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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기다림은
이 세상에 존재합니까?

열일곱의 너. 그리고 열아홉의 나.

by 미지수

열일곱의 너는 말했다. 이 세상에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열다섯의 너는 믿지 않았다. 당장 다가오는 너의 존재 역시 영원하다고 여겼으니, 어쩌면 그건 당연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 영원함이 깨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한 조각의 세계였음을, 너는 알지 못했다.

열다섯의 너는 어리고 여려서 무엇이든 곧 잘 믿었지만, 2년이 지난 후의 너. 그러니까 열일곱의 너는 열다섯의 너와 정 반대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네 모습이 퍽 안타까워 너의 두 손을 마주 잡으며 물었더란다.

"담희야, 잘 지냈어?"

나는 분명 알았다. 잘 지냈냐는 나의 물음에 들려 올 너의 대답을, 그리고 보일 너의 모습을. 그러나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았기에, 너를 구하고 싶었기에.

"네, 잘 지냈어요."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네가 답했다. 잘 지냈다는 너의 말이 이리도 모순적으로 들려오긴 또 처음인지라, 나는 퍽 다정한 말투로 너에게 말했다.

"그래? 잘 지냈다면 다행이네."

살포시 웃으며 너를 보았지만, 내가 본 너의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너의 허연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파리한 안색을 자아냈으며, 가느다란 손과 팔, 다리는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특징으로 남았다.

"담희야. 혹시 말이야, 언니 기억나?"

언니라는 말에 너의 눈에는 잠시 생기가 돌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너의 눈이 반짝거림도 잠시, 곧 다시 생기 없는 얼굴로 돌아왔으니. 열일곱의 너를 보면 볼수록 자꾸만 열다섯의 너와 비교가 되었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었다. 맛있는 걸 먹을 때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던 열다섯의 너는 이제 맛있는 음식 따윈 사치인 열일곱의 네가 되었다. 나는 그 점이 퍽 안쓰러웠기에, 집구석에 처박아둔 똥차를 그대로 방치하고 내려왔겠지.

"기억나는데, 하고 싶지 않아요."

과거의 너에겐 2살 차이가 나는 언니가 있었다. 두 살이라는 나이차만큼이나 가까운 사이였지만, 가까운 만큼 서로 치고받고 많이 싸웠더란다. 그럼에도 너는 나에게 말했다, 아무리 싸우고 욕을 해도 언니가 미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그래도 싸울 땐 또 열정적으로 싸웠는지 간혹 가다 나에게 언니가 이랬다, 저랬다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나는 그런 너의 모습조차 흐뭇하게 바라봤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조금 답답했을 거란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너는 나를 계속 찾아주었고, 그건 열일곱의 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점에서 참 다행이라고 느꼈지만, 이어지는 너의 말에 너는 더 이상 열다섯이 아니라는 걸 다시 깨닫게 되었다.

"언니, 저 이만 가볼게요. 학원이 있어서요."

"아, 그래. 얼른 가 봐."

너는 나의 말에 꾸벅 인사를 하고 그대로 학원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런 너의 어깨라도 쓸어주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어깨를 쓸어주기엔 먼 사이였으나, 나란히 하기엔 너무나도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해가 등을 돌린 시간이 되었다. 나는 너의 부모님 대신 너의 학원 앞에 섰다. 잠시 후,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온 뒤에 저 멀리서 네가 슬금슬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 너의 모습은 퍽 안쓰러워 보였으나, 그 뒤에 묻힌 피곤함은 내가 감히 어름 할 수 없어 보였다. 나는 그저 생긋 웃으며 너를 향해 손을 흔들 뿐, 그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너를 맞이했다.

"담희야, 여기!"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나를 보고서, 너는 그저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나는 그 웃음의 정확한 의미를 몰랐지만, 네가 매우 피곤해 보인다는 것쯤은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너의 가방을 들어 내 어깨에 놓고는 네가 내 옆에 나란히 걷는 것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는 동안 너는 세상이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계속해서 너를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예흔 언니."

그렇게 이어지던 침묵 속에서, 네가 뜻밖의 호칭을 꺼냈다. 평소에는 '언니'라는 호칭도 잘 쓰지 않던 네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열다섯이란 나이의 너는 늘 잘 쓰던 호칭이었으나, 열일곱의 너는 아니었기에. 나는 그 호칭이 네 입에서 다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때문에 너의 말에 내심 놀랐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답하려 애쓰며 말했다.

"응, 왜?"

