지 던져지는 느낌이 들어서 가방을 들고 버스에 탔다. 우리는 일정이 길지 않아서 각각 배낭 하나씩이 전부였다.


     

메가버스 2층 내부와 차창 밖, 지붕은 통창이다.


이층 버스였다. 아이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2층으로 올라갔다. 나도 따라 올라갔다. 생각보다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서 아들은 혼자 앉고 나는 딸과 함께 앉았다. 버스 천장은 통창으로 되어있어 하늘과 구름이 보였다. 2층은 1층보다 흔들림이 심했지만 멀미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버스는 곧 출발했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 구글 지도에 목적지인 뉴욕을 입력했다. 버스가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 휴대폰을 보면 알 수 있어서 참 편리했다.

     

워싱턴에서 뉴욕까지는 버스로 4시간 35분 정도 걸렸다. 버스를 타기 전에 물과 커피를 산 것은 다행이었다. 버스는 한 번도 휴게소에 쉬지 않고 달렸다. 물론 뒤쪽에 화장실이 있었지만, 왠지 찝찝해서 가지 않았다.

     

뉴욕에 도착한 뒤 찍은 사진


중간에 볼티모어 등에서 몇 번 승객이 내리고 타기는 했으나 잠시 쉬려고 내려는 것은 되지 않았다. 바깥 구경을 하면서 휴대폰을 열어 아, 여기가 어디구나 하면서 가다 보니 그리 지겨울 새도 없었다.


베슬(The Vessel)

버스 종점은 뉴욕시 Javits Center 근처 11th Ave와 12th Ave 사이의 34th St였다. 우리 숙소인 힐튼 호텔을 찍어 보니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어떻게 할까? 일단 택시 타고 숙소에 가서 짐 풀고 점심을 먹을까?”

“어차피 체크인 시간이 남았으니까 점심 먹고 가요.”     


우리는 배가 고파서 근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낯선 도시를 천천히 걸었다. 그런데 바람이 어찌나 찬지, 얼른 모자를 뒤집어썼다.


하필이면 바람이 우리가 걷는 쪽으로 불어와 모자가 자꾸 벗겨졌다. 안 그래도 패딩을 입을까, 반코트를 입을까 고민하다가 사진 찍을 걸 생각해서 코트를 입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뉴욕은 워싱턴보다 훨씬 더 추웠다. 특히 빌딩이 밀집해 있는 곳은 빌딩풍 때문에 바람이 더 세게 불었다.


가는 길에 왼쪽을 보니 낯익은 구조물이 보였다. 우리의 여행 목록에 있는 베슬이었다.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베슬을 우연히 마주치다니? 이게 웬 횡재인가 싶었다.


벌집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구조물 베슬


맨해튼 서쪽에 위치한 허드슨 야드 개발 지구의 중심부에 있는 건축물 베슬은 2019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 건축물은 영국의 유명 디자이너 토마스 헤더윅과 그의 디자인 팀에 의해 설계되었다.


베슬은 꿀벌의 벌집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구조로, 높이가 약 46미터(150피트)에 달한다. 이 건축물은 총 16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54개의 계단과 2,500개의 계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인 형태는 마치 뒤집어진 피라미드처럼 보인다.


베슬은 브론즈 색의 반사되는 금속 패널과 유리로 구성되어 있어  외부는 주변의 도시 풍경을 반사해 다양한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특히 독특한 외관은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베슬의 계단을 오르면 허드슨 야드와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다양한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보는 전망은 각 층마다 다른데 허드슨 강과 맨해튼의 경치를 동시에 즐길 수 있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베슬은 최근 그 구조와 계단 때문에 안전 문제로 몇 차례 폐쇄된 적이 있다. 베슬에 올라 자살하는 사람이 있어서였다. 그래서 지금은 계단을 오를 수 없었다. 아쉽지만 사진만 남겼다.

 

파이브 가이즈의 감자튀김

조금 걷자 파이브 가이즈가 보였다.

