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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by 미지수

글을 읽으시는 데 있어, 이 글에는 <자살>과 <자해>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글은 그저 허구의 이야기일 뿐, 실제 작가의 경험담이나 정서가 포함된 것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불편하신 분들은 다른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 비 오는 날

그날은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오랫동안 찜통 같은 더위에 절여져 왔던 터라 비소식이 그렇게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게 모든 이유는 아니었다. 비가 오면 사라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기에 나는 더욱더 반가웠던 것 같다.

하늘에서 퍼붓듯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걸어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을 때 집에 도착했고, 가서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방바닥이 젖어들었고, 축축한 감촉이 나를 둘러쌌다.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나는 물기도 닦지 않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다행히도 옥상 문은 열려있었고, 나는 사다리를 통해 옥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옥상으로 올라가서 바닥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주머니의 커터칼을 꺼내 들었다. 커터칼의 날을 나의 손목에 대었다. 따가우면서도 소름 돋는 감촉이 느껴졌다. 긴장 같은 건 전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내 손목을 그었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피가 섞여 떨어졌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나의 피와 빗방울로 인한 조그마한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씩 웃고는 인증숏을 남겼다. 이 사진은 지긋지긋한 세상에게 보여주고픈 증거품이었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죽었다, 하고 알려주고 싶었다.

손목을 몇 번 더 그은 뒤, 나는 뒤로 누워버렸다. 딱딱한 바닥에 축축함이 묻어났다. 머리카락에서도 물기가 묻어났고, 칼에도 물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내 얼굴에는 눈물인지 비일지 모를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비는 이래서 좋았다. 모든 게 씻겨 내려갈 것 같아서, 내 마음처럼 흐려서, 무엇을 하든 간에 그 소리가 묻혀서. 몸을 일으켜 옥상 너머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우산을 쓰고 바쁘게 걸어갔다. 웃겼다. 아직도 세상을 열심히 살아간다는 사람이 있다는 게 너무나도 웃겼다. 그래서 나는 목이 터져라 울었나 보다.

아, 이건 예상 못했는데. 이젠 뛰어내려야 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잠깐 나오다가 그칠 줄 알았던 눈물은 내 예상보다 더 오래 흘러내렸다. 나는 눈물을 닦다가 그냥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차피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텐데 무슨 상관인가. 게다가 나는 이제 죽는다.

옥상의 가장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핏방울이 똑, 똑 떨어졌다. 이제 한 발만 더 디디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좋다, 이제 나는 미련 따위 없으니까. 살아야 할 이유도, 희망도 없으니까, 만족한다.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하늘을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제 나는 죽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렇게 나는 인생의 마지막에서 첫 번째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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