생긋 웃으며 너를 쳐다보았다. 너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세상에서 눈을 떼고 제 손을 만지작 거리며 물었다.

"언니 바빠요?"

"아니, 안 바빠. 왜?"

바쁘냐는 너의 물음에 나는 살포시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사실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그것들은 너만큼 중요하지 않았기에. 그러자 너의 얼굴에서 미약하게나마 미소를 찾아볼 수 있었다. 기분 탓 이래도 어떠랴,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네가 웃는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봤기에.

"저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응, 얼마든지. 뭔데?"

"언니를 보러 가고 싶어요."

잠시 나의 숨이 멎는 듯싶었다. 언니를 보러 가고 싶다는 너의 말에 나는 차마 숨을 뱉을 수 없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이 아이가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아니면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열다섯으로 돌아간 것일까. 나는 잠시의 생각 끝에, 너의 가방을 쥔 손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래, 그럼. 보러 가자."

나의 말에 너는 생긋 웃었다. 아, 얼마 만에 보는 너의 웃음이던가. 나 역시 너를 따라 웃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이 걸음이 어쩐지 족쇄처럼 느껴졌지만 아무렴 어떤가. 지금 너는 나와 함께 걸으며 웃고 있으니, 나는 그걸로 만족하고 싶었다. 그렇게 10분쯤 걸었을까. 저 앞에 네가 보고 싶어 하던 언니가 있었다. 사진 속 환하게 웃는 여자아이는 참으로 예뻐 보였다. 연예인들처럼 예쁜 게 아니라 정말 아이 그 자체의 순수함이 너무나도 예쁘게 보였다. 너는 나의 옆에 마주 서서, 그 아이의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언니, 참 예쁘지 않아요?"

"응, 예쁘네."

나는 사진 속 아이가 못내 어색했으나, 너는 매우 애틋한 듯 보였다. 너는 사진 속 아이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고, 그다음에는 오뚝한 코를, 그리고는 앵두 같은 샐쭉한 입술을 응시했다. 너의 시선 하나하나에 나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하나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너는 사진 속 아이가 못내 그리웠던 것이었고, 그 까닭은 이젠 너의 곁을 맴도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니라.

"담희야. 너, 언니 보고 싶구나?"

나의 말에 너는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볼에는 네가 흘린 눈물이 묻어있었고, 나는 손을 뻗어 너의 눈물을 닦아주었지만 그건 그저 공허에 내디딘 허우적거림에 불과했다. 나는 못내 가슴이 미어졌지만 어쩔 수 있으랴.

"언니."

한참 후, 네가 또다시 나를 불렀다. 나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너의 부름에 부스스 일어나 답했다.

"응, 왜?"

"고마워요."

너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잠시 얼어붙었다. 고맙다라, 뭐가 고맙다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저 너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기에. 나는 그저 가만히 너의 곁을 지킬 뿐이었다.

"그냥, 그냥요. 이렇게라도 내 곁에 남아줘서 고마워요, 언니. 그러니 이제 쉬어요."

나는 너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것 마냥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아, 너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구나.

나는 과거 불의의 사고를 당해 몇 년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었다. 그러나 그 신세가 무색하게도, 사고를 당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나는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그건 담희가 열다섯 일 때의 일이었고, 그 당시엔 아무것도 모르던 담희였기에. 나중에 알았을 때의 충격이 여간 큰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열다섯이던 담희는 열여섯이 되고, 열일곱이 되어서야 진실을 마주했다. 그러나, 2년의 충격이 너무나도 컸던 탓일까. 담희는 가면 갈수록 메말라 갔다. 나는 뒤늦게 담희에게 왔고, 그건 곧 담희에겐 새로운 혼란이었음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한참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담희야. 정말 괜찮겠어?"

"이렇게 예쁜 언니가 내 눈앞에 있는데, 안 괜찮을 건 뭐예요."

말을 마친 너는 살포시 웃어 보였다. 너는 정말 다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단 생각이 들자, 내 눈에서는 나오지도 않는 눈물이 들끓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담희를 꼭 안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했다. 내가 담희에게 뻗은 손은 그저 닿지 않는 허우적거림에 가까웠고, 내가 주는 품은 닿을 수 없는 온기에 가까웠으니.

"담희야, 언니가 약속 하나 할게. 만약 다음이 있다면, 언니는 꼭 다시 널 보러 오겠다고."

나의 말에 담희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언니. 기다릴게요."


END: 영원한 기다림은 이 세상에 존재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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