    

“엄마, 우리 저기 가자.”


아들이 갑자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추워서 일단 어딘가로 들어가고 싶던 차에 얼른 따라 들어갔다.


나는 햄버거가 싫어서 아이들 것만 두 개 시키고 감자튀김을 세 개 시켰는데 이게 웬일인가? 감자튀김이 커다란 봉투에 반 넘어 담겨있었다. 하나만 시켜 셋이 먹어도 못 먹을 만큼 양이 많았다.


우리는 그냥 웃었다. 가격은 49.52달러 66,000원이었다. 다 먹지 못한 감자튀김을 버리면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이브 가이즈

파이브 가이즈에서 나와 뉴욕 시내를 걸어 힐튼호텔까지 도착했다. 날씨는 여전히 추웠지만, 배가 불러서인지 조금 전보다는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다.


체크인 시간은 아직 1시간이 남았는데 친절하게 방을 내주었다. 방도 깨끗하고 도시 뷰뿐이었지만 32층이라 볼만했다.

     

걸어서 차이나타운까지

단단히 옷을 입고 뉴욕 시내를 걸어보기로 했다. 사실 여행을 가서 걷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이다. 걸으면 기억에 더 오래 남기도 하고 여유를 가지고 둘러볼 수 있다.


뉴욕은 처음 오는 곳이 아니어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자유의 여신상, 센트럴파크 등 어지간한 명소는 다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뉴욕의 거리를 그냥 목적 없이 걸어보기로 했다.


날씨가 좋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건 내 소관이 아니었다. 다만 주어진 날씨에 감사할 뿐.

     

우리는 차이나타운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숙소에서 나와 차이나타운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서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힐튼호텔에서 42번가를 따라 이동하니 브라이언트 파크(Bryant Park)가 나왔다. 이곳은 뉴욕 공립 도서관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다.


공원 옆에 뉴욕 공립 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이 보였다. 유명한 사자 동상이 도서관 앞을 지키고 있었다.

   

42번가를 따라 차이나타운까지 걷다 찍은 사진들


계속 42번가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5번가를 타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으로 갈 수 있는데 이미 가 본 곳이라 한 블록 떨어져서 사진만 찍었다.      


조금 더 가니 독특한 삼각형 모양의 플랫아이언 빌딩(Flatiron Building)이 보였다. 이 빌딩은 뉴욕에서 가장 독특한 건축물 중 하나다.     


어지간히 걸었다고 생각될 때 갑자기 거리가 화려해져서 살펴보니 소호(SoHo) 지역이었다. 소호는 예술 갤러리, 패션 부티크, 카페들이 밀집한 지역으로 쇼핑과 거리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나는 다리가 아파서 커피숍에 들어가서 쉬고 아들과 딸은 소호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왔다.


소호 거리


조금만 더 가면 차이나타운(Chinatown)인데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해가 떨어지는 시간이 매우 짧았다.


소호에서 차이나타운까지는 거리가 적막하고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 많던 사람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갑자기 거리가 한산했다. 어두컴컴해지는 거리에 우리 셋만 걸어가니 덜컥 겁이 났다.     


“빨리 가자. 사람이 없으니까 겁난다.”     


내 말에 아들이 대답했다.     


“이제 거의 다 와 가요. 그렇게 빨리 걷지 않아도 돼요.”


그로부터 10분을 더 걸었는데 차이나타운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제대로 가는 거 맞니?”     

“맞아. 저 모퉁이만 지나면 차이나타운이야.”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언젠가 이탈리아 거리에서 날은 저물고 근처에 다른 사람이 없는데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한 무리 외국인들이 얼마나 무섭던지,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만약 그때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었다면 우리가 가진 여권과 돈을 뺏기는 건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마주칠 사람이 무서웠다.  

