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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란
이름의 세상

사랑 기록 일지

by 미지수


당신은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회사에 출근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당신이 왜 그리 좋은지, 하루 종일 당신에게 집중했고, 하루 종일 당신만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웃어주는 날이면 그날은 로또를 맞은 것처럼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길가의 꽃냄새도 더 향기로웠고, 자동차의 시끄러운 소음마저 아름답게 들렸습니다. 그래서일까, 당신의 웃음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어여쁠까, 하는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 당신의 웃음소리는 옅게 흩어졌지만 내 마음에서만큼은 그보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당신은 종종 나에게 점심을 함께 먹자는 제안을 했고, 그 제안은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처음 가는 음식점에 갈 때면 당신은 반드시 내 옆에 서서 나를 도와주었습니다. 나와 당신은 매일 서로 마주 앉아 점심 메뉴를 고민했고, 시간이 점점 지나고 다른 고민도 나누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겐 이런 우리가 어울리지 않았나 봅니다.

우리가 가까워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은 다른 회사로 옮겼습니다. 듣기로는 당신이 상사들에게 내리 갈굼을 심하게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사라진 회사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졌고,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해 더욱더 힘들었습니다. 한동안 당신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 한 나는 상실감에 빠졌지만 정신없이 몰아치는 일을 하고 있노라면 나의 상실감은 마치 사치처럼 느껴졌기에, 나에게는 내 마음껏 슬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열심히 내일을 향해 달려가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익숙한 벨소리도, 익숙한 진동도 아니었기에 나는 동료에게 물었습니다. '나에게 올 전화가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반신반의하며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목소리의 주인이 내가 꿈에 그리던 당신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입이 귀에 걸릴 것처럼 웃으며 그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쏟아냈습니다. 당신은 내 말에 곧잘 웃어주며 나에게 만남을 제안했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당장 만나자며 호기롭게 약속을 잡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약속 당일이 되었을 때, 나는 동료의 도움으로 제일 멋지게 차려입고 길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거울 따윈 챙기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볼 필요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고, 나는 곧 의기양양해져 약속 장소인 카페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멋진 나의 옷매무새와는 다르게 나는 네 번이나 카페 유리문에 부딪혔고, 부끄럽게도 당신이 나를 발견하고서야 카페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커피를 시켜놓고 시간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그 속에서 희망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니었습니다.

"진혁 씨."

당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습니다. 오늘따라 나의 이름이 왜 이리 간지럽게 들리는지, 나는 웃는 얼굴로 당신의 부름에 답했습니다.

"네, 진아 씨. 무슨 일이세요?"

짧은 대화였지만 나의 마음만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에 모두 정성을 들였고, 내 눈엔 보이지 않는 사랑을 듬뿍 담았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당신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저 결혼해요."

결혼이라는 두 글자에 나의 심장은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습니다. 전혀 듣지 못한 소식이었고, 애초에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으니, 내 마음은 산산조각 나듯 찢겨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기 청첩장이고...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불렀어요. 미안해요, 진혁 씨."

나는 내 표정을 볼 수 없었고, 당신의 표정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내 표정에선 슬픔이 묻어나고 있었겠지만, 당신의 표정은 어떨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목소리로 표정을 예측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는 비가 오는 듯 우중충했지만, 그와 동시에 소나기가 내리듯 서글펐습니다. 나는 서투른 솜씨로 내 마음 안에 당신의 표정을 그려나갔고, 이내 그것이 슬픔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우리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고, 그렇게 당신은 나를 서서히 잊어가는 듯했습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보내는 문자에도 당신은 단 하나의 글자도 남기지 않았고, 내가 계속해서 거는 전화에도 당신은 답 한번 해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듯 고요히 절망했습니다. 마음속으로 그려낸 당신의 표정이 지금 나의 표정이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한 달 뒤, 당신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나는 떨리는 손과 들뜬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으나, 이내 그 마음은 슬픔이란 파도의 절망이란 세상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통화의 내용이 당신의 부고 소식이었으니까요. 나는 서둘러 준비를 하고 당신의 장례식장으로 미친 듯이 뛰어갔습니다. 가다가 몇 번이나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몇 번이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몇 번이나 사람에게 치였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나는 지금의 당신이 제일 중요했기에, 정말 정신이 나간 채로 미친 듯이 달려 도착했습니다. 아마 장례식장에 있던 몇몇의 사람은 나를 보고 경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꼴이 말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래도 상관없었습니다. 나에겐 당신뿐이었고, 나의 세상은 오직 당신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나의 세상인 당신은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세상을 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나는 그저 절망하는 수밖에 없었고요.

나의 세상이 사라진 장례식장에서 미친 듯이 울며 당신을 떠나보낸 뒤. 그제야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었습니다. 바로 결혼한다던 당신의 남편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아내가 죽었는데 장례식장에 오지 않을 남편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나는 뒤늦게 안 사실에 당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수소문했고, 그 끝에 당신이 나에게 한 말은 거짓이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세상을 저버리기 위해 나에게 거짓말한 것입니다. 내가 걱정할까 봐, 내가 너무 가슴 아파할까 봐, 그럴까 봐 당신은 나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내가 당신에 대해 수소문 한 끝에 당신의 선택의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나와 같이 다니던 회사의 상사는 당신을 아니꼽게 여겨 계속해서 슬쩍 괴롭혔고, 당신은 나에게 도와달라는 내용의 쪽지를 보냈지만 나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옮긴 회사에서도 갈굼은 마찬가지였고, 그것이 지금의 결과를 초래한 걸로 보였습니다.

나는 지금도 당신의 장례식장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아마 오늘은 하루 종일 마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술을 마시며 당신을 지워갈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나에게 자꾸만 당신의 얼굴이 아른거리니까요.

회사는 잘려도 상관없지만, 당신이 원하지 않을 것 같으니 최대한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니까요. 그러나 당신이 한 가지 간과하지 못한 게 있습니다. 나의 세상은 사라진 게 아니라, 당신에게 멈춘 것을요. 왜냐하면, 맹인인 나에게 당신은 나의 눈이자 세상이었으니까요. 세상이 당신을 비추기엔 당신이 너무 밝았으나, 당신이 세상을 비추기엔 당신이 너무 맑았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편히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볼 수 있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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