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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숙 Aug 22. 2024

하와이 마지막 여왕이 전하는
하와이 이야기

하와이의 마지막 여왕 릴리우오칼라니의 자서전 

하와이 마지막 여왕이 전하는 하와이 이야기


하와이의 마지막 여왕 릴리우오칼라니(Liliʻuokalani)의 자서전 <하와이 여왕이 전하는 하와이 이야기>에는 오아후섬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많다.  


아름다운 계곡들, 장엄한 산들, 비옥한 평야를 가진 오아후섬은 내 마음속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정부의 중심지이자 내 백성들의 고향으로,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이 구절은 오아후섬의 자연적 아름다움과 정치적, 문화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여왕이 이 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깊은 애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와이의 자연경관은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섬들은 푸른 바다와 우거진 숲, 그리고 웅장한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와이 사람들에게 큰 자부심을 줍니다.”   



와이키키 해변


“하와이 왕국은 항상 외세의 압력에 시달려 왔습니다. 특히 미국과 유럽의 사업가들은 우리의 경제와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압력은 결국 우리 왕국의 몰락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와이는 그 독특한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훌라춤과 전통 음악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를 전하고, 우리의 언어와 풍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와이의 문화적 유산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교육은 하와이 왕국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투자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 그들이 지식과 지혜를 갖춘 성인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는 우리 왕국의 번영과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와이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고, 앞으로도 계속 싸워야 할 것입니다. 하와이의 독립은 우리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지키는 일입니다.”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군주. 릴리우오칼라니 여왕    


그녀는 1838년 9월 2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태어났다하와이 왕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시인 아베키 카파케아(Abe Kea Kapakea), 어머니는 케오홀라니(Keohokalole)였다. 여왕은 어린 시절부터 왕족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862년, 미국 출신 사업가 존 오언 도미니스(John Owen Dominis)와 결혼했고 남편과 함께 하와이 왕국 내에서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활동에 참여했다.     


하와이 왕조 마지막 여왕, 릴리우오칼라니(출처 나무위키)


그녀는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 하와이 전통 음악을 현대화하고 많은 곡을 작곡했다. 그중에서 ‘알로하 오에(Aloha ʻOe)’는 가장 유명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이 노래는 여왕이 여행 중에 경험한 아름다운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이 곡은 하와이 왕국이 멸망한 후 여왕의 슬픈 마음을 표현한 노래다. 가사를 잘 읽어보면 구구절절 나라 잃은 암담함을 느낄 수 있다.  


검은 구름 하늘을 가리고

이별의 날은 왔도다

다시 만날 날 기대하고

서로 작별하여 떠나가리

알로하 오에 알로하 오에

꽃피는 시절에 다시 만나-리

알로하 오에 알로하 오에

다시 만날 날까지     


들려오는 저 물새 소리도

이별을 서러워하고

날마다 가는 갈매기 떼들

우리의 작별을 슬퍼하니

알로하 오에 알로하 오에

꽃피는 시절에 다시 만나-리

알로하 오에 알로하 오에

다시 만날 날까지


여왕은 1891년 1월 29일, 그녀의 오빠 칼라카 우아(Kalakaua) 왕이 사망하자 하와이 왕국의 여왕으로 즉위했다. 여왕으로서 그녀는 하와이 국민의 권리와 주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 하와이는 미국과 유럽 출신 사업가들의 정치적 압력과 갈등 속에 있었다.


여왕은 1893년, 하와이 왕국을 정복하려는 미국과 유럽 출신 사업가들의 쿠데타로 인해 강제로 퇴위당했다. 그녀는 하와이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하와이는 미국에 의해 병합되었다. 1895년, 여왕은 쿠데타 후폭풍으로 인해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자택에 감금되었다.


감금되어 있으면서 그녀는 자서전 <Hawaii's Story by Hawaii's Queen>을 집필했다. 이 책은 하와이 왕국의 역사와 그녀의 통치, 그리고 하와이의 문화를 기록한 중요한 문서로, 그녀의 투쟁과 하와이에 대한 깊은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여왕이 머물렀던 이올라니 궁전


여왕은 감금 생활을 마친 후, 하와이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미국 정부와의 협상을 시도하며 하와이 왕국의 회복을 위해 활동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하와이는 1898년 미국의 영토로 공인되었다.


