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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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선배님. 이 편지가 거기까지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번 편지를 써 내려가 봅니다.
여기는 벌써 봄이 왔습니다. 사람들은 하나 둘 반팔을 꺼내 입기 시작하고, 얇은 겉옷을 걸친 채로 거리를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일까요, 저는 봄인데도 불구하고 나들이는커녕 밖에 한번 안 나가시는 선배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선배님, 혹시 팀장으로서 첫 프로젝트를 맡으셨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저는 아직도 선배님의 표정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설렘, 기쁨, 행복함. 선배님에게서 당최 찾아보기 어려운 표정들이었죠. 선배님께서 진행한 ‘열여섯 프로젝트’의 일지는 제가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열여섯 프로젝트’의 목적은 아프지 않은 나이를 만들자,라는 취지에서 시작되었고, 선배님은 그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하던 노력은 가끔가다 선배님을 배신했고, 때로는 상당히 쓰라린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죠. 매일 하던 실험의 결과는 마침표를 찍은 것 마냥 바뀌지 않았고, 선배님과 저의 나이만 바뀔 뿐 전혀 성과가 없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정말 놀라웠던 점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선배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쓰러져도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그런 선배님의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립니다.
아, 어쩌다 보니 의도와는 다르게 선배님을 찬양하는 글이 작성됐네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습니다. 저는 계절을 여쭙고 싶습니다. 선배님이 계신 장소의 계절이 아니라 선배님의 계절을 말입니다.
선배님, 거기는 어떤 계절입니까? 실험을 시작했던 겨울입니까, 선배님이 싫어하시던 여름입니까? 아니면 저희와 같은 봄입니까, 선배님처럼 재빠르게 사라진 가을입니까? 그 어떤 계절이든 선배님께서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팀장으로서 첫 프로젝트를 진행하실 때 많이 아프지 않으셨습니까. 지명도, 위치도 모르는 그곳에서는 편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선배님이 많이 그립고, 보고 싶지만 선배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잊어도 좋으니, 좋지 않은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잘 압니다. 선배님께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도, 더 이상은 선배님을 뵐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이 마음만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제야 선배님의 프로젝트가 조금은 이해 갑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상당히 의아했습니다. 아픈 나이를 아예 안 아픈 나이도 아니고 조금이라도 덜 아픈 나이로 만들자니, 상당히 이상한 목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선배님이 떠나시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늘 프로젝트의 목적에 대해 물어보면 선배님께서는 빙긋 웃으시기만 할 뿐, 별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런 선배님의 모습을 보고 우습게도 선배님께서도 목적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선배님의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 왜 제게 말해주시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 보자면 선배님께서는 제게 최대한 늦게 알려주시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선배님이 곧 떠난다는 걸, 그래서 저의 나이가 아픈 나이가 될 것이란 걸. 처음에 선배님께서 떠나셨단 문자를 봤을 때의 심정은 세상의 온갖 단어를 다 가져다 붙여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절망적이고, 제 세상이 무너진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마냥 절망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으니까요. 게다가 시간 역시 저를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현재 ‘열여섯 프로젝트’는 선배님이 기존에 작성하신 일지를 토대로 성공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선배님께서 작성하신 일지가 없었다면 아마 ‘열여섯 프로젝트’는 세상에서 지워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일지를 만지는 것부터 보는 것까지 아주 조심스레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가 제 후배들에게 그렇게 시켰으니까요. 이 점은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선배님이 보셨다면 분명 꼰대 같다고 놀리셨겠지만 이제 더는 저를 놀릴 선배도, 그런 선배가 작성하신 일지도 없으니까요. 물론 앞서 말씀드렸지만, 선배님의 일지 덕분에 ‘열여섯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전에, 선배님께 하나 여쭙고 싶습니다. 선배님께서 계획하신 이 프로젝트를, 제가 제일 처음으로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저에게 아픈 나이인 스물넷을, 선배님의 흔적을 빌려 조금이나마 덜 아픈 나이로 바꿔도 되겠습니까?
잘 압니다, 답장이 올 수 없다는 것도, 더 이상 답장을 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요. 그런데도 왜 자꾸만 편지지와 연필에 손이 가는지, 왜 연구 일지를 들여다볼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저에겐 선배님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선배님, 만약에 제가 새로운 사람을 찾았더라도 서운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제 마음속에는 여전히 선배님밖에 없으니까요. 언제나 몇 번이라도 저는 늘 선배님을 찾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