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배고픔처럼 찾아온 진짜 번아웃
‘가짜 배고픔’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배가 고픈 건 아닌데, 스트레스를 받거나 마음이 불안할 때 배고픔을 느끼는 현상이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허기져서 생기는 착각.
요즘 나는 이 개념이 ‘번아웃’에도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많은 직장인들이 번아웃을 한 번쯤은 겪어봤을 것이다.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일이 너무 많거나, 공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누군가 내 성과를 가로챘을 때 —
그럴 때마다 “아, 나 지금 번아웃 온 것 같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가짜 번아웃’이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여전히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번아웃을 극복해보려는 의지도 있었다.
의욕이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그건 진짜 소진이 아니라
잠시 흔들린 ‘의욕의 그림자’에 가까웠다.
그런데 요즘 들어 느끼는 건 좀 다르다.
‘가짜 번아웃’이 여러 번 반복되더니,
어느 순간 ‘진짜 번아웃’으로 변해버린 느낌이다.
최근 회사에서 “AI를 적극 활용하라”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듣는다.
위에서는 그게 마치 모든 문제의 해답인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정작 방향성도, 목표도 없다.
“그냥 일단 해봐라.”
이게 전부다.
문제는, 우리는 대학 졸업 프로젝트를 하는 게 아니라
회사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기존에 쌓아온 전문성과 논리, 경험이 있는데
그걸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요즘은 AI가 대세니까”라는 말로 모든 걸 덮어버린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탁, 꺼진다.
“이 일을 왜 하는지” 모르겠는 상태.
이게 바로 진짜 번아웃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그런 생각도 든다.
AI를 활용한 결과물들을 일단 급하게 보고용 자료로 만들어
윗사람들에게 올리는 우리 팀장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참 많은 감정이 교차한다.
그 결과물들은 아직 제대로 된 가치 검증도, 실효성도 없는 상태인데
그저 “AI를 활용했다”는 말 한마디를 위해 만들어지고,
그걸 자랑하듯 보고하는 모습은 어딘가 공허하다.
그게 진짜 변화일까, 아니면 보여주기식 변화를 가장한 자랑일까.
이게 정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인가 —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럴 때면 문득,
내가 그동안 느꼈던 번아웃의 근원이 결국 이런 허무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의 본질이 흐려지고,
‘왜 해야 하는지’가 사라질 때 찾아오는
그 낯선 공백감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업무를 이어가고 있다.
지시를 따르고, 주어진 일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 애쓴다.
어쩌면 이것도 또 다른 ‘가짜 번아웃’일지도 모르지만,
이번엔 무언가 다른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한다.
이 감각을 기록으로 남기면 언젠가 다시 꺼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는, 지금의 나를 조금 다르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