여왕은 1917년 11월 11일, 79세의 나이로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서전 차례와 주요 내용


<하와이 여왕이 전하는 하와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쓰였다.      


차례

Introduction/서문

Chapter 1: Childhood/어린 시절

Chapter 2: School Days/학교 시절

Chapter 3: My Marriage/결혼 생활

Chapter 4: My Husband's Career/남편의 경력

Chapter 5: Accession to the Throne/왕위 계승

Chapter 6: My Policy/나의 정책

Chapter 7: Visits to Washington/워싱턴 방문

Chapter 8: My First Visit to Washington/첫 번째 워싱턴 방문

Chapter 9: Annexation/병합

Chapter 10: Rebellion of 1895/1895년 반란

Chapter 11: Imprisonment/감금

Chapter 12: Last Days at the Palace/궁전에서의 마지막 날들

Chapter 13: Retirement at Washington Place/워싱턴 플레이스에서의 은퇴 생활

Chapter 14: The Aloha ʻOe/알로하 오에

Chapter 15: Conclusion/결론  


위와 같이 각 장은 여왕의 생애와 하와이 왕국의 중요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녀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이 상세히 담겨있다.


여왕은 하와이 왕국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먼저 폴리네시아인들의 정착부터 카메하메하 대왕에 의한 통일, 그리고 하와이 왕국의 번영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었다.


하와이의 전통과 문화, 특히 하와이어, 전통 음악, 춤(훌라), 종교, 사회 구조 등을 소개하고 있다. 여왕은 하와이의 독특한 문화유산을 보호하고자 하는 열망을 표현했다.


여왕의 개인적인 성장 과정과 어린 시절의 경험도 적혀있다. 왕족으로 받아야 했던 교육과 훈련, 그녀의 가족과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여왕으로서의 통치 기간 직면했던 정치적 도전과 갈등, 특히 미국과 유럽 출신 사업가들과의 갈등, 헌법 개정 문제, 그리고 하와이 왕국의 몰락 과정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다.


하와이 왕국이 전복되고 미국에 병합되는 과정에 대한 여왕의 관점과 하와이 독립과 주권을 지키기 위해 했던 노력과 투쟁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여왕이 퇴위한 후의 생활, 특히 그녀가 자택에 감금된 시기와 이후의 망명 생활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와 과정도 설명한다. 이 자서전은 하와이 역사와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남았다.


하와이의 마지막 여왕이 직접 전하는 이 책을 통해 하와이의 과거와 그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하와이의 생성과 멸망


여기서 잠시 하와이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하와이는 약 1,500년 전 폴리네시아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와 하와이에 정착, 독특한 문화와 사회 구조를 형성했다.


섬마다 추장(알리이)이 지배하는 소규모 왕국들이 있었으며, 평민들은 토지 단위에 종속되어 농사나 어업으로 경제를 꾸렸다. 이들 평민을 다스리는 계급은 ‘알리이’라고 불리는 족장 계급이었다.


각 지역의 통치자는 ‘알리이 누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마나’라는 영적인 힘을 믿었고, 알리이 누이들은 이 힘을 지닌 강력한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태평양 한복판에 있는 하와이 제도는 대륙과 떨어진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런 평화로운 땅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1778년 영국의 제임스 쿡 제독이 하와이 제도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제임스 쿡 제독은 태평양을 탐험하며 하와이 제도에 도착했다. 태평양을 탐험하며 워낙 많은 원주민을 상대했던 쿡 제독은 자신이 신이라고 속였다. 피부가 하얗고 화려한 옷을 입은 데다가 커다란 카누를 타고 온 쿡을 본 하와이 원주민들은 그를 진짜 신이라 생각하고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가던 쿡은 배의 돛대가 부러져 다시 돌아왔다. 사람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신이 탄 배의 돛대가 부러질 수 있는가? 그는 신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의 신성을 의심하였고 쿡은 전투에서 죽게 되었다. 나머지 배 한 척은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 하와이 제도를 세계에 알렸다.


