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는 현실에게서
1. 엘리베이터
"학생! 잠시만!"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5층을 누르던 찰나, 이웃집 아주머니께서 다급히 뛰어오며 소리치셨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아주머니는 숨을 고르곤 호호 웃으며 받아주셨다. 그 짧은 거리를 뛰어오는데 헥헥 대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나의 동생과 겹쳐져서 보였다.
"늙으면 이래서 문제야. 뭘 하든가 죄 다 숨이 찬다니까."
헛기침을 하며 중얼거리는 아주머니의 말이 내 귀로 흘러가듯 들어왔다. 그러면 내 동생은 뭘까. 나보다 젊은 주제에 걸어가는 것도 숨이 차 하지 못하는 꼴이라니.
띵-
때마침 엘리베이터는 4층에 도착했고, 뒤이어 5층에도 도착했다. 나는 먼저 내리시는 아주머니께 또 한 번 인사를 건넸고, 아주머니께서도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그리고 5층에 도착해 현관문 앞에 서서 도어록을 열었다. 삐- 하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오며 일정한 음을 만들어냈다. 문을 열고 집으로 도착하니 엄마와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께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무슨 일인지 받지 않았다. 동생에게라도 전화해 볼까, 하다가 부재중 뜬 걸 알면 다시 하겠지 싶어 관뒀다. 하지만 전화는 한 통도 받지 못한 채 나의 하루가 가버렸다. 보나마나 동생과 무언가를 하고 있을게 뻔했다. 엄마랑 단 둘이 무언갈 해 본게 언제였더라,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동시에 아빠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이불에 몸을 숨기고, 마음에 근심을 묻었다. 아무리 잘 보낸 하루의 밤이어도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 근심과 걱정은 개나 줘버리고 싶었다. 좋은 일도, 기억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괜스레 애초에 있었는지도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떠안지 않은 채 깊은 꿈으로 빠져들었다.
1-1. 호숫가
달빛이 내려앉은 차가운 밤이었다. 숲 속을 헤매던 나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한 호숫가로 향했고, 호숫가의 차가운 물에 나의 얼굴을 슬며시 비추어 보았다.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데다 군데군데 나뭇잎도 붙어있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호수에 비친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문득 호숫가의 물에 얼굴을 파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는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말도 못 할 만큼 환상적이었기에, 이 물에 얼굴을 묻으면 모든 게 다 씻겨 내려갈 것 같았다. 근심도, 걱정도, 지금 내 신세도,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갈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호숫가의 물에 얼굴을 묻었다. 꿈인걸 알 만큼 달콤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