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미리 Oct 22. 2024

옹이

너의 가는 곳

 옹이     


백마 능선의 운무가 걷힌다. 산 아래는 더할 나위 없이 선연하여 마음이 숙연해진다. 전전긍긍하며 걸어온 길이 아득해 돌아본다. 오랜 시간 무등산을 지켜 낸 옹이 박힌 나무들이 여기저기 눈에 밟힌다. 나무들 사이로 아버지의 옹이가 보이는 듯하다. 무등산을 뒤로하고 서둘러 가파른 산에서 내려와 시골집으로 내달린다.


요즘 들어 아버지는 가끔 먼 곳에 시선을 가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라고 하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알게 되면서 나는 그 이름이 좋았다. 세련되고 멋스러워 혼자서 흡족해했다. 〈별 헤는 밤〉을 읽으면 가슴이 얼마나 절절했던가. 내 아버지 이름은 동주다. 시인의 이름과 같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아버지가 믿음직스럽고 자랑스러웠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먼 곳으로 시선을 두고 “아무래도 이제 더는 살 수 없을 것 같으니 너희 어머니와 동생들을 잘 부탁한다.”라고 하시고 그렇게 훨훨 가 버렸다. 몸이 건강하지 못한 어머니와 오 형제를 남기셨을 뿐, 기울어 가는 집안의 나이 어린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국에 들어온 나이는 8살 때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살다가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과 어렵게 배를 타고 한국 땅을 밟았다. 해방을 맞이하는 기쁨이 어떤 것이었는지 깨달을 나이는 아니었지만, 귀국선의 흥분과 희망의 기분을 맛보았을 것이다. 귀국선을 타고 오다가 배가 침몰했다면 아마도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첫 귀국선이 폭발하여 침몰했다는 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침몰 사건이었다.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안고 배에 올랐을 사람들의 절망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1호 귀국선이었던 ‘우키시마오’의 석연치 않은 침몰은 지옥 자체였다고 했다. 8천 명이 넘는 사람이 탔는데 생존자는 천여 명이었다고 전해진다. 미군이 설치한 기뢰 때문이든 일본인이 고의로 배를 폭발시키려고 했든 수천 명이 수장된 사실과 진상 조사도 하지 않는 진실 앞에 무기력한 실정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더불어 오래전에 상영한 〈덕혜옹주〉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1945년 해방 이후에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부둣가에 있었던 덕혜옹주의 모습, 왕조의 부활을 두려워했던 이승만 정부 때문에 귀국선을 타지 못했던 애달픈 장면이다. 불운하고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고국으로 돌아오고자 했지만, 절망의 고통만을 짊어진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가 어떻게 배를 타고 한국에 오게 되었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찾아 현해탄을 건넜다는 할머니 이야기도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덕혜옹주 영화를 보면서 비로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아비규환이었을 상황이 그려졌다. 일본에 끌려간 뒤 그녀가 우울증과 고독감으로 몸서리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어렵게 한국에 들어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생들이 아버지에게 맨 처음 가르쳐 준 건 욕설이었다. 충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고 한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으며, 여기는 일본이 아니고 한국이었으니까.

시골집에 도착하여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오늘은 더 많이 야위어 보인다. 아버지는 입이 짧았다. 젊은 시절부터 앓았던 위궤양 때문에 식당 밥을 드시지 않았다. 엄마는 아버지를 위해 늘 밥을 준비했다. 예식장에 가거나 외출을 해도 빈속으로 돌아와 늦더라도 집밥을 드셨기 때문이다. 그 긴 세월 아버지의 입맛을 책임지고 계셨기에 엄마의 노동 시간은 더욱 길기만 했다.


할아버지는 늘 액자 속에 있었다. 영정 사진 속 모습이 아버지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할아버지는 액자 속에서 말없이 우리 가족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 궁핍한 삶에 찌들었던 할아버지는 일찍이 건강을 잃었다. 독자였기에 살아생전, 형제가 없음을 한탄하셨다.


할아버지를 일찍 여읜 아버지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어쩌면 귀국선을 타고 돌아올 때 이미 예정된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남겨진 재산도 없고 특별히 배운 것도 없었으니 건강하지 못한 할머니를 봉양하는 일이 쉽지 않았음을 지레짐작할 뿐이다.


어느 날, 큰 결심을 하고 아버지는 짐을 싸서 객지로 가는 열차를 탔다. 하지만 남겨진 할머니와 동생들이 당장 무엇을 하며 먹고살 수 있을 것인지 눈앞이 아른거려 그만 회귀하고 말았다고 한다. 근근이 하루 일을 하면서도 주경야독으로 천자문을 익히며 논어를 읽었다고 했다. 그것이 삶의 촉매가 되어 오늘까지 환경 탓하지 않고 잘 살아왔다고 늘 말씀하셨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 낸 아버지의 삶을 제대로 응원하지도 못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윤동주의 시처럼 살고자 했던 아버지의 훈계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긋나긋하게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이제 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라는 《한시외전》의 한 구절을 되뇌어 본다. 아버지는 힘들게 살아오셨기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우리를 못마땅해하셨다. 세상의 운무에 갇혀 사느라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부모님을 제대로 섬기지도 못하고 세월만 좀먹고 있음을 알기에 야윈 아버지의 모습이 더 안타깝다.


아버지가 살아온 길은 옹이로 새겨진 세월이다. 나무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가 그 나무를 말해 주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모습 역시 살아온 세월을 드러내 보여 준다. 흉터라고 부르지 않고 선물이라고 애써 에둘러 보지만 아버지의 가슴속 깊이 생긴 옹이들은 무엇으로도 치유할 수 없음을 안다.


돌아오는 길, 허공을 응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대적인 상황만을 탓할 수는 없다.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아버지가 귀국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널 때와 지금까지 살아온 시대를 무엇에 비교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느냐.” 〈사의 찬미〉 한 토막이 귓전을 맴돈다.

이전 03화 삶은 여행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