처음에는 쿡의 후원자였으며 샌드위치 발명가라고 알려진 샌드위치 백작의 이름을 따서 하와이를 샌드위치 제도라 명명하고 영국령으로 선포했다.


하와이는 미국령이 되기 전 영국의 손길이 먼저 닿았던 곳이며 하와이주 깃발의 유니언 잭은 그 당시 흔적이다.


하와이섬을 통일한 사람은 카메하메하 1세다. 그는 1795년 하와이 왕국을 창설하고 1810년에는 하와이 제도 전체를 통일하였다. 카메하메하 1세는 영국과의 협정을 통해 외부 열강의 간섭을 차단하고, 하와이 왕국의 독립을 지켜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하와이 왕국을 계속해서 통치했다.



카메하메하 1세(출처 나무위키)


하와이 왕국은 19세기 중반부터 서구화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서구 문명을 꽤 많이 받아들여 어느 정도 근대화를 이루었다. 서구로부터 정식 국가로 인정을 받아 교류도 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상인들이 하와이에 들어와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면서 경제와 정치에 큰 위험이 닥쳤다. 시간이 흐르자 이들의 힘이 점점 커지면서 하와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역대 하와이 왕들은 영국, 일본 등 열강에 미국을 견제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일본에도 보호령 편입을 청했는데 만약 이를 일본이 받아들였다면 태평양 절반이 일본령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 오가사와라 제도 영유만 승인받고 여왕의 부탁을 거절했다.


이후 하와이 왕국은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결정적인 이유는 내부 정치 불안과 외부 세력의 경제적, 정치적 개입을 들 수 있다.


그중 바요넷 헌법(1887년)은 미국과 유럽 상인들이 주도하여 강제로 제정한 헌법으로, 하와이 왕국의 왕권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 결과 하와이 왕국의 정치 체계가 외부 세력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유럽 상인들이 하와이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면서 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했다. 그 결과 하와이의 경제가 외국 자본에 종속되면서 하와이 왕국의 자치권이 약화되었다.


1893년 릴리우오칼라니(Liliʻuokalani) 여왕이 미국인의 농장을 모두 국영화 조치를 해버리자 미국인들은 근처 미 해군 선박에 도움을 청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즉시 정박해 있던 배에서 수병 150명이 몰려와 하와이 여왕을 추방하고 왕국을 멸망시킨 후 하와이의 미국 편입을 꾀했다.


이후 하와이에는 임시 정부가 세워졌고, 1898년에는 미국에 병합되었다. 이어 1959년에는 하와이가 미국의 50번째 주로 승격되었다.


하와이의 역사는 강력한 지도자의 통일 노력과 외부 세력의 개입이 결합한 복잡한 역사적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하와이 왕국의 생성과 멸망은 하와이 원주민들의 삶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여왕은 하와이 왕국의 주권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은 슬픔과 실망을 느꼈다. 미국 정부가 하와이 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병합을 강행한 것에 대해 여왕은 무력 충돌을 피하고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하와이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우선시하여 군사적 저항 대신 미국 정부와의 협상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로도 하와이 국민의 권리와 주권 회복을 위해 투쟁했으나 다시 되돌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당시 세계정세는 미국의 하와이 병합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19세기말, 세계정세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팽배하던 시기였다. 강대국은 해외 영토를 확장하고 경제적, 군사적 이익을 추구했다. 하와이 왕국의 미국 병합은 이러한 세계정세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하와이는 태평양 항로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국제 사회는 하와이 병합에 대해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유럽 열강들은 자신들의 식민지 확장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국제법으로도 하와이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명확한 기준이 없었기에 국제 사회의 개입이 어려웠다.


이로써 1795년에 시작되어 1893년까지 98년간 존속했던 하와이는 멸망했다. 그동안 역대 왕은 모두 8명이다.  