 

   

차이나타운 거리


괜히 걸어왔다는 후회가 일었다. 마음 졸이며 걷다 보니 불야성의 차이나타운이 보였다. 사람이 많아지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우리는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지하철을 이용해 숙소로 돌아왔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다음날의 목적지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센트럴파크였다. 세계 예술에 심취한 아들이 처음부터 뉴욕에 가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가야 한다고 강조했기에 순순히 따라갔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은 흔히 메트(Met)라고 부른다. 1870년에 설립되어 1872년에 처음으로 문을 연 이 미술관은 센트럴파크 옆에 있으며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미술관의 컬렉션은 전 세계 다양한 시대와 문화의 예술품들을 아우르며, 총 소장품 수는 약 200만 점에 이른다.


메트로폴리탄 정문

    

이곳에는 드가의 <춤추는 무용수들>, 두치오 디 부오닌세냐의 <성모자상>,  반고흐 <자화상> 그 외에도 마네, 모네, 드가, 르노아르, 피카소, 마티스, 클림트  등 내로라하는 대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워낙 넓기 때문에 자세히 보려면 최소 이틀은 걸린다고 하는데 주요 작품이 몰려있는 중세 미술관만 둘러보아도 좋다고 들었다.



중세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아이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들어가자 아들의 눈은 바빠졌다. 안내도를 받아 펼치더니 여기도 가야 하고, 여기도 가야 하고 하면서 동그라미를 쳤다.


나도 이곳에서 꼭 봐야 할 그림이 있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중세 미술관에서 두치오의 <성모자상>은 꼭 보고 싶었다.


<성모자상>은 2004년에 이 미술관에서 약 4,500만 달러에 사들였는데 이 가격은 중세 회화 작품으로는 가장 비싼 금액이다. 그림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500억이나 되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반고흐의 <자화상>도 꼭 봐야 할 그림이었다. 솔직히 나는 그림에는 문외한이었지만 몇 시간 정도는 둘러볼 의향이 있었다.


문제는 그림에 관심이 없는 딸이었다. 아무리 좋은 클래식 음악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자장가에 불과하듯 딸에게 박물관은 그런 의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1시간이 지나지 않아 재미없어서 나가고 싶다고 했다. 아들은 우리와 함께 있으면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 없으니 헤어져서 보고 나중에 만나자고 총총 사라졌다.

 

박물관 입구 근처에 있는 미술품


나는 밖으로 나가는 딸에게 입장료가 아깝다고 투덜댔다. 우리가 낸 요금은 학생 요금을 포함해 77달러, 10만 원이 약간 넘는 금액이었다. 딸이 나가고 나서 나도 한 시간을 더 보았지만, 다리도 아프고 혼자 밖으로 나간 딸도 걱정이 되었다.      


전화를 걸어보니 밖에 카페가 없어서 기념품 매장에서 구경 중이라고 했다. 할 수 없이 나도 밖으로 나갔다. 딸을 만난 후 직원에게 커피를 어디서 먹을 수 있는지 물었더니 안으로 다시 들어가면 된다고 했다.


순간 아, 괜히 나왔다 싶었는데 입장권이 있으면 다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입장권을 보여주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커피숍을 찾았다.


커피와 과일,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꼭 봐야 할 그림이 있는데 아직 못 봤으니 같이 찾아보자고 구슬렸다. 어차피 아들이 나와야 함께 움직일 수 있기에 박물관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들은 배도 고프지 않은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중세관을 찾아가는 길에 아들을 만났다. 얼마나 반갑던지, 아들은 아직도 볼 게 좀 남아 있다고 했다.     


“성모자상 봤니?”

“봤어.”

“어디야? 미로 같아서 나는 아무리 둘러봐도 못 찾았는데.”     


아들은 그새 길을 다 익혔는지 이방 저 방을 지나 쉽게 성모자상 앞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생각보다 너무 작다.”


다른 그림에 비해 성모자상은 훨씬 작았다. 그런데 아무리 요리조리 뜯어봐도 도무지 이 그림이 뭐가 그렇게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돼지 목에 진주 꼴이었다. 아무튼 찾느라 고생했으니 사진을 남겼다.  


