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은 낡았고, 낙엽은 타버렸으며, 내 손은 곪아있었다.
2. 아버지
나에게 아버지란 매우 어려운 사람이었다. 잘 지내다가도 자꾸만 사이가 멀어지고, 멀어졌다고 생각한 관계는 어느 순간 멈춰버리는 그런 관계의 사람이었다. 때문에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태엽 같은 관계였다. 녹슨 태엽처럼 잘 돌아가다가도 자그마한 조약돌 하나에 금방 멈춰버리는 그런 관계. 여기서 녹슨 태엽은 아버지와 나의 관계였으며, 태엽을 자꾸만 망가뜨리고 멈추게 만드는 조약돌은 나였다. 사실 어쩌면 저 태엽이 멈춰버린 진짜 이유는 애초에 돌아간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로 맞물린 채 믿음을 원천 삼아 돌아가야 하는 태엽이, 어느 순간 돌아가지 않았으니 그 사이에 낀 조약돌이 무슨 소용이랴. 그래도 나는 알았다. 내가 먼저 돌려야 한다는 걸. 그러니 언제부턴가 멈춰버린 아버지에게 내가 좋아하는 떡꼬치도 내밀어보고, 할 말을 지어내서라도 말을 걸어보고, 뻔히 아는 것도 모르는 척 질문을 했을 테고, 내가 먼저 가서 손가락이라도 내밀었을 테지.
사실 나는 이런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 어머니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한 후면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고, 아버지가 나에게 왜 이러는지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라도 하려는 노력을 할 수 있었으니. 어머니와의 대화가 끝나면 나는 나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내가 무얼 잘못한 건 아닐까, 내가 어디가 부족했던 건 아닐까, 하고. 나의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나의 노력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노력조차도 한때라는 사실을 나의 아버지는 알지 못했다.
3. 어떤 사람
만약 나에게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에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낙엽이라고 하고 싶다. 이미 져버린, 지나가버린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잊히지는 않는. 매년 다시 나를 찾아오게 되고, 그의 바스락 소리 하나에 외줄 타기를 하는 기분이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를 서서히 놓아버리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아버지라는 낙엽을 하나하나 불태우며 고요히 남은 재들을 보며 감상에 젖었을지도 모른다. 낙엽 하나하나에 깃든 추억을 이제는 보내주어야 하니, 나는 그 추억을 온 마음 다 해 안아 들어 품은 끝에 하늘에 날려 보내주고 싶었다.
4. 손
아버지에게 떡꼬치를 내밀었지만 아버지께서 '떡꼬치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거부하셨을 때, sns에 올린 글 때문에 경찰이 온 다음날 아침, '대체 어떤 지랄이냐'며 나를 쏘아붙이셨을 때. 그때도 나는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떡꼬치를 거절하셨을 땐 '몰랐네, 다음부턴 뭐 사 올까?'하고 물어보았고, 경찰이 온 다음날 나를 쏘아붙이셨을 땐 '죄송해요, 나도 몰랐어요. 답답해서 그랬어요.'라며 손을 내밀었다. 상처받은 티를 내지도, 불만을 쏟아내지도 않았고 그저 조용히 웃으며 괜찮은 척 답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니었다. 단 한 번도 나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나에게 온 마음 다해 걱정하며 '왜 그랬냐'라고 묻지 않았다. 보통 아버지께서 물으시는 '왜 그랬냐'는 말은 '대체 뭐가 문제길래 그딴 식으로 하냐'는 말이었고, 그 말은 곧 내가 그간 내밀어왔던 손이 무색하게 얼어버리는 말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한 달 전의 나는 말이다. 한 달 전의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더 발전해 나가려 애썼다. 내가 조금 더 참으면, 내가 조금 더 웃어 보이면, 내가 조금 더 잘하면, 그러면 되겠지 하며 꾹 참았다. 그러다 마주한 나의 모습은 보기 흉측할 정도로 곪아있었다. 내가 내밀었던 손들은, 아버지가 잡았다고 생각했던 내 손들 이미 무수히 많이 뿌리쳐진 뒤였고, 그 속에서 찾은 내 모습은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곪아있었다. 그래, 애초에 손을 뻗어주길 원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잡아주기는 원했던 것 같다, 멍청하게도.
나와 아버지 사이에 존재한 태엽은 서로의 존재라는 돌멩이에 멈춘 지 오래였으며, 아버지라는 낙엽은 이미 태우고 없었다. 그래, 나는 아버지를 포기한 게 아니라 나를 지키려 태운 것이었다. 수 없이 곪아버린 나를 마주한 이상, 이젠 모른 척 지나가고 싶지 않았기에.
다음엔 내가 아버지에게 실망하게 된 결정적 계기와 내가 아버지를 포기하려 생각한 과정을 담아보도록 하겠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함을 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