하와이 왕국의 역대 왕


카메하메하 1세 (Kamehameha I)

통치 기간: 1795년~1819년

하와이 왕국 창설자.


카메하메하 2세 (Kamehameha II)

통치 기간: 1819년~1824년

카메하메하 1세의 아들.


카메하메하 3세 (Kamehameha III)

통치 기간: 1825년~1854년

하와이 왕국의 헌법 제정.


카메하메하 4세 (Kamehameha IV)

통치 기간: 1855년~1863년

보건 및 교육 개혁.


카메하메하 5세 (Kamehameha V)

통치 기간: 1863년~1872년

헌법 개정 및 절대 왕권 강화.


루나리로 왕 (Lunalilo)

통치 기간: 1873년~1874년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된 첫 왕.


칼라카 우아 왕 (Kalākaua)

통치 기간: 1874년~1891년

하와이 문화 부흥 및 외교 활동.


릴리우오칼라니 여왕 (Liliʻuokalani)

통치 기간: 1891년~1893년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여왕.


하와이 왕국은 약 98년 동안 존재하였으며, 그 역사에는 하와이 원주민들의 삶과 문화가 깊이 뿌리내려 있다.


지금 하와이에 가서 하와이 왕국의 멸망을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우리에게 낭만이 가득하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하와이의 뒷면에는 나라를 빼앗긴 하와이 원주민들의 슬픈 역사가 배경에 깔려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역사는 승자만의 기록인 것을.


수도 호놀룰루와 와이키키       


호놀룰루시가 있는 오아후의 면적은 1,545 km²로 하와이에서 세 번째로 크며 하와이 인구 3분의 2가 이곳에 살고 있다. 보통 하와이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호놀룰루와 와이키키 해변인데 그곳이 바로 오아후다.


원래 오아후섬에는 카네호 아나모쿠(Kānehoalani)라는 신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는 섬의 산과 강을 지배하는 신으로, 물의 흐름을 제어하고 섬의 풍요로움을 주는 역할을 했다. 카네호 아나모쿠는 종종 섬 주민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물과 농작물을 나누어주는 자비로운 신이었다.



와이키키 해변


또 와이키키 지역에는 카파파히누(Kapapahinu)라는 물의 여신이 살았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녀는 와이키키 해변의 맑은 물과 아름다움을 책임졌다. 주민들은 그녀에게 기도를 드리고 제물을 바쳐 풍요로운 물을 부탁했다.


오아후는 관광할 곳이 많고 거대 도시와 쇼핑몰, 맑고 깨끗한 휴양지가 어우러진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곳이다.


트롤리-블루 라인

오아후에서 주어진 시간은 3일, 와이키키 해변과 주변을 보느라 이미 하루가 지났다. 오아후에서 오래 머물 시간이 없는 나는 오아후를 가장 효과적으로 둘러볼 수 있는 동선을 짜야했다.


다행히 관광지로 이름난 오아후에는 트롤리버스가 있었다. 트롤리버스는 1일, 4일, 7일 패스를 예약하고, 아름다운 오아후섬을 구석구석 누빌 수 있다.


오아후에는 다이아몬드 헤드 분화구, 이올라니 궁전, 샌디 비치. 할로나 블로우 홀, 진주만 기념지 등 인기 만점의 명소들이 있는데 나는 블루 라인 트롤리를 선택했다.


블루 라인은 해안선 & 로컬 그라인드 투어로 짜여 있었다. 이 트롤리는 카라니아놀레 고속도로를 타고 오아후 동쪽 해안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코스로 울퉁불퉁한 절벽과 환상적인 바다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코스에는 꼭 가 보고 싶었던 할로나 블로우 홀이 있었다.


블루 라인 트롤리가 가는 장소들


예약하면 조금 더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었으나 표가 매진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한 일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매표소로 갔다.


숙소에서 천천히 걸어 와이키키 해변을 따라 아침 풍경을 즐겼다. 15분쯤 걸어가니 표를 살 수 있는 와이키키 쇼핑 플라자가 보였다. 입구로 들어가자 안내대가 금방 눈에 띄었다.