성모자상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림의 저자 두치오는 중세 이탈리아 회화에서 중요한 인물로, 비잔틴 양식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스타일을 대표한다.


그의 작품은 당시 전통적인 비잔틴 양식의 평면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에서 벗어나, 좀 더 인간적이고 감정이 풍부한 인물 묘사를 시도했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따뜻한 유대감을 부드러운 곡선과 색채로 표현하였다.

 

두치오의 작품들은 시에나 미술 학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 작품은 그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두치오의 스타일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이후의 이탈리아 미술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러한 역사적 맥락 때문에 두치오의 <성모자상>은 특히 가치가 높다.     


작품의 해설을 읽어도 역시 나는 모르겠다. 그림 공부도 좀 해야 이 무식함을 덜겠다는 생각을 했다.      


“반고흐 자화상은 어디 있니?”

“따라와.”


아들은 마치 박물관 안내원이라도 된 듯 몇 개의 방을 거쳐 우리를 자화상 앞으로 안내했다.


그곳은 자화상뿐만 아니라 반고흐의 다른 그림도 걸려 있었다. 그래도 아는(?) 그림이 나오니 왠지 반가웠다.


 

고흐 자화상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우리는 아들과 다시 헤어졌다.     


“엄마, 1시간만 더 보고 나갈게요.”

“그러면 우리는 나가서 기념품 매장에 있을게. 그리로 와.”     


딸과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나오는 길에 이집트관을 지나게 되었는데 거대한 조각품들이 웅장하고 신기해서 둘러보았다.


  

이집트관


기념품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엽서, 냉장고에 붙일 마네모네의 마그넷, 피카소 달력 몇 개를 샀다. 딸은 에코백을 샀다.


얼마 후 아들이 나왔다.      


“배 안 고파?”

“배고파.”

“여기는 샌드위치하고 조각 과일밖에 없어.”

“난 나가서 먹을래.”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엄마, 우리 저녁에 첼시에 가서 랍스터 먹을 거지요?.”     


우리의 여행 목록에 첼시에 가서 랍스터 먹기가 있었다.     


“응, 갈 거야.”

“그러면 점심은 간단히 먹을래.”     


아들은 푸드트럭에서 핫도그를 샀다. 메트로폴리탄 계단에 앉아 핫도그를 먹는 아들, 근사해 보였다.      


센트럴파크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아들의 영역이 미술관이라면 센트럴파크는 나의 영역이었다. 이번에는 내 걸음이 빨라졌다.


그 유명한 센트럴파크는 뉴욕 맨해튼 중심부에 있는 대규모 공원으로, 도시 속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상징적인 장소다. 1873년에 완공된 이 공원은 프레드릭로 옴스테드와 칼버트 보라는 두 명의 조경 디자이너에 의해 설계되었다.      


센트럴 파크의 굵은 나무둥치


센트럴파크는 약 3.41 km²(843 에이커, 약 403,820평)에 달하는 면적으로 다양한 풍경, 호수, 산책로, 정원, 스포츠 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센트럴파크는 도시 속에서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녹지 공간으로, 숲, 잔디밭, 인공 호수,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설계자들은 다양한 식물과 나무를 심어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경관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센트럴파크 안에는 유명한 명소들이 많다. 베데스다 테라스와 분수, 잔디밭으로 유명한 그레이트 론,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저수지, 스트로베리 필즈 등이 대표적이다. 또 센트럴파크 동물원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공원 근처에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공원은 뉴욕 시민들에게 스포츠와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조깅, 자전거 타기, 산책, 피크닉, 그리고 겨울철에는 아이스 스케이팅 등의 활동을 할 수 있다. 또 다양한 축제와 행사도 열리는 문화의 중심지다.     


