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회사의 CTO와 만남
어느 날, 나는 한 회사의 CTO를 만났다. 그리고 그 만남은 마치 오랫동안 흐린 날씨만 보다가 처음으로 맑은 하늘을 본 것 같은 경험이었다.
이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가장 먼저 놀란 건, 이 사람이 자신의 조직을 설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려면 이런 기능이 필요하고, 이 기능을 위해서는 이런 팀이 있어야 하며, 그 팀에는 이런 역할을 가진 몇 명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마치 건축가가 설계도를 펼쳐놓고 설명하듯, 각 조직의 존재 이유와 구조를 명료하게 풀어냈다. 설령 그것이 완벽한 정답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 사람은 자기 조직의 청사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껏 마주했던 대부분의 리더들은 다르게 움직였다. 문제가 생기면 그제야 해결책을 찾는 식이다. "사람이 부족해요", "일이 너무 많아요"라는 말이 들리면 그제야 "그럼 사람을 뽑아야겠네"라고 반응한다. 경쟁사가 새로운 걸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때 부랴부랴 "우리도 그런 팀이 필요하겠네"라고 말한다.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전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두 번째는 이 사람이 방향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올해는 이런 일들을 했고, 내년에는 이 방향으로 갑니다. 그래서 1분기에는 이걸, 2분기에는 저걸 해야 합니다."
단순히 할 일 목록을 나열하는 게 아니었다. 목적지가 있고, 그곳으로 가는 경로가 있으며, 각 구간마다 통과해야 할 지점이 명확했다.
우리 회사는 어떤가. 당장의 수익에만 반응하다 보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1년 후 우리는 어디에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기본적인 기술 스택 하나 정하는 것도 서로 미루며 결정하지 못한다. 팀장도 있고, 실장도 있고, CTO도 있는데 말이다.
누가 결정을 내릴지 미루다 보면,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시간만 흘러간다.
세 번째는 그의 태도였다.
"기본적으로는 이렇게 합니다. 하지만 합리적인 근거와 생각을 가지고 다른 시도를 하겠다고 하면요? Why not?"
자신이 정한 방식이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명확한 기준은 갖고 있다는 것. 근거 있는 도전에는 기꺼이 문을 여는 태도.
그리고 이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똑같은 잣대를 들이댔다.
"저는 CTO지만, 근거 없는 건 하지 않습니다. 제 사무실 모니터를 4K로 바꿀 이유가 없어요. 저는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보다 밖에서 사람 만나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요. 그래서 전 회사에서 제일 구린 모니터 씁니다."
이 사람은 자기 위치에 취하지 않았다. C레벨이라는 직함을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대화가 끝나고 나서, 한 가지 깨달음이 왔다.
나는 머리속으로는 늘 생각했었다. 조직이라면 이렇게 움직이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나. 리더라면 방향을 제시하고, 근거를 가지고 결정하고, 구성원들에게 명확한 그림을 보여주는 게 맞지 않나.
그런데 내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거의 정반대였다. 결정은 계속 미뤄지고, 방향은 불분명하고, 문제가 터지면 그제야 수습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이상적인 생각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실제 조직은 다 이렇게 돌아가는 거 아닐까? 내가 현실을 모르는 걸까?'
하지만 이번 대화는 달랐다.
내가 생각했던 그 조직, 그 리더의 모습이 실제로 존재했다. 허황된 이상이 아니라, 누군가는 실제로 그렇게 일하고 있었다. 청사진을 그리고, 로드맵을 말하고, "Why not?"이라고 물으며, 자기 자신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사람이 있었다.