다행히 표는 있었다. 왕복 110분이 소요되고 40분 간격으로 운행된다고 했다. 다이아몬드 헤드를 가려면 그린 라인의 표를 사면 된다.


우리는 할로나 블로우 홀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블루 라인 표를 샀다. 출발 시간이 많이 남아 커피를 여유롭게 마신 후 길 건너 정류장으로 갔다.


그런데 버스는 안내한 시간표대로 운행되지 않고 도착해서 손님이 타면 바로 출발했다. 우리가 길을 건널 때 블루 라인 트롤리가 유유히 우리 눈앞을 지나갔다.


“어? 저 버스 아냐? 저거 블루 라인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은데?”  


아들이 말했다.


“아직 시간 있어, 10분이나 남았는데?”  


말을 해놓고도 왠지 느낌이 싸했다. 황급히 길을 건너 물어보니 방금 출발한 버스가 우리가 타야 할 트롤리였다. 할 수 없이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40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면 지금 막 출발한 트롤리를 탔을 텐데, 약간 아쉬웠다. 그러나 여행지에서 이런 변수는 종종 있는 일이라 진득하게 기다렸다.


블루 라인 트롤리가 도착하자 반가운 마음에 얼른 버스에 올랐다. 양쪽이 시원하게 트인 버스는 시끄러운 운전기사의 인사와 함께 출발했다.


운전기사는 버스가 지나는 곳을 설명해 주었다. 버스는 와이키키 쇼핑 플라자, 듀크 카하나모쿠 동상을 거쳐 와이키키 비치를 따라 달렸다.



트롤리 왼쪽에 앉은 사람들


그리고 얼마 후 버스는 계곡을 끼고 구불구불 달렸는데 오른쪽으로는 태평양의 넓은 바다가 끝없이 이어졌고 왼쪽으로는 멀리 밀집한 집들과 숲과 바위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졌다.


트롤리 여행은 여러모로 장점이 많았다. 우선 안내해 주는 대로 트롤리를 타고 주요 장소를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다.


 그리고 현지 기사에게 각 명소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들을 수 있다. 가끔 기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웃기도 하고 감탄사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왼쪽은 계곡과 산, 오른쪽은 태평양 바다가 끝없이 이어진다.


트롤리는 왼쪽은 오아후 도시와 계곡, 산이 보이고 오른쪽은 해수욕장과 태평양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다. 그래서 갈 때는 오른쪽에 앉고 올 때는 왼쪽에 앉으면 경치를 모두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버스 양쪽이 다 뚫려서인지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머리가 정신없이 휘날렸다. 혹 트롤리버스를 타려면 모자를 이용하거나 머리를 묶는 것을 강추한다.


트롤리의 가장 좋은 점은 원하는 장소에 내려서 그곳을 둘러보다가 다음 트롤리가 오면 다시 타고 이동할 수 있다.


트롤리가 정차할 때마다 사람들이 내리기도 하고 또 타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돌고래를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내렸다.


우리는 다른 곳은 다 지나치고 할로나 블로우 홀에서 내렸다.


할로나 블로우 홀(Hālona Blowhole)은 오아후섬의 동쪽 해안에 있는 자연 명소다. 이 이름은 바위 해안의 자연적인 지형과 관련되어 지어졌다.


파도가 밀려와 바위틈을 통해 마치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블로우 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할로나(Hālona)’는 하와이어로 ‘감시하다’ 또는 ‘바라보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 지역은 높은 절벽과 탁 트인 전망으로 인해 바다를 감시하거나 바라보기 좋은 장소였다. 그래서 ‘할로나 블로우 홀’은 ‘바라보는 장소의 블로우 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할로나 블로우 홀은 오랜 세월 동안 바다의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자연적인 구조물이다. 바위틈과 해안선의 독특한 형상은 파도의 압력으로 인해 물을 높이 뿜어내는 현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할로나 블로우 홀, 멀리서 보면 아이들이 놀기 좋은 수영장처럼 만들어져 있다.