무엇보다 센트럴파크는 단순한 공원을 넘어 뉴욕 시민들에게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바쁜 도시 중 하나인 이 도시에서 센트럴파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쉼터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센트럴파크 공원


우리는 센트럴파크 공원으로 들어갔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옆 센트럴파크는 동쪽 부근이다. 이곳은 브라이언트 파크로 불리는데 아름다운 정원과 넓은 잔디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얼마 만에 오는 센트럴파크인지 생각해 보았다. 10여 년 전인 것 같다. 센트럴파크는 여전히 평온했다. 탁 트인 잔디밭이 우선 숨통을 트이게 했다. 나무들의 둥치도 엄청나게 컸다. 특이하게 한겨울인데 잔디가 푸릇푸릇한 곳이 많았다.

      

어디선가 부산한 새소리가 들렸다. 한 나무에 참새처럼 생긴 새가 20여 마리 앉아 있었다. 유독 그 나무에만 새가 많은 게 신기했다. 평소 보기 힘든 광경이어서 동영상을 찍었다. 새소리가 청아했다.

 

새의 아지트일까? 유독 이곳에만 새가 많았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개들은 만나면 서로 킁킁 냄새를 맡고 관심을 표하고 주인들도 잠깐씩 서서 대화를 나누었다. 나야말로 여기서 밤이라도 샐 기세로 이곳저곳을 다녔다.     


“엄마. 가자.”     


결국 아이들의 성화에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어디로 갈까? 첼시?”

“난 못 가. 힘들어. 난 숙소에 가서 좀 쉴래.”     


방전된 딸은 더는 못 간다고 주저앉았다.     


“그러면 지하철 타고 엄마랑 너는 숙소에 가서 쉬어.”

“내가 첼시에 가서 랍스터 포장해 올게.”     


아들의 제안은 솔깃했다.     


“혼자서 괜찮겠어?”

“응. 이제 지하철 타는 법 완전히 익혔어.”


처음 지하철을 탈 때 표를 사느라 애를 먹었다. 표는 자동판매기에서만 살 수 있었는데 입력할 게 많았다. 현지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것도 있었는데 이것저것 다 눌러도 되지 않았다.


아들이 안내원을 데리고 왔다. 안내원이 혹시 신용 카드가 있느냐고 물었고 아들이 카드를 보여주자 뒷면에 와이파이 표시가 있으면 현지에서도 교통카드로 쓸 수 있다고 했다.     


각자 가진 카드를 꺼내 살펴보았다. 다행히 와이파이가 찍힌 카드가 있었다. 그 뒤로 대중교통 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숙소가 있는 42번가 역


우리는 42번가에서 내리고 아들은 계속 타고 갔다. 숙소에 들어와 늘어져서 쉬고 있는데 그로부터 2시간쯤 지난 뒤에 아들이 왔다.     


랍스터 하나와 랍스터가 잔뜩 들어있는 샌드위치 두 개가 143불, 19만 원이었다. 오 마이 갓, 그런데 맛은 있었다. 맛도 없었으면 소화제를 사 먹을 뻔했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녁으로 먹은 랍스터


저녁을 먹은 뒤 우리는 타임스 스퀘어로 나갔다. 타임스 스퀘어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가는 길 내내 사람들이 많았고, 도착해도 사람들이 많았다.


한여름이라면 빨간색 매표소 앞 계단에서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먹고 싶었지만 적당히 사진을 찍고 길거리에서 묘기를 부리는 공연을 구경했다.


호텔로 들어가는 길에 아이들은 파파이스 치킨을 샀다. 그러더니 조스의 피자를 뉴욕에서 꼭 먹어야 한다며 줄 서서 피자를 한 판 또 샀다. 미국 피자는 크기도 어마어마한데 치킨에 피자를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었다. 하긴 저녁에 먹은 랍스터가 배부르지는 않았지만 참 잘 찾아 먹는다 싶다. 쇼핑센터 몇 군데를 더 구경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타임스 스퀘어의 화려한 광고판


타임스 스퀘어 근처 상점


스태튼 아일랜드 페리(Staten Island Ferry)

다음 날은 배를 탔다.


뉴욕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인기 있는 배는 스태튼 아일랜드 페리 (Staten Island Ferry)와 리버티 아일랜드 페리(Liberty Island Ferry)다. 두 배 모두 자유의 여신상을 보기에 좋은 방법이지만 각각의 특징이 조금 다르다.

     

먼저 스태튼 아일랜드 페리는 낮에는 약 15~30분, 밤에는 30분에서 1시간 간격으로 있었다. 소요 시간은 편도 25분, 왕복은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아일랜드 패리는 자유의 여신상에 내려서 그곳을 둘러볼 수 있다. 아일랜드 패리는 몇 번 타 본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스태튼 아일랜드 페리를 타기로 했다. 배도 커다랗고 좋은데 무료로 운행되었다.

     

출발지는 맨해튼 화이트홀 터미널(Whitehall Terminal)에서 출발하여 스태튼 아일랜드(Staten Island)로 이동했다. 우리는 지하철을 이용해 화이트롤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 배는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섬에서 맨해튼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배려해 운항하는 배였다.     

배가 출발하자 맨해튼이 한눈에 보였다. 멀리 떨어져서 보는 맨해튼은 꽤 멋진 그림이었다.     


가는 도중 자유의 여신상도 보였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배 안에서 찍은 자유의 여신상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내렸다. 대부분 관광객은 배에서 내려 다음 배로 바로 돌아갔다. 우리는 엠파이어 아울렛(Empire Outlets)을 둘러보려고 내려서 걸어갔다. 선착장에서 보이는 아울렛은 걸어서 5분 정도였다.

     

아울렛 치고는 그렇게 넓지 않았으나 리바이스, 폴로, 라코스테, 나이키 등 아이들이 좋아할 매장은 갖추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아이들과 함께 쇼핑하다가 나는 스타벅스가 보여서 들어갔다. 내가 좋아하는 매장은 없었다. 그리고 이미 버지니아에서 리즈버그 아울렛에 다녀왔기에 더 사고 싶은 물건도 없었다. 아니, 더 사면 안 된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울렛 내부

     

아들은 모처럼 마음에 드는 물건이 많았는지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나왔다. 보니 청바지와 운동화, 청재킷이었다.


다시 배를 기다려 시내로 들어와 점심을 먹었다. 이제 한 군데만 더 보기로 했다. 브루클린 다리를 갈 것이냐? 리틀 아일랜드 옆에 있는 하이라인을 갈 것이냐? 나는 더 가고 싶은 곳이 없어서 아이들에게 맡겼다. 한참 의논하던 아이들은 브루클린 다리를 가자고 했다.     


일단 브루클린 다리는 걸어서 약 25분이면 갈 수 있어 더 가까웠다. 하이라인은 폐철도를 공중 공원으로 재탄생시킨 곳으로 최근 관광객들이 많이 몰렸다.

     

“나는 어제 랍스터 사러 첼시마켓 갔다가 하이라인 가봤어.”     


브루클린 다리(Brooklyn Bridge)

우리는 구글 지도를 따라 브루클린 다리를 향해 걸었다. 도보로 약 25분 정도 걸렸다.      


브루클린 다리는 뉴욕의 상징적인 다리로 1883년에 완공되었다. 이 다리는 미국 최초의 철제 현수교로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연결하고 있는데 차량은 아래로 보행자는 위로 건널 수 있게 만들어졌다.


 노란색 차를 탄 개츠비가 운전석 옆에 데이지를 태우고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브루클린 다리


이 다리에서는 뉴욕의 스카이라인과 이스트강(East River)의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브루클린 다리에서 사진을 찍고 뉴욕 여행을 마무리 지었다. 저녁에는 아쉬운 마음에 타임스 스퀘어에 한 번 더 다녀왔다.


     

*다음 호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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