이곳은 오아후섬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다이아몬드 헤드만큼이나 인기 있는 명소다. 특히 파도가 강하게 칠 때, 블로우 홀에서 물이 높이 뿜어져 나오는 장관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찾는다.


할로나 블로우 홀 인근에는 영화 ‘From Here to Eternity’의 유명한 해변 장면이 촬영된 할로나 비치 코브가 있는데 이곳은 영화 애호가들에게 인기 있는 방문지다. 돌아오는 길에 기사가 잠시 내려 사진을 찍게 해 주었다.


할로나 블로우 홀은 내려가서 볼 수도 있고 위에서 내려다볼 수도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마치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수영장처럼 아담하게 생겼다.


할로나 블로우 홀도 멋있지만 내려서 둘러보는 태평양 바다와 우뚝 서 있는 산, 맑은 하늘과 구름, 악착같이 불어대는 바람까지 환상적인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할로나 블로우 홀 근처 풍경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머리가 미친년(?)처럼 휘날려서 사진을 찍기 힘들었다. 그래, 이런 곳에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온 것도 아니고 풍경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바람 좀 불어대기로 그게 뭐 대수냐 싶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와이키키 해변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한 달간에 걸쳐 가장 좋았던, 이번 여행지에서의 하이라이트를 꼽는다면? 키웨스트와 마이애미, 뉴욕과 워싱턴, 빅아일랜드와 오아후 등 수많은 여행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 풍경들


모든 곳이 나름대로 환상적이고 기억에 남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오아후를 꼽겠다. 물론 이것 역시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오아후의 다이아몬드 헤드, 와이키키 해변도 아닌,  블루 라인 트롤리를 타고 둘러보았던 태평양 바다, 산과 계곡과 하늘의 맑은 구름까지 어우러진 경치, 그리고 미친바람까지 아마 이곳을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1년은 거뜬하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버스 안에서 찍은 하와이 집들


잠시 전에 만났던 그 풍광들이 여운을 남겨 감상에 빠져 있는 사이 버스는 다시 와이키키 해변 근처로 돌아와 있었다. 시계는 이미 3시를 지나고 배꼽시계는 밥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딸의 폭풍 검색은 이미 끝나 있었다. 뭘 먹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 없이 이럴 땐 딸이 이쁘고 고맙다.


“오늘은 어디로 가?”

“해산물 식당.”

“나쁘지 않은데.”


우리는 딸이 안내하는 식당으로 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비둘기가 한두 마리씩 들어오더니 잠시 후 비둘기 식당이 되어버렸다.


오른쪽에서 주문을 하고 왼쪽에서 먹는다.


새우와 해산물 요리, 식당 밖으로 유인한 비둘기떼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먹어야 하나 잠시 난감했는데 언니가 볶음밥을 덜어 밖으로 비둘기를 유인했다. 비둘기가 다시 식당으로 들어오기 전에 빨리 밥을 먹어야 했다.


우리는 쫓기는 심정으로 식사를 했다. 참 여행 중에는 별일이 다 많다, 하고 웃으면서.


음식은 보기보다 훨씬 맛있었다. 밥을 먹은 후 일행은 잠시 흩어졌다. 오빠와 언니는 숙소에 가서 일단 쉬겠다고 했고 우리는 근처 카페로 향했다.


 딸은 쇼핑할 시간이 없다며 어제 못 산 태닝 헬로키티를 사러 ABC마트로 갔다. 뒤따라 아들은 작은 지갑이라도 하나 사겠다며 쇼핑센터로 갔다.


나만 혼자 달랑 남아서 커피를 마신다. 창밖으로 와이키키 해변이 보인다. 이 시간이 너무 좋다. 한가롭고, 여유롭고, 와이키키 해변을 2분이면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이 시간, 현실이 아닌 것 같다.  

   

창밖으로 보이는 와이키키 해변


생각해 보니 집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매일 이렇게 집시처럼 떠도는 것도 이제 이력이 붙었지만, 지친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된다. 긴 여정 동안 아무런 사고 없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


*다음 호 예고*

<위대한 개츠비>의 무대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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